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35화
이준 일행은 게이트를 열어 로에니아 황도로 왔다.
“균열이 없어졌어.”
박정연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마기가 가득했었다.
지금은 어떤가.
상쾌한 공기가 가득했다.
“테구르가 정화했나보네.”
이준은 금역의 게이트를 열었다.
“테구르.”
잠시후.
테구르가 부리나케 달려와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요, 주인님.”
“여기 언제 또 작업할 거야?”
“안 그래도 지금 작업 하려 했습니다요.”
“지금 말고 여긴 다음에 하고 다른 쪽 해.”
“왜 그러십니까요?”
“여기에 드래곤이 나타날 거야.”
“헤엑!?”
테구르가 눈을 부릅떴다.
드래곤이란 말에 잔뜩 쫀 얼굴이었다.
태생이 겁쟁이 몬스터.
블랙급 보스 몬스터가 됐지만 여전히 하찮았다.
“위험하니까 다른쪽 정화하는 게 좋겠다.”
“어디를 정화할깝쇼?”
“음….”
이준은 테구르가 펼친 지도를 유심히 보더니.
한곳을 찍었다.
“말파르 광산이 좋겠다.”
말파르 광산은 로에니아 제국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었다.
몬스터가 득실득실 거리는 곳.
이준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말파르 광산을 콕 찍은 것이다.
“여긴 강한 몬스터가 많은데…”
테구르가 살짝 눈치를 봤지만 소용없었다.
“블랙급 몬스터가 드래곤도 아닌 놈들도 못 이겨? 이거 실망인걸.”
“아, 아닙니다요.”
테구르가 손사래를 쳤다.
실망스럽다는 단어가 테구르의 귀에 꽂혔다.
녀석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하나.
바로 이준의 오른팔에서 떨어지는 거다.
권력에 오르는 건 쉽지만.
나락으로 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 사실을 알기에 테구르가 기겁을 한 것이다.
“바로 말파르 광산으로 출동하겠습니다요.”
테구르가 이준의 말도 듣지 않은 채 금역으로 들어갔다.
이준이 피식 웃었다.
“많이 쫄았나 보네.”
사실 말파르 광산은 철의 돌이 있는 곳.
적룡왕을 죽이고 다음 행선지로 생각해 둔 장소였다.
테구르를 통해 미리 작업을 해두면 좋을 것 같아 녀석을 부른 거다.
“노동법 위반으로 신고해야겠다.”
박혁진이 이준를 보며 말했다.
여전히 삐져 있는 녀석.
이준은 고개를 가로 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대응을 해야 얌전해질 녀석이었으니까.
“준아. 곧 해가 지겠어. 빨리 출발하자.”
박정연의 말이 옳았다.
곧 있으면 해가 떨어질 터.
밤에도 움직일 수 있긴 하지만 귀찮은 것들을 상대해야 했다.
“나무의 돌이 어디쯤에 있는 거야?”
“황도를 나가면 지혜의 숲이 있는데 그쪽에 나무의 돌이 잠들어 있어.”
이준의 대답에 그리에스가 놀라 되물었다.
“지혜의 숲이라고?”
“왜 이렇게 놀래?”
“거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야. 용신족이라도 예외는 아닌데.”
그란투스 대륙에서 살았던 그리에스는 수면의 숲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엘프의 안식처.
드래곤과 더불어 지혜의 종족인 엘프의 성지였다.
힘으로 깨부순다고 해서 지혜의 숲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계가 있는 게 아니었다.
자연이 스스로 엘프를 감싼 것.
드래곤이 브레스를 뿌려도 수장을 선택하지.
스스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이게 있으면 가능해.”
이준이 손을 활짝 폈다.
손 위에 물이 만들어졌다.
둥근 모양의 돌.
해미리트 영지에서 흡수한 물의 돌이었다.
“속성의 상관관계에서 물은 나무에 취약하지만 나무는 물이 꼭 필요하거든.”
“무슨 말이야.”
박혁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은 나무에 취약하고, 나무는 물이 필요하다니.
상충되는 말이었다.
“엘프가 스스로 문을 열어야하는 입장이야. 남아 있는 엘프라도 살리려면 이 물의 돌이 필요한 상태야. 적룡왕이 먼저 가서 깽판을 치고 있으면 더 고맙고.”
이준은 자기만 아는 사실을 말했다.
네이탈에게 뺏은 기억에 지혜의 숲이 있었다.
균열로 인해 엘프 종족도 옛날과 달랐다.
균열로 미쳐 죽은 엘프만 수천.
이제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 모든 게 지혜의 숲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였다.
지혜의 숲은 존재 자체만으로 자연 정화가 가능했다.
한데 이 정화 능력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
이유를 찾아보니.
지혜의 숲 중앙에 고인 물이 메말랐기 때문.
엘프가 물을 채워봤으나.
금세 메말라 버렸다.
지혜의 숲 중앙에 고여 있던 물의 정체는 바로 물의 돌의 힘이었으니까.
* * *
적룡족이 지혜의 숲을 불태우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나무.
숲 전체가 화마에 휩쓸렸다.
적룡왕은 팔짱을 낀 채 화마를 보고 있었다.
“이래도 안 나온다는 말이냐.”
메더 루블리스와 같은 머리색을 한 적룡왕 카르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지혜의 숲을 다 태우면 엘프들이 항복하고 밖으로 나올 줄 알았다.
한데!
엘프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만 계속 흐르고 있었다.
“군주.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할 것 같습니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태우는 걸로 부족하면 아예 땅을 갈아엎어라. 그러면 모습을 보이겠지.”
카르디의 말에 적룡족이 바람을 일으켰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자.
땅에 박힌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적룡왕 말대로 적룡족은 지혜의 숲을 갈아엎었다.
“이래도 버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무의 돌을 얻고 다음 원신의 돌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카르디 님이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엘프를 끄집어 내!”
적룡족은 최선을 다해 지혜의 숲을 망가트렸다.
나무와 흙이 허공에 난무했다.
이제는 숲이라 보기 민망할 정도로 폐허가 됐다.
“죄송합니다. 카르디 님. 엘프들을 수장시켰음에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군.”
엘프는 죽는 걸 선택했다.
나무의 돌이 대단하긴 하나.
엘프들이 이 정도로 원신의 돌을 지키려 할 줄 몰랐다.
“나무의 돌을 찾아라.”
엘프가 항복을 선언하면 녀석들을 이용하려 했지만 물거품이 되었다.
아쉬웠다.
엘프는 이용가치가 높았는데 말이다.
적룡족이 나무의 돌을 찾아 헤맸다.
“없는 것이냐?”
“엉망이 되서 찾는 게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카르디가 마력 감지 마법을 사용했다.
나무의 돌이 있다면 감지 마법에 잡힐 터.
주위를 둘러보며 나무의 돌을 느꼈다.
그런데.
“나무의 돌이 없어?”
적룡왕 카르디가 당황해 했다.
마력 감지 마법에 나무의 돌이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가.
마치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 같았다.
“당장 나무의 돌을 찾아라! 만약 찾지 못하면 너희들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적룡왕이 분노하며 적룡족을 닦달했다.
시간만 낭비하고 나무의 돌을 얻지 못한다면 이만큼 손해가 없었다.
적룡족도 다급해졌다.
적룡왕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향한다면 죽음뿐이었다.
지혜의 숲을 한참이나 뒤져보았으나.
“없… 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카르디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누가 하나 죽일 얼굴이었다.
한편.
이준 일행은 지혜의 숲과 떨어진 곳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야. 바쁘다며. 빨리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냐?”
“바쁘지. 바빠서 이러는 거야. 나도 야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준은 금역의 주인이었다.
게이트를 열어 로에니아 제국으로 넘어가 금역에서 자면 됐다.
가는데 3분 이내의 시간.
굳이 야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근데 왜 이러고 있어. 어서 움직여야지.”
“혁진아.”
“응.”
“모르면 가만히 있어.”
“아오 진짜 착한 내가 참는다.”
박혁진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어차피 개겨 봐야 질게 뻔했다.
정신 승리를 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와는 달리.
박정연과 한지유, 그리에스는 이준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물의 돌이 깃든 마력으로 간단한 요리를 했다.
완성된 밥과 된장찌개.
세 여자는 신기한 눈으로 이준을 보았다.
“준이 요리도 하구나.”
“뜻밖이야.”
“이 괴상한 음식은 뭐지?”
박정연과 한지유, 그리에스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비슷한 건 ‘네가 어떻게 요리를 해?’란 표정이었다.
“항상 외톨이었으니까 기숙사에서 요리해 먹었어.”
“누나 부르라니까!”
박정연이 버럭 소리쳤다.
그 모습에 이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은 아니잖아. 옛날에는 그랬다는 거지.”
박정연은 이준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밥을 먹었다.
그리곤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
“된장찌개가 맛있어 봤자지.”
박혁진이 못 믿겠다는 듯.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떠먹었는데.
“X발. 뭐야 백 선생이야?”
시중에 파는 된장찌개보다 훨씬 맛있었다.
감칠맛 나는 찌개와 따뜻한 밥.
비엔나소시지와 김치는 환상의 조합이었다.
“조용히 하고 먹기나 해. 곧 손님이 올 테니까.”
“손님? 누구?”
박혁진은 양볼 빵빵하게 밥을 집어넣었다.
맛이 기가 막힌지.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모두가 맛있게 밥을 먹고 있을 때.
이준 말대로 손님이 찾아왔다.
* * *
“대장로님. 밖은 위험해요.”
“이곳에 달빛 샘물의 기운이 여기에서 느껴지고 있어.”
한 소녀가 젊은 여자의 팔을 부축한 채 걷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를 짚으며 어두운 밤을 뚫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쪽에서 빛이 보였다.
“대장로님. 누군가가 있어요.”
“내가 찾던 자들이다. 저기에 달빛 샘물의 기운이 느껴져.”
두 사람의 발이 빨라졌다.
작았던 빛이 완전히 커졌을 때는.
“달빛 샘물의 기운이 사라졌어!”
다섯 명의 인간이 야영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캬아아! 준아. 더 줘.”
박혁진이 밥그릇을 내밀며 이준에게 말했다.
“없어. 네가 다 먹었잖아.”
“쩝.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는데… 다음에도 해 줄 거지?”
“꺼져.”
“친구끼리 왜 그러냐.”
“이번에는 손님을 부르려고 해 준 거야. 마침 손님이 오셨네.”
박혁진이 고개를 돌리자.
뾰족 귀를 가진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대장로 사티아가 정확히 이준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날 부른 건가요.”
“정체가 엘프라면 제가 부른 게 맞아요.”
“전 지혜의 숲의 대장로 사티아에요. 이 아이는 제 뒤를 이을 엘루르라고 해요. 엘루르, 인사드리거라.”
“엘…루르라고 합니다.”
엘프의 등장에 그리에스가 다시 한번 놀랐다.
“너는 대체….”
얼마나 능력이 뛰어난 건지.
지혜의 숲의 엘프를 너무도 쉽게 불렀다.
저 멀리서 적룡왕이 미쳐 날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지혜의 숲을 망가트렸으나.
엘프들이 나오지 않으니 화가 잔뜩 난 것이다.
그와 달리 이준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야영하며 식사를 했을 뿐이다.
한데 엘프 스스로가 모습을 보였다.
대단한 인간.
어떻게 엘프를 불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달빛 샘물의 기운이 어떻게 여기에서 느껴졌을까요?”
대장로 사티아는 이준을 보며 물었다.
이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다 먹은 그릇을 씻었다.
“이것 때문이겠죠.”
이준은 물의 기운을 소환해서 그릇을 깨끗하게 했다.
그 장면을 본 사티아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달빛 샘물! 당신이 어떻게 그 힘을…!?”
“지혜의 숲에 초대받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어떤 의도죠?”
“엘프에게 적의는 없어요. 전 나무의 돌을 얻어야 해서 대장로님의 신뢰가 필요해요.”
“당신이 말한 게 리프 크리스탈인가요?”
“네. 제게 리프 크리스탈을 주면 달빛 샘물이 넘쳐나게끔 해드리죠.”
이준의 제안에 사티아가 흔들렸다.
리프 크리스탈은 엘프의 보물.
대장로에게만 전해져 내려온 신기였다.
하나 달빛 샘물은 엘프 전체의 근간.
달빛 샘물이 있어야지만 지혜의 숲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불멸의 힘이 돌아온다.
달빛 샘물이 넘쳐나야 대륙에 퍼져 있는 엘프도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고민은 지혜의 숲으로 가서 하실까요? 여기에 오래 있으면 저 미친 드래곤이 날뛸 거거든요.”
“적룡을 아시나요?”
“저놈은 일반적인 드래곤이 아니에요. 용신족의 적룡왕이라는 군주에요.”
“적룡왕!”
“엘프가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 아시겠어요?”
사티아가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을 지혜의 숲으로 초대할게요.”
“대장로님! 이들의 정체가 뭔지 알고 지혜의 숲에 초대하시는 거예요.”
“적어도 적은 아닐 게야.”
달빛 샘물의 힘을 가졌다.
그 힘은 지극히 순수했다.
악한 마음을 지니면 절대 가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