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51화.
이준이 광산 꼭대기에서 내려왔다.
“인근에 퍼진 기운이 게이트가 열리는 걸 방해하고 있어.”
“난 안 느껴지는데.”
“나도.”
박정연과 그리에스가 기감을 넓혀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신성력이라 그런가봐. 원인은 대충 알았으니까 빨리 움직이자.”
이준의 재촉에 한지유가 입을 열었다.
“강철의 돌은 회수 안 해?”
그녀의 말에 이준이 말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성검 안에 있는 힘을 빼려면 이걸 녹여야 가능하오.”
“오래 걸리나요?”
“꽤 시간이 걸리오.”
“급한데….”
지금 당장 움직여도 빠듯했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신성력을 없애는데도 시간이 꽤 소요될 터다.
“내가 여기에 있을게.”
그리에스가 이준에게 말했다.
“그냥 떠나자니 찝찝했는데 그게 좋겠어.”
강철의 힘을 놔두고 떠났다가 용신족이 가로챈다면 큰 일이었다.
“근데 넌 필요없는 거야?”
“원신의 돌 말이지?”
“응.”
“난 필요없어. 검은 군주가 깨어나면 다른 방법으로 힘을 갖출 거야.”
용신족이 원신의 돌을 먹으면 천계의 가주들과 맞먹는 힘을 가지게 된다.
굉장히 탐이 날 건데 그리에스는 욕심이 없었다.
빙룡족인 그녀만이 용신족과 다른 의견을 가졌으니.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겠지.
그래서 그녀를 믿을 수 있기도 했다.
“너도 다 생각이 있겠지. 테구르.”
“옙!”
“옆에서 드워프를 도와줘. 최대한 빠르게 작업할 수 있게 말이야.”
“염려마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요.”
“믿는다.”
테구르가 잠시 멍을 때렸다.
이준의 ‘믿는다’라는 말이 귀에 박혀서 떠나지 않았다.
의욕이 불타올랐다.
주인의 믿음에 보답해야한다는 사명감.
테구르의 전투력이 급격히 상승했다.
“맡아주십시오!”
녀석이 크게 소리치며 경례하자.
스케먼들도 따라 경례했다.
“빨리 갔다올게.”
이준이 박정연과 한지유를 데리고 떠났다.
드워프들이 아쉬워했다.
한지유의 검을 제련하고 싶었는데 이대로 떠난 것.
말파르 광산으로 다시 돌아올테지만.
지금 당장 검을 만져보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쩝!”
“왜 하필 지금 일이 터진 거야.”
“가지말라고 붙잡을 수도 없고 에잉 쯧.”
“돌아오면 꼭 시도해보자.”
드워프들이 입맛을 다셨다.
말론은 성검을 들어 대장간으로 향했다.
“길리 화로에 불을 붙여줘.”
“맡겨두라고.”
드워프 모두가 팔을 걷어붙였다.
성검에 깃든 철의 힘을 빼기 위한 작업.
성검을 녹이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 * *
이준은 말파르 광산과 제일 가까운 마을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리는 이준.
박정연과 한지유가 최선을 다해 따라 붙었지만 좀처럼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가다가 이내 멈춰섰다.
“게이트가 열리는 걸 방해한 힘이 신성력이라는 게 확실해졌어.”
말파르 광산 동쪽.
홀름 마을에 도착한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곳곳에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전에 만났던 레미엘과 비슷하게 생긴 석상.
날개를 펼친 채 오른쪽 팔을 앞으로 뻗은 모습이었다.
“석상이 대체 몇개야?”
“집집마다 하나씩 가진 것 같아요.”
“광장에 있는 석상 좀 봐. 멀리서도 보였던 게 저건가봐.”
“이준. 어떻게 할 거야?”
한지유의 물음에 이준이 석상을 가리켰다.
“부숴야지.”
레미엘을 믿었던 신도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
그리스 신전과 석상을 전부 파괴하자.
신이 분노했다.
그들은 신앙심을 먹고 자란다.
인간의 신앙심이 없으면 천계의 힘또한 줄어든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이번에도 석상과 신전을 파괴하면 주위에 퍼진 신성력이 줄어들지 않을까.
결론을 내리자 곧바로 팔을 휘둘렀다.
이준의 손짓에 홀름 마을에 세워진 석상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단 일수.
석상에 깃든 신성력도 그를 막진 못했다.
이른 새벽.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들리자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세, 세상에!”
“가브리엘 님의 석상이 무너졌어….”
“아악!”
“오오, 신이시어.”
“신께서 노여워하실 게야.”
“당장 무너진 범인을 잡아 화형에 쳐해야해!”
가브리엘의 석상이 무너진 걸 본 사람들이 광기에 휩싸였다.
검은 물감으로 물든 눈동자.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준 일행과 눈을 마주쳤다.
“저 년놈들이야!”
“범인을 잡아 처형하자!”
마을 사람들이 낫과 도끼를 쥔 채.
이준 일행을 향해 뛰었다.
“내가 처리할게.”
박정연이 벽운을 뽑아들려는데 이준이 제지시켰다.
“이런 건 지유가 더 잘해.”
한지유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복마참백연을 늘어트렸다.
빙검후의 무공은 항마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광인이나 마인을 제압하는데 탁월했다.
쾅!
복마참백연이 흐물거리더니 땅을 때렸다.
충격파에 의해 한기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졌다.
“으으.”
“추워.”
“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분명 밭일을 하고 있었는데….”
달려오던 마을 사람들이 낫과 도끼를 놔두고 손으로 몸을 감쌌다.
그들은 일반인.
마력을 지니지 않았다.
항마력이 깃든 한기가 마을 사람들을 훑고 지나가니.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던 그때.
마을 사람들 맨 뒤에 숨어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악마다! 저년놈들로 인해 균열이 생긴 것이다!”
남자의 외침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던 사람들이 다시 변했다.
그들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죽여라! 다신 악마들이 기어나오지 못하게 컥!”
남자가 마을 사람들을 선동했지만 한지유의 검에 복부가 뚫리고 말았다.
그녀가 복마참백연을 거뒀다.
내공이 깃든 검에 베였으니 죽을 터.
그녀는 남자를 무시했다.
복마참백연에 내공을 담아 바닥을 강타했다.
이성을 되찾은 사람들을 보자 검을 집어넣었다.
“아직 안 끝났어.”
이준의 목소리에 한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헛짓거리를 한 것 같아.”
“크크. 크아아악!”
죽어가던 남자가 발작하며 비명을 질렀다.
남자의 등에서 검은 날개가 튀어나왔다.
마른 몸은 어느새 근육질의 몸으로 변했다.
“천계 놈들이 마계보다 더 악독하네.”
괴물이 된 남자.
천계인도 인간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
꼭 카오스 몬스터와 같았다.
“어쩌지?”
한지유는 되도록이면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려 했다.
마력도 없는 인간.
저들은 각성자가 아니었다.
그저 광기에 휩싸였을 뿐인데 지금은 달랐다.
“아무래도 다 죽여야할 것 같아.”
이준의 목소리에 한지유가 검을 꽉 쥐었다.
전생 각성을 하면서부터 살인을 하는데 죄책감이 없었다.
아니, 죄책감이 덜한 느낌이랄까.
물론 일반인을 죽이는 건 달랐다.
오히려 전생 각성으로 인해 기준이 더 까다로워졌다.
전생에 빙검후.
무림인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건 흑도나 하는 양아치 짓이라 여겼다.
그녀가 복마참백연에 내공을 불어넣으려 할때.
이준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런 건 내가 할게.”
그의 눈이 번쩍였다.
선선한 바람이 홀름 마을을 훑고 지나갔다.
남자와 함께 괴물로 변한 마을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상태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푸확-
마을 전체에 피의 비가 내렸다.
사신기가 저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이다.
전멸.
공기 중에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쥐죽은 듯 조용해진 마을.
모두가 죽었는데 이준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래도 여전히 신성력이 남아 있네.”
이준이 파멸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흑염이 아닌 성화를 불태웠다.
주작과 불의 돌의 힘이 담겨 있었다.
원신 중 불이 모습을 드러내니.
무너졌던 석상이 조립되어 일어났다.
작은 크기의 석상부터 5M는 되어보이는 석상이 수백이었다.
가장 큰 석상이 이준을 향해 말했다.
“네놈이 불의 돌을 가지고 있었군.”
“필요하면 가져가.”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것이다. 넌 이미 신에게 불경을 저질렀다.”
“직접 응징을 해봐.”
“오만한 놈이로고.”
“시간없으니까 꺼져.”
이준이 파멸겁을 높이 치켜 들었다.
사신기가 파멸겁의 창날에 휘몰아쳤다.
회오리치는 기류가 정점에 이르자.
“흑룡벽.”
파멸겁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었다.
땅의 흙이 위로 올라오며 만들어진 용의 형상.
검은 용이 아가리를 벌리며 가브리엘의 석상을 집어삼켰다.
콰드득!
파열음과 함께 검은 용이 홀름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단 일격.
석성과 마을이 통째로 날아가는 건 일격만으로 충분했다.
대기에 퍼져 있는 신성력이 사라졌다.
금역의 문을 소환했지만 여전히 바로 닫혔다.
가브리엘에게로 향하는 신앙심이 사라져야만 금역이 열릴 것 같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 * *
“어둠의 신을 위하여!”
“저 이단을 잡아들이자!”
“어둠만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저항하지말고 순순히 잡히는 게 좋아.”
인근 어느 마을을 가도 똑같았다.
모두 가브리엘에게 사로잡힌 상태.
선동자를 죽이면 모두가 괴물로 변했다.
라드볼 마을.
도니미스 영지 등.
마을 세 곳을 들렸지만 똑같은 행태에 몰살을 시켜야만 했다.
“끝이 없겠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해요.”
빠른 경공으로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을 받드는 이들을 무너트리는 속도보다 포교하는 속도가 빨랐다.
무엇보다 교단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젠장.”
이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실수였다.
번개의 힘을 반쪽이나 가진 박혁진을 서울로 보내는 게 아니었다.
“준아….”
박정연이 이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대로 포기한다면 박혁진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준아. 금역을 열어줘. 내가 넘어가볼게.”
“미쳤어? 테구르가 했던 말 들었잖아.”
“여기서 포기할 순 없잖아.”
“그래도 안 돼. 누나나 지유가 넘어간다해도 결과는 똑같아. 천계의 신이 강림했으면 나 말고는 막지 못해.”
“나랑 혁진이가 힘을 합치면 못 막을 것도 없지.”
“그래도 안 돼.”
이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박정연이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기뻐했다.
그만큼 이준이 자신을 아낀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넌 해야할 일이 많아. 여기서 원신의 돌을 전부 회수하고 용신족하고 싸워야 해. 아니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위험하다며. 너 대신 내가 금역으로 가는 게 나아보여.”
“안 된다니까!”
이준이 버럭 소리쳤다.
누나한테 큰소리 친다며 주먹이 날아왔을 테지만 지금은 따뜻한 미소가 다였다.
“내가 꼭 금역으로 넘어가서 혁진이를 구할게.”
“…….”
이준이 박정연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꺾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얼굴.
이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이럴 거야?”
“누날 믿어.”
“잘못되면 나 어떻게 변할지 몰라.”
“그럼 내가 더 몸을 사려야겠다.”
박정연이 밝게 웃어주었다.
“정말 가야겠어?”
“응.”
“하아아.”
이준이 한숨을 쉬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
1분 1초가 아까웠다.
빨리 결정을 내릴수록 박혁진이 살 확률이 높아졌으니까.
“금역에 가면 메시지 바로 보내.”
“그럴게. 넌 말파르 광산으로 돌아가서 강철의 돌부터 얻어.”
“누나 걱정이나 해.”
박정연은 이준이 걱정할까봐 계속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열어줘.”
“준비해.”
그녀가 뇌신공을 운용했다.
“연다.”
“아, 잠깐만.”
“왜?”
“깜빡한 게 있어.”
“뭔데?”
그녀가 폴짝 뛰어 이준을 안았다.
그리고 한지유를 향해 말했다.
“나 없다고 준이한테 수작부리면 죽어.”
“제가 언니예요?”
“아니면 됐고. 네가 워낙 예뻐야 말이지.”
박정연이 한지유 보란 듯 이준의 볼에 뽀뽀까지 한 후.
배시시 웃었다.
“헤헤.”
“이번만 참는 거야. 금역 열 테니까 준비해.”
박정연이 뇌신공을 끌어올렸다.
“소환.”
이준이 금역을 열었다.
벌써부터 닫히려 했다.
파직-
뇌전이 튀면서 박정연의 신형이 포탈을 향해 쇄도했다.
0.1초라도 늦으면 큰일 나는 상황.
그녀의 몸이 포탈에 도달한 순간.
금역의 문과 함께 사라졌다.
정말 간발의 차이.
분명 박정연이 포탈로 들어가는걸 봤는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금역에 도착했는지 말이다.
조마조마하게 있는데 메시지가 날아왔다.
[휴. 무사히 도착. 갔다올게 지유랑 너무 친하게 붙어 있지마.]
“이 누나가 진짜.”
이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라도 잘못됐을까봐 걱정이었는데 잘 도착했다니 안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