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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화. 사기꾼이네 (347/367)


346화. 사기꾼이네
2023.06.21.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넛이 누굴 좋아해? 애런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애런델이 서넛에게 관심이 있단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거기에 날 끼워 넣다니. 라틸은 황당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서넛은 따로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첫사랑이고, 지금은 유부녀인데도 아직까지 못 잊었다는…….


‘어라.’

라틸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곧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서넛의 마음을 채갈 만큼 매력적인 부인들은 넘쳤다.

라틸은 잠깐이라도 서넛의 짝사랑 상대가 자신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 게 부끄러워져서 괜히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서넛에게서 나올 대답은 ‘아닙니다’라는 걸 알면서도.


“아닙니다.”

딱 예상한 대로의 대답이 나오자, 라틸은 속으로 생각했다. 거봐. 서넛 경 짝사랑 상대는 따로 있다니까.


‘날 놀려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잖아. 만약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 후궁을 뽑기 전에 진즉 말했겠지. 아니면 후궁에 지원이라도 하거나. 후궁에 지원하긴 좀 아까운 경력인가. 하여튼.’

잠깐이라도 싱숭생숭해진 내가 더 이상해. 라틸은 툴툴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 듣지 말자. 실례잖아.’

  

* * *



“아니라고요?”

누군가 다녀갔다는 걸 모르는 애런델은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예, 아닙니다.”

서넛은 이번에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애런델은 고개를 기웃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서넛의 마음을 반쯤 확신이라도 하던 태도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겁니까?”

그 모습에, 서넛은 조금 불안해져서 물었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혹시 티가 났던 걸까.


“아니라면 아니지 그건 왜 묻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오해를 사면 곤란하니까요.”

“…….”

애런델은 서넛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별로. 행동으로 티가 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서넛 경은 별다른 이유 없이 모든 혼담을 거절하고 있죠. 외동이니 결혼하지 않으면 가문과 재산, 영지 같은 게 다른 이에게 넘어간단 걸 알면서도요. 그래서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해 본 거예요.”

“그럼 왜 상대를 폐하라고 생각한 겁니까?”

“서넛 경은 늘 폐하와 다니니까?”

“!”

서넛의 표정에 미약한 흔들림이 일어났다. 애런델은 그걸 눈치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에는 예리해지기 마련이니까.

애런델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진짜인가 보네요.”

“아닙니다.”

그녀는 서넛의 부정에 반박하지 않았다. 마음을 드러내는 것조차 폐가 될까 봐 감추고 있는 사람이다.

그 조심스러운 사랑에 대고 그녀가 뭐라 하겠는가. 포기할 수도 드러낼 수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있겠다는데.


“아픈 길이 될 거예요, 서넛 경.”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헛소리라고 생각해줘요.”

“!”

“그리고 보답 없는 사랑에 아파하다가 힘들고 지치거든, 헛소리하던 사람이 경과 같은 고통을 나누고 있단 걸 기억해줘요.”

“애런델 양. 나는…….”

“마음을 접으라곤 하지 마요. 그 방법. 경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나라고 어떻게 알겠어요.”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애런델은 힘없이 웃고서 돌아섰다.

그녀가 떠나간 뒤. 홀로 남은 서넛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하면 미안해졌다. 자신의 마음이 변할 리 없단 걸 알기에 더욱 미안해졌다.

하지만 미안하단 이유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 * *

싱숭생숭하단 말이지. 그런 대화를 들어서 그런가. 기르골에게 걸어가며, 라틸은 찝찝한 기분에 연신 인상을 썼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인 온실 앞에 도착한 라틸은 괜히 입구에 멈춰 서서 심호흡했다.


‘자. 괜찮아. 기르골은 의외로 별로 신경 안 쓸지도 몰라. 걘 날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어…… 물론 내 전생을 사랑하긴 한 거 같지만.’

하지만 환생하는 로드들을 계속 자신의 사랑이라 봤다면, 그가 로드들을 다 죽이진 않았을 거 같은데. 아닌가?


“후!”

역시 생각을 해도 짐작 가는 게 없어서, 라틸은 숨을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윽. 더워.’

안에 들어가자마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확 몰려와서 라틸은 인상부터 찡그렸다. 원래도 온실이니 후덥지근하긴 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너무 더웠다.

그리고…….


‘꽃이 좀. 너무 커진 거 같은데.’

라틸은 침실로 걸어가다가, 자신의 머리보다 더 큰 꽃들을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서서 올려다보았다. 뭐지. 왜 저렇게 크지.

꼭 당장이라도 입을 벌리고-.


“어, 제자님. 아직 훈련이 덜 됐으니 가까이 안 가는 게 좋아.”

“깜짝이야.”

라틸은 커다란 꽃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기르골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얼른 옆으로 물러나라 손짓하고 있었다.


“이, 이쪽으로?”

얼결에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물러서자마자, 내내 가만히 있던 꽃이 갑자기 입을 쩍 벌리더니 라틸이 서 있던 자리를 한 번 확 지나갔다.


“!”

라틸은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뭐야? 방금? 그거?”

“아직 훈련이 덜 끝났어.”

“아니, 훈, 훈련이 필요한 순간부터 꽃이 아닌데?”

라틸은 손으로 정상적으로 보이는 작은 꽃들을 가리켰다.


“꽃은 저런 거잖아. 가만히 있는 거!”

“아, 걔들도 쟤 새끼야 아가씨.”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그만 꽃들이 갑자기 우르르 움직이더니 라틸을 공격하려 한 거대한 꽃에게 달라붙었다.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온실이…… 괴물 소굴로 변하는 거 같은데.


“이런 걸 왜 가져다 둔 거야?!”

“온실 지하에 내 시종이 잠들어 있거든.”

“어…… 이 밑에 지하실이 있었던가.”

“만들었지. 일단 온실 안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말은 해뒀는데, 혹시 모르잖아. 누가 몰래 들어올지.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기를 지킬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꽃을 경비로 세우기로 했어.”

“이 꽃 사이즈부터 이미 자연스럽지가 않은데.”

“하지만 아가씨, 너무 작으면 먹이를 먹었을 때 먹은 형태가 드러나.”

방금 굉장히 섬뜩한 이야기를 들은 거 같은데. 라틸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기르골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말이 무슨 소리냐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들어야 할까.


“그보다 아가씨. 아가씨가 대적자랑 아기를 만들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혼란스럽던 라틸의 머리는 기르골의 말을 듣고서야 싹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 질문에 라틸의 머릿속에서 괴물 꽃에 대한 이야기가 싹 날아갔다.

라틸은 “어어.” 하고 대답을 질질 끌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들었어?”

벌써?


“어디서?”

“저 경비 꽃을 만들어 준 게 ‘개’스타거든. 다른 종류로도 가능한지 물어보러 갔다가 들었어.”

“그렇구나. 게스타가 만들었구나.”

‘그런데 왜 쟤가 게스타 이름을 발음할 때랑 내가 게스타 이름을 발음할 때 어감이 좀 다른 거 같지?’

라틸은 얼결에 괴물 꽃 새끼를 들어서 꽃잎을 건드리다가 물었다.


“저기. 게스타가 많이 서운해하고 있어? 지금?”

기르골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나라면 대적자를 어디에 보내 두겠어, 아가씨. 단 한 번도 ‘개’스타가 가보지 못한 곳에. 그곳까지는 그놈도 바로 찾아가지 못하거든.”

“그 정도로 화났어?”

“대적자랑 아가씨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내가 그놈의 카드를 압수해왔으니까.”

“카드라니?”

기르골은 설명해주는 대신 그저 웃기만 했다.

그 표정에는 의외로 화난 기색이 없어서, 라틸은 조금 안도했다. 다행히 기르골은 질투하는 것 같진 않았다.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라틸은 조심스레 물었다.


“넌 어때?”

“뭐가.”

“소감. 라나문이랑 내 사이에. 음. 아기.”

멀쩡해 보이잖아. 왜 물어본 거야? 멀쩡하게 반응할 때 그냥 농담하고 나갔어야지! 라틸은 말을 꺼내고서 속으로 비명을 뱉었다.

기르골은 뜻밖에도 더욱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조용히 웃었다. 질투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젠가도 잘 박혀 있는 듯하고.


“난 좋아, 아가씨.”

게다가 대답은 더욱 예상외였다.


“좋다고……?”

아니, 좋을 건 또 뭔데?


“난 아이들을 좋아해 아가씨. 우리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면 더 좋겠지만.”

“!”

“예전에 우리에게도 아이가 한 명 있었어. 정말 귀여웠거든. 혹시 아가씨가…… 아가씨는 전생 일부가 기억난다 했으니까. 거기까지 기억을 할 수 있다면…… 아가씨도 알 수 있을 거야. 정말로 귀여운 아이였어.”

그러다 기르골이 흘린 이야기에, 라틸은 충격을 받아 눈을 커다랗게 떴다. 기르골에게…… 아이가 있었다고?

게다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 아이의 모친 쪽은 라틸의 전생 중 하나인 듯했다. ‘우리에게도’라지 않은가.

그럼 도미스?


‘아니야. 도미스는 아닐 거야. 도미스는 기르골보다 칼라인을 좋아했으니까. 기르골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우정 쪽에 가까워 보였어.’

라틸은 기르골이 눈이 맛이 갔을 때 자신을 아리탈이라 부르던 걸 떠올렸다. 아리탈이 아이의 엄마일까?

잠시 먼 옛일을 떠올리듯 정신이 멍해졌던 기르골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다. 거기까진 기억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아가씨.”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에게 아이가 있었다고? 로드와 나이트 사이에? 그렇다면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그러나 라틸은 그 이야기를 물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물어서는 안 된단 걸 깨달았다.

기르골의 입가엔 슬픈 미소가 감돌아 있었지만, 눈빛은 빠르게 차가워지고 있었으니까. 슬픈 기억과 나쁜 기억이 얽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정신이 흔들거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라틸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럼 뱀파이어도 아이를 가질 수 있어?”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허공의 저 너머 막연한 곳을 바라보던 기르골의 초점이 또렷해지더니, 그가 곧 라틸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보통 뱀파이어는 안 될걸.”

‘그럼 나이트들은 된단 건가?’

“어쨌든 나도 지금은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제자님. 하지만 괜찮아. 지금 제자님이 가진 아이가 우리 아이라 생각하면 되거든.”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라나문 아이가 네 아이가 되는 건 아니야. 네 생각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그 말도 안 되는 기르골의 억지에 라틸은 당황했다.

그러나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르골은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는 라틸 곁으로 다가오더니 배 위에 손을 올리고서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과연 미쳤구나. 미친 기르골이 화를 내거나 질투하거나 할 거라 생각하다니. 내가 너무 기르골을 덜 미치게 판단했나 봐.’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차다가, 기르골이 갑자기 배에서 손을 떼면서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고 움찔했다.

손을 내린 기르골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우리 제자님. 또 사기치고 다니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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