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영약 (3)
본선 진출자가 우승까지 하려면 치러야 하는 비무는 총 다섯 번.
선강후를 꺾은 뒤 강엽은 내리 두 번의 비무를 더 치렀다.
두 명 모두 선강후보다 강했지만 승부를 오래 끌진 않았다.
체력과 내공을 아끼기 위해 단기결전을 택한 건데, 요살마녀의 피를 마시고 내공량이 늘어났기 때문에 아직까진 끄떡없었다.
문제는 다른 경쟁자들인데....
“으아, 계속 싸우니 개빡세구만!”
은천패 낭인인 하후진이 기지개를 켜며 투덜거렸다.
“음....”
아직까지 정체를 모르는 청수도 약간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몸엔 부상은커녕 땀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이 정도는 가볍다 이거지.’
아쉽게도 비무 참가자는 자기 비무가 끝나면 대기실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강엽도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느껴지는 기도로 대충 이만큼 강할 것이다, 라고 가늠할 따름.
“강여... 아니, 강 무사.”
습관적으로 강엽의 이름을 부를 뻔한 보표가 급히 얼버무렸다.
“좀 더 쉬어야 하오?”
“아니.”
비무를 빨리 끝낸 데다 틈틈이 운기조식을 한 덕분에 만전이다.
마침 상대도 괜찮다고 했는지 보표는 출전할 것을 지시했다.
짝짝짝짝짝-!
비무대로 나가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점잖게 보이고 싶은지 투기장의 관객들처럼 환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 중 몇 명의 얼굴을 투기장에서 본 기억이 있는 강엽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번만 이기면 결승전.’
결승전에서 이기면 구엽월령초를 얻는다.
구엽월령초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순 없는 노릇.
필시 상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운이 좋군.”
쇠를 긁는 것마냥 끔찍하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두꺼운 피풍의를 입고, 얼굴 아래를 붕대로 감싼 남자가 맞은편에서 올라오며 음산하게 말한다.
“세 명 중 가장 약한 최약체가 준결승 상대라니.”
저렴한 도발에도 강엽은 분개하기는커녕 피식 웃었다.
“뭔 증거로 내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하지?”
“증거는 없다. 그냥 감이지. 하지만 사자염도의 이름은 들어봤다. 섬서에선 꽤 유명한 은천패 낭인이야. 사대마교의 잔당을 여럿 토벌하는 전과를 세웠다.”
반면 청수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자들을 겪어보았다.
“그 청수라는 놈은 아마 ‘산(山)’에서 왔을 거다. 어떤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쓸데없는 말을 했군. 어차피 곧 떨어질 놈인데 혓바닥이 너무 길었어.”
“길고 짧은 건 두고 봐야지. 그리고....”
강엽이 관절을 뚜둑 풀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도 이제까진 전력을 다하지 않았거든.”
* * *
조영옥이 흥미진진해했다.
“누가 이길까?”
“무명객(無名客)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딱 봐도 위험한 느낌을 풍기지 않습니까. 반면에 귀영은....”
대답을 하던 조영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할 말을 속으로 골랐기 때문이었다.
“...무명객보다는 평범한 것 같습니다.”
물론 강엽도 강하긴 했지만, 상대인 무명객보다 강렬한 위압감을 주진 못했다.
“후후, 이건 의견이 갈리는걸.”
“누님은 강엽이 더 강하다고 보십니까?”
“글쎄다. 워낙 보여준 게 없어서 아직은 모르겠네.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조영옥이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어깨 관절을 풀며 무명객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강엽을 향해 눈웃음을 짓는다.
“이번엔 제대로 보여줄 것 같은걸.”
* * *
무명객의 무기는 독특했다.
칼날의 길이만 한 자가 넘고, 칼날이 중간부터 낫처럼 급격하게 휘어지는 기형병기였다.
생긴 건 단도와 비슷하나 조금 더 길고 칼날의 면적도 넓다. 게다가 크게 휘어졌기 때문에 찌르기엔 적합하지 않은 형태였다.
한 손에 한 자루씩 쌍곡도(雙曲刀)를 쥔 무명객이 눈에서 살광을 뿌리며 당당하게 걸어온다.
“포기해라. 그럼 얌전히 보내주마.”
“꿈도 야무지군.”
코웃음도 치지 않고 받아친 강엽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운화장은 관객들을 위해 천장에 야명주를 다수 박아넣고, 곳곳에 등롱을 달아놨다.
그렇기에 칠흑처럼 어둡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밝지도 않아서 곳곳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암신을 쓰는 데는 지장 없겠어.’
앞서 세 번의 비무에선 암신을 쓰지 않았다. 그럴 만한 적수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무명객의 기도는 그들보다 강했다. 단순히 강한 게 아니라 음침하고 어둡다. 마치 어둠에 숨은 채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처럼....
‘아쉽지만... 여유를 부릴 상대는 아니군.’
만약 여유가 있다면 상대가 전력을 발휘하도록 내버려둔 뒤에 배울 만한 점이 없는지 살펴봤으리라.
하나 애석하게도 무명객은 그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쐐애액!
다섯 줄기의 섬광이 어둠을 가로지른다.
“흡!”
무명객의 쌍곡도가 십자로 교차했다.
도풍이 섬광을 상쇄하는 찰나, 무명객이 대뜸 뛰어들어 강엽의 가슴팍을 노렸다.
칼날의 크기 때문인지 단도를 휘두르기보다는 마치 도끼날로 내려찍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크게 휘어진 칼날 때문에 손목의 각도와 칼날이 닿는 범위가 일치하지 않지만, 진작부터 초감각을 쓰고 있던 강엽은 어렵지 않게 피했다.
분명 그런 줄 알았는데....
“...!”
돌연 무명객의 팔이 물러난 거리만큼 길쭉해지는 게 아닌가?
콰앙!
육중한 굉음이 일면서 비명이 터졌다.
“크억!”
무명객이 튕겨나와 땅바닥을 뒹굴었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팔이 길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
강엽이 그 앞으로 걸어나온다.
입고 있는 흑색무복의 옆구리가 길게 찢겨진 채로.
“오른손의 곡도로 시선을 붙잡고, 왼손의 곡도로 시간차 공격을 날린다....”
원래는 복부를 노렸지만 초감각을 펼치면서 대응했기에 옆구리를 스쳤다.
하나 그랬는데도 살짝 베일 만큼 신속하고 은밀한 공격이었다.
‘인식의 사각을 노리는군. 이런 식의 싸움에 익숙한 놈이야.’
무명객이라는 별호와 달리 싸움에 이골이 난 놈이었다. 애초에 무명객이라는 별호가 본인이 등록한 것이니 진짜인지도 모르겠지만.
“...크흐, 생긴 것 답지 않게 무식하군.”
무명객이 어깨를 붙잡으며 일어났다.
곡도가 파고들었다 싶을 때 강엽은 전혀 예상치 못한 한 수를 보여주었다.
딱 일보를 옮겨 간격을 어그러뜨리고, 잠시 드러난 빈틈을 절묘하게 찔러 맞치는 식으로 대응했다.
몸을 비틀어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면 승부는 이 한 번의 경합으로 갈렸을 터.
그러나 강엽은 여유를 되찾을 틈을 주지 않았다.
바로 암신을 펼쳐 어둠에 녹아든 뒤에 무명객의 면전으로 쇄도했고, 그리고....
투앙!
“커헉!”
어깨로 들이받으면서 이제 막 몸을 일으킨 무명객을 다시 한번 튕겨냈다.
아예 장외로 날려버릴 생각.
“큭, 이놈이!”
곡도 한 자루를 놓친 무명객이 비무대의 모서리를 잡고 몸을 반전시켰다.
면전에 달려든 강엽을 향해 곡도를 비스듬히 휘둘렀지만, 강엽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눕힌 다음 바닥을 쓸 듯 무명객의 하체를 오금으로 휘감았다.
무명객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쓰러지는 찰나 장풍을 날리면서 균형을 되찾는다.
초감각을 쓰고 있는 강엽은 침착하게 피한 다음 무명객을 걷어찼다.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으로 하중을 늘린 무명객은 버티어 대항하는 대신 충격을 해소하며 하나 남은 곡도를 휘둘렀다.
강엽의 다리 힘줄을 잘라버릴 작정으로.
터엉!
“컥...!”
그러나 접촉한 상태에서 은밀하게 흘려넣은 암경(暗勁)이 그를 다시 날려버린다.
암신을 펼친 강엽이 어둠 속에 녹아들자 무명객은 무언가 직감한 듯 곡도를 역수로 고쳐 잡아 크게 휘둘렀다.
관절이 기이하게 꺾이면서 등 뒤를 벤다.
강엽이 등 뒤를 노렸다면 허를 찔렸을 수법이었다.
어디까지나 등 뒤를 노렸다면 말이다.
“감히 날 속이다니!”
무명객이 치를 떨었다.
강엽은 사라지는 척하면서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속은 놈이 병신이지. 그리고....”
강엽은 그의 비밀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팔이 자유자재로 늘어나나 싶었는데... 축골공(縮骨功)을 익혔구만.”
“...!”
무명객이 흠칫했다.
본디 축골공은 뼈를 압축시켜 몸을 줄이는 무공.
하지만 무명객은 발상을 바꿔서, 평소엔 축골공으로 몸을 줄였다가 결정적일 때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써먹고 있었다.
“축골공은 보는 건 처음인데 상상 이상으로 기괴한걸. 그런 식으로 쓰면 관절이 남아나나?”
강엽이 축골공을 아는 것은 동패무고의 비급에서 축골공에 대한 기록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고 무명객이 기괴한 방식으로 써먹었기 때문에 이제야 떠올렸을 뿐.
“뭐, 상관없지.”
축골공을 본 것만으로도 귀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무명객이 가진 밑천이 그게 전부라면, 더 이상 볼 것도 없으리라.
“이놈, 건방떨지 마라!”
격분한 무명객이 뛰어들며 하나 남은 곡도를 난상으로 휘둘렀지만, 이미 무명객의 움직임에 적응한 강엽은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도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명객을 압도하고 있었다.
빠악!
칼을 쥔 팔뚝을 팔뚝으로 친다.
그로써 곡도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었다.
“흐읍!”
무명객이 다른 손으로 곡도를 바꿔쥐었다.
아니, 바꾸려고 했다.
터엉!
그러나 강엽은 손날로 곡도를 후려쳐서 날려버렸다.
“아, 안 돼!”
“돼.”
강엽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이 번졌다.
그때부터 치고 박는 박투가 시작되었다.
지난 며칠간 유성홍과 대련하면서 스스로를 연마한 강엽은 요살마녀와 싸웠을 때보다도 한층 정교한 무공으로 무명객을 압박했다.
무명객의 투로가 시작되는 부분을 간파하여 맥을 끊고, 자신의 간격으로 끌어들어 선택지를 없애버리는 것.
금나수로 무명객의 팔을 꺾은 강엽이 주먹을 때려박자 무명객의 몸이 새우등처럼 꺾이면서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커허...!”
“내가 가장 약하다고?”
머리채를 쥐어잡고 무릎을 올려친다.
“착각한 거 아닌가? 네가 가장 약한 것 같은데.”
장심으로 턱주가리를 날린다.
빠악!
짧게 끊어치는 연타가 무명객의 안면을 두들긴다.
푸학!
패고, 또 팬다.
무명객은 처맞는 와중에도 빠져나가려고 분투했다.
그러나 강엽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기에 수세를 강요당했다.
이게 실전이었다면 무명객은 이미 죽었다. 비무 규칙상 죽여서는 안 되기에 강엽이 손속에 사정을 두면서 두들겨패고 있을 뿐.
결국 거듭되는 충격을 버티지 못한 무명객이 대 자로 뻗었다.
“후우.”
강엽의 승리였다.
* * *
“오오!”
짝짝짝짝짝-!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입장할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땐 비무를 하는 사람에 대한 의례적인 예의였다면 지금은 진심이었다.
그들에게 진귀한 볼거리를 보여준 승자에 대한 답례로 말이다.
강엽은 박수에 반응하지 않았다.
“잠깐만.”
비무대로 올라온 보표들이 움찔했다. 강엽이 쓰러진 무명객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던 것이다.
“강 무사, 그는 이미 정신을 잃었...!”
보표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강엽이 무명객의 얼굴을 벗기자 새로운 얼굴이 드러났던 것이다. 누가 봐도 불혹은 넘긴 중년의 얼굴이 드러나자 경악성이 터졌다.
“진짜 얼굴이 아니라고?”
“설마 인피면구(人皮面具)...!”
강엽은 인피면구가 뭔지 모른다.
다만 무명객의 표정은 감정적으로 격해졌는데도 불구하고 무표정했기 때문에 위화감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피부의 일부가 찢어지면서 또 다른 피부가 드러나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가짜 얼굴이라니?”
“가만, 이 비무대회는 참가할 수 있는 나이가 정해져 있지 않나? 그럼 저놈은...!”
관중석에서 있던 관객들도 웅성거렸다.
조영옥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영빈.”
“예, 누님.”
“저놈 데려가 심문해라. 정체가 뭔지, 왜 신분을 속이고 왔는지 모두 밝혀내.”
“알겠습니다.”
조영옥은 화가 났을 때 표정이 사라진다. 살얼음이 낀 것처럼 냉막한 표정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만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크아아악!”
무명객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빌어먹을 태화문!”
문제는 정신을 차리면서 난장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
막 달려들려던 강엽이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아하, 뭔가 했더니... 본문에 원한이 있는 분이셨어?”
조영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구엽월령초를 노리고 나이를 숨긴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죽어어어엇!”
무명객이 비무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