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영약 (2)
강엽은 기분이 묘해졌다.
‘여기서 싸울 줄이야....’
투사로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인이 보는 앞에서 싸운다고 생각하니 보표일을 처음 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 오래전의 과거는 아니지만, 그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싸우는 게 부담이었다.
혹시 다쳤을 때 재생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결코 좋은 소문이 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뒤로 여러 일을 겪으면서 달라졌다.
‘이젠 재생력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
요살마녀의 피를 마시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새로운 능력을 얻은 것은 아니나 기존의 능력을 다루는 폭이 한층 커진 것이다.
내공도 늘어나고, 당분간 흡혈할 필요도 없고, 조절 안 되던 재생력도 조절하게끔 해주고....
‘역시 그때 흑풍사우를 따라 산적 토벌에 참여한 게 참 잘한 짓이었어.’
강엽은 자기가 생각해도 대견해서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이봐, 여기 자리 있냐?”
“음?”
강엽이 고개를 들었다.
사자 갈기처럼 머리를 풀고 왼쪽 이마에서부터 오른쪽 턱선까지 이어지는 긴 흉터를 아로새긴 청년이 사납게 웃고 있었다.
“대기실에 자리가 없어서 말이야.”
본선에 진출한 인원은 서른두 명.
당연히 서른두 명이 한꺼번에 치고받을 수는 없기에 운화장은 참가자들이 쉴 대기실을 마련했다.
“다른 자리도 많을 텐데 왜 여기에?”
“없어. 다 찼다고. 여기만 텅텅 비었어. 봐.”
청년이 짐짓 과장되게 손을 벌렸다.
과연 그의 말대로 저쪽만 참가자들이 모인 채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중 일부를 청송객잔에서 봤던 기억을 떠올린 강엽은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뭐냐. 저쪽에 모인 놈들이 이쪽으로는 잘 안 오던데. 왠지 형씨 눈치 보는 것 같아.”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왠지 다른 참가자들이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짐작되기는 하지만 굳이 그걸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자리는 아무데나 앉으면 된다. 나한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어.”
“아, 역시.”
씩 웃은 청년은 일 장쯤 떨어진 곳에 앉았다.
“만난 김에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때? 내 이름은 하후진이다. 섬서에선 사자염도(獅子炎刀)라고 불렸지.”
“강엽.”
“어....”
하후진의 반응이 살짝 늦었다.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자, 잠깐...! 객잔에서 들은 것 같은데... 설마 형씨가 귀영이야!?”
“귀영이라....”
강엽이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요살마녀를 죽인 뒤에 그런 별호가 붙긴 했지만, 들을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귀신의 그림자라니?
‘흡혈귀랑 겹쳐서 별로인데.’
물론 낭인들이 강엽의 정체를 알고 별호를 붙이진 않았지만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렇게 불리긴 하는데....”
“히야, 유명인이셨구만.”
하지만 정작 하후진의 낯짝에서 주눅든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게 아닌가?
“으하하! 중경에 오자마자 형씨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서 한번 붙어보고 싶었지. 중경 분타로 찾아갈까 싶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구만.”
“...낭인인가?”
강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청송객잔이나 낭인전이라고 하지 않고 중경 분타라고 콕 찝어 말한 것이, 마치 다른 낭인전 분타에 가봤다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촉이 좋으시구만.”
하후진이 무언가를 꺼냈다.
통짜은으로 만든 길쭉한 사각패엔 천(天)이라는 글자가 보란 듯이 새겨져 있었다.
“은천패....”
“이래봬도 나도 사선을 넘어온 몸이거든.”
낭인전은 철저한 실적제.
얼마나 실력이 출중하든 실적을 쌓지 못하면 등급을 올릴 수 없다.
강엽도 산적 토벌이 공로로 인정되면서 얼마 전에 동지패로 올라섰지만, 은천패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실적을 쌓아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이도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저 나이에 흑수양보다 한 단계 높은 낭인패라니....’
대체 얼마나 많은 의뢰를 완수했단 말인가?
“변방에서 일하는 게 질려서 남쪽으로 왔는데 비무대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들었어. 원래는 중경을 거쳐서 동쪽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지. 구엽월령초인지 뭔지 얻어갈 생각이야.”
역시 은천패쯤 되면 우승을 노리는 걸까.
‘의외로 초조하거나 걱정이 되진 않는군.’
오히려 반대였다. 눈앞의 도객이 얼마나 강할지 기대된다. 은천패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할 만한 적수였다.
“실례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다.
거친 갈의(葛衣)를 입은 청년 검객이었다.
“혹시 자리가 있다면 앉아도 되겠습니까?”
“자리 많으니까 알아서 앉으쇼.”
하후진의 말에 청년이 감사의 인사를 보내며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릴 잡았다.
마치 삼파전을 하듯 품(品) 자 형으로 앉은 모양새.
하후진이 물었다.
“그쪽 형씨는 이름이 뭐야?”
“저 말입니까?”
“어.”
“청수(靑修)라고 합니다. 그러는 소협의 성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섬서에서 가장 유명한 낭인인 사자염도 하후진이지. 들어보셨나?”
“송구합니다. 제가 견문이 미천하여... 섬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엥? 어디서 왔는데?”
“호광입니다.”
강엽은 문득 웃기다는 생각에 짧게 웃었다.
비무대회는 사천의 중경에서 열리는데, 정작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은 모두 다른 지역 출신이지 않나.
‘하지만 이놈도 만만치 않군. 왠지 유성홍과 붙어봐도 질 것 같지 않아.’
은천패인 하후진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를 청수라 소개한 청년의 존재감도 심상치 않았다.
뚜렷하게 과시하진 않지만, 마치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처럼 허허로운 기도를 풍긴다.
또 하나의 강력한 우승 후보가 등장한 것이다. 하후진도 느꼈는지 하얀 이를 드러냈다.
“생각보단 싸워볼 만한 놈들이 많은걸. 하지만 미리 말하는데 내가 우승할 거다.”
강엽은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았고, 청수는 말없이 엷은 미소를 짓기만 했다.
* * *
대진이 정해졌다.
‘이거 참 공교로운데.’
강엽이 턱을 매만졌다.
예선에서부터 올라온 이와 본선부터 참가한 이를 마구 섞어놨기에 누가 걸려도 이상하진 않다.
잠시 후 비무대에 오르자 앞서 운화장에 왔을 당시 인사를 나누었던 선강후가 입매를 비틀었다.
“운이 좋군. 일회전부터 당신을 만날 줄은 몰랐소.”
처음 만났을 때보다 위풍당당한 기세였다.
호승심을 불태우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태도.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니고.... 왠지 몰라도 날 싫어하는 것 같은데?’
낯선 경험은 아니었다.
낭인들 중에도 자신을 고깝게 보는 자들이 널려 있었으니까.
시비를 걸었던 몇 명을 본보기로 박살낸 이후엔 눈깔을 곱게 뜨고 다녔지만 말이다.
“나도 청성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었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일지 기대가 크다. 부디 최선을 다하도록.”
“....”
선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강엽을 노려보며 검을 뽑을 뿐.
강엽은 그런 선강후를 무시하고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영옥의 초대를 받고 온 연회의 손님들이 수행원들과 호위들에 둘러싸인 채 앉아 있었다.
가운데의 귀빈석엔 조영옥이 앉아 있다. 강엽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강엽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닥 가까이하고 싶은 여자는 아니야.’
딱히 그녀가 잘못한 것도,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니지만 깊게 엮이면 피곤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뒤이어 선강후의 아비를 찾고 나서야 강엽은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 선강후를 돌아봤다.
“날 이겨서 인정받고 싶나?”
“윽...!”
정곡을 찔렸는지 선강후가 날선 반응을 보였다.
강엽이 실소했다.
“흥분하지 마라. 머리에 피가 쏠리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
오만한 충고에 선강후는 말없이 입술만 짓씹었다.
심판이 시작을 알리며 비무대 밖으로 물러나자 선강후가 기합성을 뿌리며 달려들었다.
강엽의 자세에서 허점을 발견한 것이다.
한달음에 달려든 선강후가 요혈을 향해 검격을 뿌리는 찰나....
“그걸 속냐?”
강엽이 상체를 흔들어 검격을 피했다.
“엇!?”
선강후가 경호성을 질렀다.
왼팔과 겨드랑이 사이로 검을 흘려버린 강엽이 안면부를 향해 팔꿈치를 들어올리는 게 아닌가?
마치 사전에 합을 짜맞춘 것처럼 그림 같은 역습.
가까스로 검을 회수하면서 고개를 비튼 선강후가 휘돌며 가슴을 베었지만, 강엽은 예상했다는 듯이 칼날을 아래에서 위로 걷어찼다.
쩌엉!
“으윽...!”
손목을 찌르르 울린 통증에 선강후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몇 걸음 물러났다.
검은 왱왱 울리는데 칼날과 맞닿은 강엽의 가죽신은 베인 흔적조차 없었다.
혈공진기로 보호한 것이다.
“검법 이름이 뭐지?”
“...송풍검법(松風劍法)이오.”
소나무숲 사이로 솔솔 부는 바람처럼 눈앞에 장애물이 있어도 막힘없이 흐름을 이어가는 검법.
그러나 선강후의 검법은 그런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다. 강엽이 초식의 맥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청성파의 무공을 상대하는 강엽은 검법을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 초감각을 쓴 상태였다.
‘딱히 이런 녀석한테는 쓸 필요가 없지만 말이지.’
선강후가 알았다면 울화통을 터뜨렸겠지만 강엽은 선강후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명문 정파의 무공을 배운 만큼 동패급 낭인보단 강하다. 그러나 은패급은 아니다. 동천패와 은인패의 중간 어디쯤에 걸친 수준.
선강후를 통해 청성의 무공을 견식하길 원했지만, 애석하게도 선강후 본인이 청성 무공을 대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 뒤로 십초(十招) 가량 선강후의 검법을 지켜본 강엽은 견적을 냈다.
‘대충 알았다, 네 수준. 시시해서 싸우기 싫어졌다.’
더 이상을 볼 필요가 없다.
그렇게 판단한 강엽이 순간적으로 가속해서 꺾는 움직임을 보이자 선강후는 쫓아오지 못했다.
강엽이 사각을 파고든 것이다.
“어엇!?”
뒤를 잡혔다는 것은 알았을 땐 늦었다. 섬전처럼 후려친 손날이 뒷목을 강타한다.
빠악!
공격을 빠르게 가져가면서도 힘은 빼두었기 때문에 기절하는 것에 그쳤다. 만약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면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으리라.
“...!”
선강후는 비명도 못 지르고 나가떨어졌다.
* * *
“싱겁게 끝났네.”
조영옥이 아쉬워했다.
“하긴 구파라고 해도 속가제자 따위가 얼마나 강하겠어. 괜히 눈만 버렸네.”
선강후에 대한 평가는 신랄했다.
“쟤 본선에 보낸 거 누구야?”
“누님이요.”
“응?”
“초대장을 받고 온 사람들은 바로 본선부터 진출시켜라. 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
조영옥이 눈을 껌벅거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한 그녀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뭐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
“....”
배 다른 동생인 조영빈이 썩어문드러진 시선을 보냈지만 조영옥은 철면피를 두른 듯 굳건했다.
방금 전에야 선강후의 실력이 상상 이상으로 후달려서 눈이 썩는다고 평하긴 했지만, 초대한 유력자들을 우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연회에 모인 이들은 태화문과 음으로 양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건 심하네.’
예선부터 치렀다면 바로 떨어졌을 실력이었다.
선강후의 부친인 선이백도 자식이 일회전부터 탈락하자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그나마 강엽이 손대중을 둬서 다치지 않고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예선에서 올라온 게 스물네 명이랬지. 비무 끝나면 그들에게 접촉해 봐. 내가 직접 만나볼 테니까.”
“누님께서요?”
조영빈이 놀랐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본선에 진출한 참가자들은 모두 고수였다. 그들은 영입할 가치가 있겠지만....
“정확히는 내가 말하는 사람들만. 말하지 않은 사람들은 데려올 필요 없어.”
조영옥은 단순히 머릿수만 채우는 것보다는 알짜배기만 영입할 생각이었다. 설사 단 한 명만 건지더라도 그 한 명이 일당백, 일당천의 몫을 할 줄 안다면 비무대회를 개최한 보람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