소설리스트

흡혈왕-42화 (41/450)

8화. 항쟁 (7)

물론 흑무암쇄진을 얻는다고 햇볕을 완벽하게 막는다는 보장은 없다.

설령 완벽하게 막는다고 해도 문제였다.

바깥에 나갈 때마다 진법을 칠 수도 없고, 친다 한들 진법을 가지고 다닐 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장경이라고 그걸 몰라서 이딴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흑룡교의 구천호법(九天護法)들은 언제 어디서든 흑무암쇄진을 펼칠 수 있었다더라.”

“구천호법?”

“교주 바로 밑에 있었던 교의 중추들이었어. 하나같이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던데.”

이제 구천호법은 없다.

무림맹에게 본단이 함락당한 흑룡교 최후의 날, 교주와 함께 산화했기 때문이다.

“오십 년 전이었으니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의 시대였지. 나도 이번에 흑무암쇄진을 찾으면서 그쪽 역사를 좀 들여다봤는데, 흑룡교가 발호했을 당시 곤륜이 멸문하고 화산과 종남이 본산을 잃고 동쪽까지 후퇴했다는군. 사천삼패가 한동안 봉문할 수밖에 없는 타격을 입었고....”

그리고 사천삼패가 봉문함으로써 난세를 틈탄 태화문이 사천 동부에서 세를 일구었다.

훗날 사천삼패가 다시 활동했을 땐 태화문이 너무 커져버린 뒤라 손을 쓸 기회를 놓쳤다.

“그렇게 된 거였나?”

강엽이 혀를 내둘렀다.

흑룡교는 혈교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았을 뿐, 오래전에 멸문한 마교여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런 역사가 있었을 줄이야?

“그런 놈들을 참 잘도 토벌했구만.”

“백도 정파가 총력전을 벌였으니까. 다행히 그땐 다른 사대마교가 잠잠해서 버틴 거였지.”

만약 그때 다른 사대마교가 가세했다면 세상은 마도천하가 되었을 거라는 게 세간의 중론이었다.

“뭐, 그 뒤에 혈교가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아니, 이건 주제를 너무 벗어났네.”

“그래, 원래 얘기로 돌아오자고.”

“아무튼 흑무암쇄진은... 흑룡교의 호법이라면 누구나 쓸 줄 아는 진법이었어. 그 밑의 간부들도 몇 명은 쓸 줄 알았다고 하고. 아마 흑룡교 내에선 꽤 보편화된 진법이었던 것 같아.”

“이제 와서 찾을 수 있을까?”

일이 년 전도 아니고 오십 년 전에 멸문한 마교였다.

잔당이 남아있을지도 의문이거니와, 있다 해도 그 흑무 뭐시기 하는 진법의 맥이 남아있을까?

강엽이 뻔히 바라보자 장경이 뺨을 긁적였다.

“백방으로 찾는 중이야.”

“언제 찾을지는 모르겠군.”

“어쩔 수 없지. 굳이 이 말을 해주는 건 너도 잘 기억해두란 뜻에서야.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혹시 아냐? 우연히 흑룡교의 흔적을 발견할지?”

물론 흑무암쇄진의 맥이 끊겼을 가능성을 고려해서 다른 수단이 있는지도 찾아봐야 하리라.

그건 장경의, 정확히는 그가 의뢰를 맡긴 정보상인의 몫이었다.

* * *

동패무고에서 나온 두 사람은 곧 얼떨떨한 광경을 마주했다.

“푸흐흐.”

“....”

식당 한가운데 떡하니 앉은 하후진이 거만하게 턱끝을 치켜든 채 실실 쪼개고 있었다.

하후진이 슬쩍 그들을 향해 눈알을 굴리더니 짐짓 놀랐다는 어조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 사자염도 하후진과 비견될 만한 중경 분타의 신성 귀영이 아닌가!”

“.......”

세 사람이 잠시 침묵했다.

장경이 물었다.

“전강, 저 녀석 언제 왔냐?”

“두 사람이 동패무고에 간 뒤에 왔소. 바로 두 사람을 찾길래 기다리라고 했소.”

“왜 우릴 찾는데?”

“나도 모르오.”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홀로 고독을 씹는 표정으로 술을 마신 게 전부였다.

장경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었다.

“하, 저놈은 또 왜 저런다냐....”

뭐 잘못 처먹은 것처럼 헤실거리는 면상을 보니 가까이 가기가 싫어졌지만, 분타주라면 때론 싫은 낭인과도 얘기를 나눠야 하는 법.

적어도 장경은 공사를 혼동해서 낭인들을 차별하는 경우 없는 인사는 아니었다.

“또 무슨 일이야?”

“아아, 장 분타주! 내가 만난 분타주 중에 가장 유능한 분타주여! 이 하후진이 희소식을 가져왔네!”

“술 처먹고 흰소리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라. 나 바쁘신 몸이다, 이 자식아.”

“나 의뢰비 천 냥 올랐어.”

“어이쿠, 그러세요? 참으로 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라고 할 줄 알았냐? 이놈이 어디서 구라를 쳐!?”

장경이 눈알을 부라리자 하후진이 입술을 댓발로 내밀었다.

“아니, 진짜인데....”

“이미 낸 의뢰비를 의뢰인이 올려줬다고? 차라리 수고비를 주지 누가 그런 짓을 하냐?”

“내가 필사적으로 졸랐으니까.”

“뭐?”

“바짓가랑이 잡고 졸랐어. 수고비 그딴 거 안 받아도 되니 천 냥만 올려달라고.”

그 의뢰인이 누군지는 뻔하다.

차마 조천방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지는 못하고 만만한 총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겠지.

문자경이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여겼을까? 세 사람은 이 자리에 없는 문자경에게 측은지심을 보내며 원흉인 하후진을 향해 혀를 찼다.

장경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이 진상 새끼 보게....”

하후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흠흠, 별거 아니지.”

“칭찬 아니다, 이 자식아. 하아, 나중에 문 총관한테 사과해야겠네. 괜히 오해하겠어.”

장경이 돈독이 올라서 하후진으로 하여금 의뢰비를 올리도록 사주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 그건 걱정 마. 내가 솔직히 말했거든.”

“뭘 어떻게 말했길래?”

“그... 이번 의뢰에 참가한 낭인들 중에 금패는 없지?”

“없지. 그게 어쨌다고.”

“그럼 내가 최고잖아. 당연히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계속 말해봐.”

“크흠! 내가 이래봬도 은천패인데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으면 체면이 좀....”

그 다른 사람이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강엽은 말없이 미간을 문지르며 하후진을 세상 다시 없을 미친놈처럼 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강엽보다 적게 받고 싶지 않아서 일천 냥을 더 불렀다는 말이 아닌가?

“이봐, 하후진. 내가 분타주 노릇을 하면서 낭인들을 꽤 많이 봤는데... 그중 네가 최고다. 인정.”

장경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은 법이었다.

“이 정도야 기본이지.”

하후진이 실로 당당하게 가슴을 쿵쿵 치자 장경은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느끼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참자. 참을 인 세 번이면 사람도.... 아니지. 이놈을 죽이면 안 참아도 되는 게 아닐까?’

미친놈과 말을 섞으니 별 미친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강엽이 물었다.

“그거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아, 겸사겸사 다른 용건도 있지. 널 찾으러 왔거든. 비무대회 때 너랑은 못 겨뤘잖냐.”

하후진은 무당 제자 청수와 만나 삼백여 초를 겨룬 끝에 아깝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 붙어보자고?”

“나중에.”

비록 미친 짓을 저지르긴 했어도 하후진은 일의 선후를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런 건 일이 끝나고 말해도 될 텐데?”

“미리 약속을 잡은 거지. 또 언제 기회가 닿을지 모르니까. 우리네 인생은 부평초 같은걸.”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낭인의 인생.

섬서에서 중경으로 넘어온 하후진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 말이 정말 꼭 들어맞았다.

‘나도 언젠가는 중경을 떠날지 모르지.’

흡혈귀라는 게 까발려지면 중경, 아니 강호 무림을 떠나 새외로 도망가야 할지 모른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중경에서 할 일이 없어지면 다른 데로 떠날지도 모르고.

강엽이 피식 웃었다.

“뭐, 좋아. 대신 조건이 있다.”

“뭔데?”

“간밤에 썼던 초식. 완전히 깨우치고 와라.”

하후진의 염도는 완전하지 않다.

강엽은 염왕도문의 이름도, 하후진의 진신무공도 처음 접했지만 염도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하후진이 염도를 자유롭게 수발할 수 있다면 비무대회의 우승자는 그가 되었으리라는 것을.

“그럼 받아주지.”

“흐.”

하후진이 숨을 골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 겨뤄보고 싶은데, 그놈의 의뢰 때문에 참아야 하는 처지가 아쉬웠다.

“좋아. 약속한 거다.”

은천패인 그가 동지패에게 비무를 청했을 때부터 체면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아니, 낭인패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이놈은 머지않아 은패를 따겠지.’

낭인전이 실적이 아니라 실력으로 낭인패의 색깔을 정했다면 벌써 은패가 되고도 남았다.

왜 그런 녀석이 굳이 낭인이 된 건지 의문이었지만, 하후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나 사정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럼 난 간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아,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슬쩍 고개를 돌리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무당파 녀석이 어슬렁거리더라. 고민이 많은 것 같은데...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표정이 께름칙한 게 심마(心魔)에 들었을지도 몰라.”

“청수?”

“뭐 멀리서 한 번 본 게 전부라서 실제로 어쩐지는 모르지.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고.”

손을 흔든 하후진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에 장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신없는 녀석 같으니.”

“그래도 심성은 괜찮은 듯하오. 성정이 조금 투박해도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줄 아니.”

전강의 말에 두 사람도 동의했다. 자존심이 강하긴 해도 털털하고 호탕한 됨됨이였으니까.

게다가 일부러 청수의 일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 무당파 도사는 어떡할 거냐?”

“글쎄,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은데.”

정말 심마에 빠졌다면 그 원인은 아마 강엽이겠지만, 뭔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마에 빠져본 적이 없기도 하고.’

고민이나 번민이라면 많이 해봤지만, 무공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강엽은 생각을 정리하며 청송객잔을 나왔다.

* * *

집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오랜만입니다.”

갈의를 입은 청년 도사였다.

“일부러 찾아왔나?”

“네. 도우께서 언젠가는 낭인전에 들르실 거라 생각해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도우의 집에서 낭인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민가에 세를 들었습니다.”

숙소까지 옮길 정도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런 것치고 청수의 인상은 묘하게 침착했다.

‘아니군.’

강엽이 내심 실소했다.

‘심박이 너무 빨라.’

긴장했다는 증거였다.

“왜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라.”

어려운 건 아니었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청수가 아니었다면 태극의 심상을 얻지도 못했을 테니 하룻밤의 시간 정도는 내줄 요량이 있었다.

“술은 좀 하나?”

“못하진 않습니다.”

“따라와라.”

청송객잔으로 가진 않았다.

낭인들의 이목이 미치는 곳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곳은 아니니까.

근처에 있는 주루에서 은전 한 냥을 주고 상급의 대곡주(大曲酒) 두 병을 샀다.

노주에 들렀을 때 객잔 사람들이 이 술을 먹은 걸 보고 맛이 궁금했는데, 마침 중경에도 있었다.

술병을 들고 평정산의 산기슭을 올랐다. 달이 밝고 바람이 시원하다. 노상을 깔기 좋은 날이었다.

“백주라서 좀 셀 거다. 나도 이건 처음 마셔봐서 맛은 뭐라 하지 못하겠는데....”

“잘 마시겠습니다.”

마개를 따자 감미로운 주향이 코끝을 찌른다.

허공에 술병을 쨍하고 부딪친 두 사람이 동시에 주둥이를 입에 물고 술나발을 불었다.

두 사람 모두 내공으로 주기를 몰아낼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술 먹고 그러는 건 흥취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술을 삼분지 이쯤 비웠을 무렵 약간 취기가 오른 청수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반면 강엽은 흡혈귀가 된 이후 주량이 비정상적으로 늘었기에 처음과 다를 바 없는 신색이었다.

문득 청수가 입을 열었다.

“강 도우와 다시 겨뤄보고 싶습니다.”

강엽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참. 오늘 나한테 싸우자고 하는 놈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는데....”

심지어 두 명 모두 비무대회에서 만난 놈들이다.

다만 하후진과는 상황이 다른 게, 청수는 누가 더 윗줄인지 견주거나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강엽을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후진의 염려와 달리 청수는 차분하고 굳건했다.

“...좋아. 받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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