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5화. 놀라지 않는 사람 1번 (346/367)


345화. 놀라지 않는 사람 1번
2023.06.18.



 
게스타는 아버지가 다짜고짜 꺼낸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난데없이 찾아와서는 그 애가 자신의 애라니? ‘그 애’가 대체 누군데?


“아버지……?”

“게스타, 그러니까 아버지는 말이야.”

“누구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응?”

로르드 재상은 목까지 분노로 벌게진 채 떠들어대다가, 게스타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아차 싶어 헛기침했다.

아트락시 공작 그놈과 싸워댄 직후라 오자마자 너무 흥분해 떠든 것이다.


“아버지……?”

게스타가 재차 부르자, 로르드 재상은 흠흠 헛기침을 하고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게스타. 놀라지 말고 듣거라. 실은…… 폐하께서 임신하셨단다.”

로르드 재상은 놀라지 말라 했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게스타는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눈이 커다래졌다.


“네?”

그 모습에 로르드 재상은 마음이 아파졌다.

착하고 성실하고 잘생긴 그의 아들을 두고, 모든 장점을 외모로 치환해 그 외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라나문 같은 게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 생각하니 피부가 다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폐하께선 그 아이가 라나문 아이라고 오해하신 듯해. 하지만 믿거라, 아들. 그 앤 네 애다. 아버지는 알아.”

아니, 아버지야말로 모르세요. 게스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와 한 번도 제대로 동침한 적이 없는데, 그 애가 자신의 아이일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다.


“폐하께서 라나문 님의 아이라 하면 라나문 님의 아이겠지요…….”

게스타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자 로르드 재상은 더욱 괴로워졌다.


“게스타. 염려하지 마라. 라나문 성격을 모르는 귀족이 있니? 그 앤 성격에 큰 하자가 있어. 육아는 얼굴로 하는 게 아니지. 그 애가 양육하는 걸 보면 폐하께서 애를 뺏어다 주실 거다.”

“하지만…….”

“클라인 황자도 라나문 못지 않게 성격이 별로지. 욱하는 성질머리 아니냐.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 성장한 대신관이 애를 기르겠니, 바다에서 지낸 인어가 애를 기르겠니?”

“…….”

“그뿐이냐. 평민에다가 이제 갓 후궁이 된 기, 뭐야. 그놈이 기르겠니? 상인이 기르겠니, 용병이 기르겠니? 라나문이 애를 못 기르면 당연히 그 애는 네 차지다.”

라틸이 아이를 자신에게 맡길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설령 자신에게 아이를 맡기더라도, 게스타는 속상한 마음이 가시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카드를…….”

“응?”

“죄송해요 아버지.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카드를 좀 만지고 싶어요.”

“아들, 너 도박하니?”

로르드 재상은 도끼눈을 뜨고 트리를 쳐다보았다.


“대신관이 딜러 해주면서 우리 애 도박 가르쳤느냐?”

멀쩡한 카드놀이를 도박 취급해버리는 로르드 재상의 태도에, 트리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로르드 재상이 왜 카드놀이를 도박이라 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신관이 게스타에게 뭘 가르쳐 준 적은 없으니까.


“아닙니다 재상님.”

“나쁜 물이 안 들게 잘 보호해라, 트리. 사방이 못된 것들이다.”

“예. 염려하지 마세요.”

콧김을 내뿜은 로르드 재상은 끙끙 앓으며 이마를 감쌌다. 어떻게 해야 그 빌어먹을 아트락시 부자를 꽉 밟아버릴 수 있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트리는 주춤주춤 문가로 뒷걸음질 쳤다.


“저기, 그, 시원한 거. 속을 진정시킬 만한 걸로 가져오겠습니다.”

 

* * *

어휴, 하필 라나문이 애 아버지라니. 트리는 뒤늦게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물론 클라인 황자가 애 아버지인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라나문이 애 아버지라고 해서 축하하는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푹푹 한숨을 내쉬며 걸어가던 트리는,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해 평화롭기만 한 정원을 둘러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너 시간 후쯤이면 여기도 난리가 나겠지.

그러다 트리의 시선이 후궁 타시르와 그 시종 히얼란에게 닿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둘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그저 즐거워 보였다.


‘우리만 이 나쁜 소식을 알고 있어선 안 되지!’

트리는 그 생각을 하자마자 얼른 그들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올렸다.


“타시르 님, 어디 산책 가시는지요?”

“아아, 그래.”

타시르는 웃으면서 히얼란의 어깨를 쳤다.


“네 친구 왔다 히얼란.”

그러고는 뭐가 재미있는지 혼자 낄낄 웃다가 물었다.


“너는? 우리 순둥이 도련님 심부름 가나?”

트리는 일부러 푹 한숨을 내쉬면서 속상한 척 말했다.


“예. 속을 진정시킬 냉수 가지러 갑니다.”

“속을 진정시키다니? 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냉수 마시고 진정할 사람이 아닌데. 타시르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트리에겐 이게 진실을 모르는 이가 낼 수 있는 마지막 태평한 소리로 들렸다.

그쪽도 곧 진정이 안 될 걸요. 트리는 속으로 빈정거리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 임신하셨거든요. 애 아버지는 라나문 님이랍니다. 후우…….”

트리는 말을 마치고서 힐긋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히얼란의 표정이 한 대 맞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타시르는…….


‘왜 멀쩡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 * *



“소단주님. 방금 들으셨어요? 저게 대체 무슨 말이래요?”

히얼란은 트리가 떠날 때까지 애써 침착하게 있다가, 좀 거리가 벌어졌다 싶자 다급하게 타시르의 팔을 흔들었다.

타시르는 태연히 대답했다.


“폐하께서 레안 황자 일로 급하셨나 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타시르는 설명을 해주려다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라나문 님 닮았으면 아기님 예쁘시겠네.”

“예? 그게 그렇게 쉽게 말씀이 나오십니까? 소단주님 닮아도 예뻤을 텐데요!”

히얼란은 꽥 소리쳤지만, 타시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안 웃을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임신하지 않았으니까. 임신할 리가 있나. 황제는 아예 누구와 동침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아. 하지만 클라인 황자님 날뛰는 건 재밌을지도.”

“예?”

“히얼란? 클라인 님께 가서 이 소식을 전해 드리고 와라. 요즘 인생이 지루하신 듯하니 즐겁게 해드리자.”

 

* * *



“뭐? 폐하께서 쪽제비 애를 임신하셨다고?!”

라나문을 ‘쪽제비’라 치환해서 부르는 클라인의 표현에, 히얼란은 ‘네’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니요, 라나문 님이요’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문맥상 ‘네’가 맞는 거 같은데. 그러면 꼭 같이 라나문을 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음. 폐하의 아이를 임신하셨지요.”

히얼란은 기지를 발휘해 적당히 생략해 둘러댄 다음, 얼른 인사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클라인은 잠시 멍하게 남아 있다가 기가 막혀서 외쳤다.


“이게 말이 돼? 그놈은 쪽제비라고!”

뒤에서 함께 임신 이야기를 전달받은 악시안과 바닐은 서로서로 눈치를 살폈다. 클라인은 헛웃음을 뱉으며 손부채질을 했다.


“이건…… 이건 진짜 말이 안 돼. 말이 될 수가 없어!”

악시안은 덤덤하게 말했다.


“말이 안 되긴요. 딱 결론이 나온 거지요. 겉은 몰라도 내실은 라나문 님이 가장 좋으신 거죠.”

클라인이 “바닐!” 하고 외치자, 바닐이 악시안의 등짝을 후려쳤다.

악시안이 입을 다물자 클라인은 씩씩거리며 외쳤다.


“아니야! 그놈은 나보다 내실이 좋지 않아! 난 폐하와 동침한 적도 없다고! 누가 그놈 내실이 좋대?!”

악시안의 표정이 동정심에 젖었다. 동침한 적도 없다고?


“외실도 나쁘셨습니까…….”

“바닐!”

클라인이 재차 외치자, 바닐이 다시 악시안의 등짝을 후려쳤다.


“주둥이 좀 닥쳐요! 안 그래도 화나는데 왜 옆에서 늘 부채질이냐고요!”

클라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훌쩍였다.

바닐은 악시안을 내쫓고서 그 모습을 가엾다는 듯 바라보다 제안했다.


“전하. 속상하시겠지만 지금은 울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폐하께선 처음 임신하셨으니 이래저래 불안하실 거예요. 라나문 그놈이 애 아빠라고 폐하를 독차지하기 전에, 폐하 옆에 먼저 자리를 점령해야 한다고요.”

“어떻게?”

“임신 초기엔 어지럽고 속도 안 좋고 그렇답니다. 곁에서 전하가 폐하를 보살펴 주세요.”

“내가 아무리 잘해도 첫째가 라나문 그 자식 애면…….”

“무슨 소용이에요? 라나문 자식이면 얼굴만 예쁘지 머리는 텅텅 비었을 건데. 남아든 여아든 절대로 후계자가 되진 못할 겁니다. 게으르고 멍청할 테니까요!”

“그렇지?”

악시안이 문 너머에서 “황자님 아이라고 해서 그리 똑똑할 것 같지는” 까지 말하자, 바닐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좀 닥쳐요 악시안 경!”

클라인은 그 멀어지는 고함을 들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서 얼굴도장을 찍고…….


“내가 태교를 해야겠어. 아이에게 계속해서 내 얼굴이랑 목소리를 알려주는 거야. 그러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날 아빠로 알지도 몰라.”

 

* * *

로르드 재상이랑 아트락시 공작이 하렘에 달려갔다니 곧 게스타도 이야기를 들을 거고. 게스타가 들었으면 다른 후궁들도 차례차례 듣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녁 때쯤에 다 같이 모아 놓고 얘기해주자. 그리면 문제는…….’

라틸은 머릿속에 기르골을 떠올리고 끙 소리를 냈다. 얘는 정말로 반응이 짐작이 안 가서 뭘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가십지 사건 때 살짝 싸웠는데. 이후에 조금 풀렸으니 괜찮을 거라 봐야 하나. 아이 이야기를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생각해도 통 짐작 가는 바가 없으니, 뭘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먼저 가서 따로 얘기라도 해줄까? 아니면 그냥 저녁때 다 같이? 그런데 저녁때 다 같이 모였을 때 기르골이 폭발해 버리면 감당이 가능한가?

온갖 생각을 다 하다가, 라틸은 여전히 서넛이 보이지 않는단 걸 알아차렸다. 임신 소식을 알릴 때 이후로 계속 없었다.

다른 근위기사가 그를 대신해 곁에 붙었지만 계속 사라진 서넛이 신경 쓰여서, 결국 라틸은 기르골의 온실에 가는 길에 서넛을 찾아보기로 했다.

머리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린 덕에, 시종장은 오늘 하루 라틸이 절대로 일하지 못하게 막았다. 하루 여유가 생겼으니 서넛을 찾아볼 만했다.


“서넛 경이요? 아까 저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래?”

“예. 좀 심각한 표정이었어요.”

라틸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서넛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후원 어딘가에서 서넛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알아차렸다.


‘저기 있네.’

라틸은 그쪽으로 가려다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폐하께선 이미 아름다운 다른 후궁들을 수없이 많이 두셨잖아요, 서넛 경. 서넛 경까지 눈에 들어오실 리가 없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보아오셔서 폐하는 서넛 경이 남자로 보이지 않는 거예요. 서넛 경이 부족해서가 아니라요. 폐하를 위해 결혼을 미루는 건 서넛 경을 외동으로 둔 가문에도 못 할 짓이에요.”

라틸은 상대의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라틸의 시녀이자, 서넛에게 관심을 보이던 애런델의 목소리였다.

용기 가득한 그녀의 말에 서넛이 난감해하는 게 느껴졌다.

라틸은 이게 뭔가 싶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저 둘이 무슨 이야기지?


“서넛 경. 서넛 경은 폐하를 좋아하시는 게 맞지요? 그래서 혼담을 계속 거절하고 계시는 거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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