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그런 이유는 아니야
(348/367)
347화. 그런 이유는 아니야
(348/367)
347화. 그런 이유는 아니야
2023.06.25.
라틸의 놀란 표정을 본 기르골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주기적으로 사기를 치고 다니네.”
“내가 무슨. 내가 언제? 내가 그대에게 사기를…… 쳤지. 한 번.”
“여러 번.”
“……여러 번.”
라틸이 마지못해 인정하자 이번에는 기르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괜찮아 아가씨. 난 그래서 아가씨가 좋아. 사기꾼 같아서.”
‘……돌려서 흉보는 거 같은데.’
라틸은 입술을 꾹 다물고 기르골을 쳐다보았으나, 그에게 항의하고 싶진 않았다.
기르골은 유리와 얼음의 단점과 장점을 합쳐서 극대화시킨 남자였다. 아주 연약하고 잘 녹았다. 정신머리가.
그러니 그를 대할 때는 갓 태어난 병아리를 다루듯 섬세해야 했다. 싸울 때는 절대로 섬세하게 다뤄선 안 되겠지만. 죽기 살기로 덤벼야겠지.
‘그런 일은 없길 바라자. 이놈이 연약한 건 정신머리뿐이고 몸은 아주 튼튼할 테니.’
“어쨌든 기르골. 이 얘긴 비밀로 해줘.”
“아가씨가 사기꾼인 거?”
“임신이 가짜인 거!”
* * *
그날 저녁.
라틸은 후궁들에게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말을 전한 다음, 심호흡을 하고 하렘으로 걸어갔다.
‘괜찮아.’
구두굽 소리를 들으며 라틸은 몇 번이나 저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지금은 가짜지만 어차피 앞으로 몇 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적으면 한 번. 많으면 좀 더 여러 번.
그때마다 후궁들 반응에 하나하나 가슴 졸일 수는 없었다. 마음은…… 안 좋긴 하겠지만.
‘으윽. 기르골한테 게스타가 많이 화났단 소리를 들어서 그래.’
게스타는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는 순둥이인데. 그런 게스타가 화나 있다면 다른 후궁들도 다 많이 서운해하고 있겠지?
‘그런데 카드는 대체 무슨 말이야?’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사이, 마침내 라틸은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안에는 후궁들이 상석을 비워두고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개중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대신관과 타시르 둘뿐이었고 나머지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물론 므라딤이 기르골을 엄청나게 노려보며 텔레파시 같은 걸 보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기르골의 태연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 텔레파시는 발신만 되고 수신은 안 되는 게 분명했다.
“다들 와 있네.”
라틸이 들어가며 중얼거리자, 그제야 후궁들은 대화하거나 눈치 싸움하던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틸이 상석에 앉자 다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라틸은 찬찬히 후궁들 반응을 살폈다.
라나문은 바로 옆자리에서 평소처럼 있고. 게스타는…… 아아. 죽을상이잖아. 바람이 불면 팽그르르 돌면서 날아갈 것 같다.
칼라인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고, 타시르도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었으나, 클라인은 분노한 아델리펭귄처럼 보였다.
그리고 대신관은…… 대신관도 의외로 멀쩡해 보였는데, 그는 오히려 이곳의 삭막한 분위기에 당황한 듯했다.
라틸은 마지막으로 므라딤이 기르골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보자, 흠흠 헛기침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소식을 들었겠지만. 그래도 짐이 직접 이야기해야 할 거 같아서 왔다. 짐에게 첫 번째 아이가 생겼어.”
말이 끝나자마자 대신관이 놀라서 휘청했고 므라딤은 “뭐요? 정말이오?” 하고 외쳤다.
‘아아. 둘은 몰랐나 보구나.’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기에 연애로 들어온 게 아니라 별생각이 없는 줄 알았더니. 그냥 정보 전달이 느렸나 보다.
므라딤은 보나 마나 물 안에 있어서 못 들은 거 같고. 아니면 들었는데 까먹었거나.
대신관은 왜 못 들은 걸까. 훈련한다고 어디 연무장에 틀어박혀 있었나?
‘그랬을지도. 말이 되네.’
라틸은 이번엔 힐긋 칼라인을 보았다. 칼라인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언제 그런 건지 그의 앞에 놓인 포크가 휘어져 있었다.
휘어진 포크의 끝이 라나문을 향하는 건 우연일까.
라틸은 다시 흠흠 헛기침을 하고서, 옆에 앉은 라나문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이 아빠는 라나문인 거 같다.”
클라인이 꽥 하고 발에 밟힌 소리를 냈다.
대신관은 여전히 놀랐는지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헷갈리는 모습.
라틸은 흠흠 세 번째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아직 초기라. 안정기가 지나기 전엔 공식 발표는 안 할 거다. 기밀까진 아니지만, 너희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적당히 말을 조심해 주었으면 해.”
“예, 폐하.”
후궁들은 모두 동시에 대답했으나 목소리들이 죄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서 식사하면 제대로 체하겠는데? 라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웃으며 스푼을 집었다.
“식사하지.”
* * *
여기서 더 먹으면 진짜 체할 거 같은데. 식사를 반 정도 마친 라틸은 더 먹었다가는 체하겠다 싶어서 결국 적당할 때 스푼을 내려놓았다.
비슷한 심경들이었는지, 다들 라틸을 곁눈질하며 스푼이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만 먹고 싶었는데 눈치를 보던 모양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다 라나문이 옆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라틸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평소보다 좀 덜 시린 눈으로 라틸을 보고 있었다.
“아. 응. 그냥 배가 좀 빨리 불러서.”
“계속 어지럽다 하셨으니까요. 체할 것 같으면 안 드시는 게 좋은 선택입니다.”
“그렇지?”
라틸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다가, 사방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이쪽을 빤히 쳐다보던 후궁들이 동시에 각자 다른 방향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딱 한 사람. 아델리펭귄처럼 눈을 뜬 클라인을 제외하고.
라틸은 라나문을 어디 감춰 두라던 기르골의 조언이 떠올랐다.
‘괜찮은가.’
* * *
밀로의 자리폴시 공주는 사절단 사이에 끼워 보낸 시녀 겸 성기사가 보낸 편지를 펼쳤다. 긴 편지가 아니었기에 내용은 단숨에 읽었다.
편지를 읽은 공주는 곧 종이를 접어 몇 번 찢은 다음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른 성기사는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잘 안 되었나 봅니다, 단장님.”
“그런가 봐. 약혼녀 신분으로 가긴 힘들다네.”
성기사는 쯧쯧 혀를 찼다.
“공주님 같은 분을 거절하다니. 강대국이라고 아주 고개가 뻣뻣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도 진짜 결혼할 마음은 없었잖아.”
“그건 그렇지요.”
“나도 하는 거 없이 놀고먹기만 하는 황자 따위엔 관심 없다.”
자리폴시 공주는 그리 상처받지 않은 듯 태연히 말하고서 지시했다.
“하지만 황궁 내에는 들어가야 해. 뱀파이어들이 황제 근처에 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다른 황족들과라도 혼담을 주선해 봐. 약혼녀 신분만 얻으면 된다.”
성기사는 놀라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리 자리폴시 공주가 이런 일에 관심이 없다지만, 그래도 거절당한 혼담을 같은 가문에 또 넣는 건 퍽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또 넣으라니.
“상관없다니까.”
하지만 막상 장본인인 자리폴시 공주는 태연하기만 했다.
“누구와 혼담을 진행해도 좋으니 일단 넣어. 내가 거기에 갈 명분만 만들어 주면 된다.”
“예, 단장님.”
* * *
라틸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후궁들이 다들 놀란 것 같으니 위로를 해 줄까 싶은데. 누구에게 가야 할지 바로 고르기 어려웠다.
기르골이 직접 만나 보고서 ‘엄청 화났다’고 알려준 게스타?
아델리펭귄처럼 눈이 희번덕거리는 클라인?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가엾어 보이는 대신관?
너무 무표정해서 오히려 신경 쓰이는 칼라인?
타시르나 므라딤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 보이지 않으니 우선 급하진 않은 거 같은데. 이 넷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이니 문제다.
“…….”
라틸은 짧은 고민 끝에, 일단 폭발 직전으로 보이는 클라인에게 가보기로 했다.
그나마 카리센에 다녀온 후 얌전하게 지내고 있긴 한데. 그래도 잘 지내다가 이 일로 폭발해버리면 곤란하니까.
“클라인.”
라틸이 일어나며 부르자, 클라인이 바로 다가왔다.
라틸은 한 손에 배를 얹고 라나문에게 ‘나중에 갈게’ 하는 눈짓을 보내고서 클라인에게 물었다.
“커피나 같이 마실까?”
* * *
클라인의 방 안에 들어가 소파에 앉자, 바로 바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와 내려놓고 나갔다.
라틸은 커피잔을 쥐고서 클라인에게 물었다.
“클라인. 많이 섭섭하느냐?”
클라인은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나온 대답은 순순했다.
“많이 섭섭한 건 아닙니다.”
대답과 달리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만을 다 내보낼 각오는 아닌 듯했다.
라틸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을 관리하면 표정도 같이 관리해야지. 말과 달리 볼이 평소보다 부어 있었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다 불만이겠지.
‘이거 참.’
라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참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찌르고 말았다.
클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폐하?”
라틸은 입술을 감추었다가, 씨익 웃었다.
“진짜 안 섭섭한 거 맞느냐? 표정은 이미 섭섭해서 대성통곡하고 있는데.”
“…….”
“솔직하게 말해보아라. 괜찮으니.”
“…….”
“정말로 괜찮으냐? 정말로 괜찮다면 둘째도 다른 후궁과-.”
“흐어어엉.”
진짜로 대성통곡을 하네.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클라인의 입술 양 끝이 아래로 내려가며 그가 우는 소리를 뱉자 라틸은 놀리는 걸 멈추었다.
클라인은 서러워 죽겠단 얼굴로 라틸을 보다가, 결국 항의하듯 털어놓았다.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저는 옷을 다 벗고 유혹해도, 저랑은, 제 몸에는 손끝 하나 안 대시면서, 어떻게 그 쪽제비와는, 흐어엉, 그 쪽제비는, 흐엉, 그놈은 쪽제빈데!”
“그렇게 싫어?”
“전 그 쪽제비가 싫습니다, 폐하. 전 그놈이 폐하랑 한 침대에 있는 것도 싫고, 그놈이 폐하 옆에서 웃는 것도 싫고, 폐하의 첫 아이가 그놈 아이인 것도 싫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더니 정말 너무나도 솔직하게 말하는구나.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야기에 라틸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애매해졌다.
클라인은 그 뒤로도 한동안 커피는 마시지 않고 라나문이 얼마나 싫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가, 라틸에게 물었다.
“폐하는 대체 제 어디가 마음에 안 드셔서 그놈만 품으시고 저는 가만히 두십니까? 그놈이랑 제 차이가 뭡니까? 얼굴도 제가 조금 더 낫고 몸도 제가 조금 더 낫고 머리도 제가 조금 더 나은데요!”
“누가 그런 편파적인 비교를…….”
“폐하!”
“하하. 미안. 농담이다.”
이 와중에 어떻게 그런 농담을 하냐는 듯, 클라인이 라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냥 후궁 전체에 가짜 임신이라고 알려줄 걸 그랬나. 라틸은 속으로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하지만 모두가 가짜 임신인 걸 알면 모두 다 반응이 미적지근할 건데, 그러면 다른 사람도 가짜 임신인 걸 알 수도 있잖아. 많은 사람이 알수록 비밀은 새어 나가기 쉽고.’
“폐하.”
그런 라틸을, 클라인이 재차 부르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폐하. 왜 저는 품지 않으시고 그 자식만 품어주시는 겁니까? 대체 차이가 무엇인데요?”
“음…….”
그런 게 있을 리가. 공평하게 아무도 안 품었는걸. 라틸은 대답이 궁색해졌다.
하지만 클라인은 반드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학구열 가득한 눈으로 라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씀해주세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