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1화 (40/450)

8화. 항쟁 (6)

물론 강엽의 말은 농담이었다.

부서진 틈으로 보이는 물건들은 척 보기에도 그렇게 값어치가 나가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뼈가 실린 농담이기도 했다.

‘위력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같은 편까지 휘말리는 거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들 만큼 쓸데없이 강했다. 사방이 트인 개활지에서 혼자 싸울 때라면 모를까, 이런 데서 쓰기에 좋은 초식은 아니었다.

‘그래도 쓴 보람이 있는걸.’

구양세가의 암검들이 통나무처럼 뻣뻣해졌다.

내공이 깃든 검이고 뭐고 같은 편을 일도에 참살한 걸로 모자라 천장까지 박살을 내놨으니 머릿속이 하얘졌을 것이다.

투학!

“흡!”

용린투와 흑검이 얽혔다.

기민한 몸놀림으로 기습을 막아낸 장년인이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본능적으로 여기가 승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압!”

장심과 부딪쳐서 튕긴 검이 기형적으로 꺾였다.

곧장 목을 노리고 짓쳐들어오는 검이 분신을 낳은 것처럼 두 자루로 나뉘었다.

한순간 이룬 분검(分劍). 한쪽은 검을 거두면서 날린 검풍이고, 다른 하나는 검초에 진신내공을 듬뿍 담은 강격이었다.

경중은 있으나 허초는 없다. 둘 다 요혈을 노리는 진짜배기였다.

그러나 강엽은 이미 초감각의 영역에 들어선 뒤였다.

장년인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한순간 가속한 사고와 감각이 시간을 분절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장년인의 눈빛이 향하는 곳과 검격이 뻗는 방향만 보고 노림수를 깨닫는다.

속으로 셋을 셀 동안 대응책을 짜낸다.

장년인의 움직임엔 작은 약점이 있었다. 검격을 전개하는 동안 드러나는 순간의 허점.

강엽이 허리를 뒤틀면서 일보를 내디뎠다.

등으로 검풍을 스치듯이 받아내고, 검격을 흘려내며 일보 전진, 종아리 비복근에서 끌어올린 힘을 허리와 등근육을 지나 수축된 팔근육으로 잇는다.

한계까지 쥐어짠 근육이 이완되면서 나선을 그려낸다.

마치 배배 꼬인 옷자락을 한순간에 풀어내는 것 같았다.

태극의 심상을 파고든 끝에 단초를 얻은 전사경(纏絲勁)의 일권.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든 일권이 장년인의 명치 어림을 채찍처럼 강타한다.

콰아앙!

상반신이 으스러진 세가의 암검은 다른 지붕에 처박혀, 몇 바퀴를 구른 끝에 아래로 떨어졌다.

강엽이 혀를 찼다.

‘회자결(回字訣)을 제대로 싣지 못했어.’

이기긴 이겼는데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사경이 작렬하는 순간, 보완할 점이 몇 가지 떠올랐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하후진이 암검 두 명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오래 끌진 않을 기세였다.

훌쩍 뛰어내린 강엽이 장년인의 앞에 섰다.

시체에 손톱을 찔러 구멍을 만들고, 졸졸졸 흘러내리는 피를 물주머니에 담았다. 한 모금 목구멍에 넘기자 켜켜이 쌓여있던 갈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물주머니 세 개를 가득 채우고서야 채혈을 끝낸 강엽이 원래 장소로 돌아왔다.

철푸덕 앉은 하후진이 투덜거렸다.

“푸하, 힘들다. 삭신 아파 죽겠네.”

“아까 무리한 것 같던데.”

강엽이 혀를 내둘렀다. 만약 자신이라면 그 염도를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었을까?

‘힘들 것 같은데.’

방향과 위력을 조절할 수 없지만, 적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 일격필살의 초식이었다.

도격의 속도가 바람처럼 빠른 데다 경파의 범위가 넓어 미리 수를 읽고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때 하후진이 말했다.

“저쪽도 끝난 모양인데.”

그의 말마따나 거룡방도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낭인들과 조천방의 방도들이 거룡방의 뒤를 쫓으려고 하자 강엽이 외쳤다.

“좇지 마!”

“뭐? 하지만...!”

낭인들이 주춤거렸다.

무시하기엔 그 말을 한 사람이 강엽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욕금고종(欲擒姑縱)이라고 했다. 적을 지나치게 몰아치면 화를 입는 법이야. 사위도 컴컴한 데다 적들이 매복을 남겨뒀다면 반격당할 수도 있으니....”

“야.”

하후진이 귀를 후비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무식한 애들 앞에서 문자 읊지 마라. 저치들이 욕금고종이라는 말을 알겠냐?”

“삼십육계다. 군문에 종사하지 않아도 병법서 좀 읽었으면 누구나 아는....”

“그러니까. 쟤들이 병법서를 봤겠냐고. 지들 이름 쓸 줄 아는 놈들도 드문데.”

“....”

순간 강엽은 말문이 막혔다.

슬쩍 낭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다들 시선을 피한 채 눈을 뒤루룩 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경도 낭인들 대부분이 까막눈이라고 했던가.

자신이야 어릴 적부터 학문을 접했으니 무심코 병가의 구절을 지껄인 거지만, 낭인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한 뒤에 다시 말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 다 죽이자고 좇으면 저놈들도 죽자고 싸울 거다.”

“아아!”

이번엔 알아들었는지 다들 납득했다.

하후진이 실소했다.

“거봐라.”

“그래, 내가 실수했다.”

“참.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도 욕금고종이 뭔지 몰라. 내가 읽은 책은 천자문이 전부거든.”

“....”

“흠흠, 그래도 난 까막눈 아니다.”

뒤늦게 변명하는 하후진의 모습에 강엽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뭐라냐?”

* * *

싸움이 난 곳은 중경 남쪽의 왕가진(王家津)이라는 포구 마을이었다.

같은 중경이라고 해도 조천방 본타와는 칠십 리나 떨어졌기 때문에 바로 올 수는 없었다.

조천방의 사람이 온 것은 두 시진이 조금 지난 오경(五更) 중엽쯤이었다.

사람이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하러 가고, 다시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그쯤 걸린 것이다.

이미 싸움이 끝난 만큼 조천방에서 많이 몰려오진 않았지만, 그중엔 총관인 문자경이 있었다.

“휴,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 무사님이 안 계셨다면 큰 화를 입었을 겁니다.”

문자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 며칠새 거룡방과의 싸움이 격렬해졌기에 그들도 각 거점의 방비에 힘쓰고 있었다.

하후진처럼 강한 낭인들을 다수 고용해서 각 거점에 보내고 우호 문파에도 도움을 청한 것이다.

하지만 거룡방, 아니, 그 뒤에 있는 구양세가 역시 보란 듯이 더 많은 전력을 투입했다.

구양세가의 암검으로 보이는 자들이 다수 등장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 무사님께서 계신 덕에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보쇼, 나도 열심히 싸웠는데?”

하후진이 뚱한 표정으로 끼어들자 문자경이 쓰게 웃으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하하, 제가 어찌 하후 무사님의 공을 잊겠습니까? 방주님께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낭인전의 낭인들을 고용하면 의뢰비 말고도 위험수당이나 특별수당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저것 수고비가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안 줘도 상관없지만, 힘든 싸움을 치른 낭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의뢰인이 가외로 주는 수고비였다.

하후진의 안색이 밝아졌다.

“흠흠, 그러면 창고를 좀....”

“예?”

문자경이 눈을 껌뻑거렸다.

하후진이 먼 산을 돌아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실은 암검 새끼들 잡다가 창고 하나를 부숴먹어서....”

잠시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강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덧붙였다.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보관했던 창고 같소. 비싼 물건은 없으니 잘 말하면 별탈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요.”

“그렇군요. 저희가 잘 알아보고 조치하겠습니다. 이 일로 두 분께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이놈 혼자서 부순 거니 알아서 하시고.”

옆에서 하후진이 가자미눈으로 째려봤지만 강엽은 뭐 어쩔 거냐는 듯이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내가 전에 말한 조건 말인데.”

“아, 예.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방주님께서 수락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사실 이 건을 두고는 조천방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조천방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게 본인이 내킬 때만 싸우겠다는 뜻과 뭐가 다른가?

하지만 왕가진에서의 싸움 소식을 듣고 조천방주는 강엽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주라고 했다.

“자세한 얘기는 청송객잔의 장 분타주와 나누겠지만, 의뢰비 역시 최고로 맞춰드리겠습니다.”

“최, 최고?”

하후진이 당황했다.

그가 약속받은 의뢰비는 삼천 냥이다. 최고라면 그 이상을 주겠다는 것 아닌가?

“동천패까지 금방 뚫겠는걸.”

강엽이 작게 웃었다.

낭인패는 실적으로 평가된다. 동천패에 오르는 조건은 수수료로 오백 냥을 채우는 것이다.

수수료는 의뢰비에서 일 할을 떼가니 하후진이 받은 것만큼 받아도 삼백 냥이었다.

“원래는 동천패까지 가는 데만 몇 달인데.”

하후진이 질려서 중얼거렸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일인무맥을 계승한 덕에 다른 낭인들과는 출발점이 달랐다. 하지만 그도 동천패에 오르는 데는 반년이 걸렸는데....

“너 동지패에 오른 지 얼마나 됐냐?”

“열흘... 아니, 열하루인가?”

“....”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이다. 그럼 동지패가 된 뒤에 첫 의뢰로 다음 승급에 필요한 할당량을 절반 넘게 채운다는 말 아닌가?

‘아, 아니, 잠깐. 최고로 대우해준다고 했잖아. 설마 오천 냥이나 받진 않겠지?’

하후진이 문자경을 향해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강엽이 의뢰 한 방에 승급한다면 뭔가 억울할 것 같았다.

‘물론 이놈 실력은 진즉에 동천패를 뛰어넘었지만, 어쨌든 나도 그렇게 개고생했는데 이놈은 최소한 절반만큼은 고생했으면 좋겠다!’

...대충 그런 심리였다.

하지만 낭인전의 규칙이나 사정은 잘 모르는 문자경은 하후진의 눈빛을 단단히 오해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섭섭지 않게 챙겨드린다니까요. 제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래도 의뢰인이 돈은 많이 챙겨준다니 그걸 위안으로 삼는 수밖에.

내심 입맛을 다신 하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행히 하후진의 불안과 달리 강엽이 단번에 오천 냥을 받아서 승급하는 일은 없었다.

다음날 저녁에 찾아갔을 때 장경이 말했다.

“훗, 사천 냥을 받기로 했다.”

불과 며칠 전에 동지패에 올랐음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돈이다.

하지만 강엽의 행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만했다.

“물론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의미도 있겠지. 또 누가 알겠냐고. 나중에 네 힘이 필요한 때가 있을지.”

물론 그건 위기를 넘기고 난 다음의 일이다.

당장은 거룡방, 그리고 배후에 있는 구양세가의 위협을 넘기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보다 맡기고 싶은 일이 있는데.”

“뭔데?”

“시중에 영약이 있는지 알아봐 줘. 최대한 다양한 종류로 말이야.”

“영약을?”

“그래.”

“흠, 그래. 어려운 건 아니군. 백년하수오(百年何首烏) 같은 건 찾아보면 은근히 있는 편이기도 하고....”

“한꺼번에 많이 살 필요는 없어.”

일단 자신의 몸에 맞는지 살피는 게 먼저였다.

“알겠다. 매물이 있는지부터 살펴볼게. 아, 그리고 이건 다른 문제이긴 한데....”

장경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앞으로 할 얘기는 다른 낭인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아래로 내려가자.”

동패무고라면 내밀한 얘기를 나눠도 바깥에까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강엽이 의아해하면서 따라가자 장경의 눈짓을 받은 전강이 자연스럽게 동패무고의 입구를 등졌다.

“뭔 얘기인데 그래?”

“저번에 알아봐달라고 한 거 말이야.”

“...햇볕 말이군.”

“그래. 네가 노주에 가 있는 동안 단서를 찾았어. 흑룡교라고 알아?”

“사대마교 중에 하나지.”

강엽도 무림에 대해 공부한 덕에 사대마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모산혈조가 속한 혈교를 위시로 수십 년 전에 천하에 겁란을 일으켰던 네 개의 마교였다.

“다른 사대마교랑 달리 흑룡교는 교주를 포함해서 수뇌부가 전멸했어. 교도들도 궤멸당해서 사실상 명맥이 끊긴 거나 다름없고. 근데 내가 알아본 바로는 흑룡교의 거점은 사시사철 짙은 안개가 깔렸다더라. 그게 진법의 묘용이라는 거야.”

“진법의 이름이 뭐지?”

“흑무암쇄진(黑霧暗鎖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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