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8화
이준의 눈이 퀭했다.
전날에 있었던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낙성각에서 나오자 김봉팔이 반갑게 맞이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주군.”
“못잤어.”
“흐흐. 잠못이룬 밤을 보내셨군요.”
김봉팔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는 이준이 별채에 있는 한지유와 그리에스 때문에 잠을 못잤다고 생각했다.
“죽을래?”
“헉!”
이준의 살기 어린 눈빛에 김봉팔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저, 전 일이 있어서 이만.”
눈치를 보던 김봉팔이 달아났다.
그 자리에는 삼두가 대신했다.
[네가 잠을 못 잤다니 별일이군.]
이준은 어디서나 잠을 잘 잤다.
머리만 대면 5분 이내로 자는 게 그였다.
고민이 있다 하더라도.
큰 전투가 있다 하더라도.
잠은 잘 잤다.
그런 이준이 밤을 샌 것이다.
“오랜만에 가부좌를 틀어 사신기를 운용해봤는데 이상한 장면이 떠올랐어. 혹시 알아?”
[어떤 장면 정확히 이야기 해봐라.]
이준은 삼두에게 어제 겪었던 일을 자세히 말했다.
삼두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유심히 들었다.
이준의 말이 끝나자 삼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예지몽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남자를 보니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
[전생 각성도 아니고 뭐지?]
이준은 전생 각성을 못 한다.
삼두가 알기로 이준의 전생은 없었다.
주경아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못한 채로 죽었으니까.
태아 상태의 기억이면 몰라도.
이준이 말한 장면은 전혀 달랐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니 염왕께 한 번 물어보지. 만약 네가 본 장면이 예지몽이면 큰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 물어봐봐. 답답해 죽겠다.”
[네 사부는 뭐라고 하지?]
“요즘 사부님은 자기 나타나고 싶을 때만 나타나셔.”
[한참 좋을 때지.]
마주이자 마왕이던 주경아가 신선제의 권한으로 죄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 신선계로 갔다.
불타던 복수심도 사라진 채 신선의 지위도 얻었다.
그녀의 정인이던 신선제로선 하루하루가 즐거울 터.
이준이 불러도 대답이 없을 만 했다.
“제자가 사부님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할 순 없잖아?”
[크크. 참된 제자군.]
“당연하지. 나 아니면 누가 괴팍한 사부님을 챙겨주겠어.”
이준이 자화자찬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이 퀭했는데.
지금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무극자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무튼 조금만 기다려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마.]
삼두가 지옥계의 포탈을 열어 사라졌다.
삼두에게서 시선을 거둔 이준이 발걸음을 옮겼다.
“애들은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자고있는 거야?”
이준은 한지유와 그리에스가 있는 접객당으로 향했다.
* * *
신선계 신선경.
호수 중에는 최상위 신선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은 신선들의 정기 회의가 있는 날.
설극은 연잎 위에 삐딱하게 앉아 신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로운 점창선이 설극의 눈치를 보며 보고를 이어갔다.
“지옥계에서 전해온 정보로는 사일검군 위지형의 기억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특급으로 분류된 전생인가?”
“그렇습니다.”
“네가 잘 관리해. 힘 좀 생겼다고 삐딱선 타지 말게. 알았어?”
“무, 물론입니다.”
“다음.”
설극의 옆에 있는 연아린이 대신 대답했다.
“모든 보고가 끝났습니다.”
“그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연아린을 향해 말했다.
“뒷정리는 네가 하거라.”
“그리고….”
“별일 아니면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별일입니다.”
설극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리고 연아린의 말을 기다렸다.
연아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천마선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천마선은 주경아의 호칭이었다.
“경아가!?”
쿠웅!
잔잔하던 신선경의 호수가 거세가 출렁였다.
설극의 동요.
주경아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크게 동요했다.
“아직도 마왕의 마기가 몸속에 남은 것인가? 내가 분명 내부를 확인했거늘.”
주경아의 내부에서 마왕의 마기를 찾았다.
하지만 마기는 보이지 않았다.
왕의 권한과 함께 그녀의 몸속에 있는 지옥의 기운도.
마왕의 기운도 사라졌다.
분명 그렇게 알고 있었건만.
“그게 아닙니다.”
“그럼 무어냐.”
“천마선께서 지옥계로 간 모양입니다.”
“지옥계에는 왜?”
“저도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무슨 볼일이 있길래 경아가 지옥계로 간단 말인지. 나도 지옥계로 가봐야겠다.”
설극은 연아린이 말릴 새도 없이 지옥계로 갔다.
지잉-
포탈에서 나온 설극이 경공을 펼쳐 염라대왕이 있는 염라전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항상 열려 있던 염라전이 닫혀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은 설극이 염라전을 벌컥 열었다.
“염라대왕!”
설극의 커다란 목소리가 염라전을 울렸다.
그 안에는 염라대왕과 주경아가 있었다.
“경… 아?”
설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경아가 평소의 눈동자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왕의 기도, 지옥의 기운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기를 띠고 있었다.
설극의 태도에 염라대왕이 주경아를 향해 말했다.
“네놈이 달려올 줄 알았다. 내 뭐라고 했더냐. 네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면 저놈이 발광을 했을 터다.”
“전 아린이에게 지옥계로 간다고 말하고 왔어요.”
“설명이라도 해주고 왔어야지. 이러면 나 또한 곤란하다.”
“경아. 지옥계는 무슨 일로 왔어?”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지.”
“당신도 모를 것 같아서요.”
“무슨 소리! 내가 모르는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오만한 말이었다.
신선제인 설극만이 가능한 말.
광오한 어투에 주경아가 그를 무시했다.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지금 준이에게 일어나려는 현상은 어떻게 된 거죠?”
염라대왕이 주경아와 설극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한 권의 서책을 꺼내 주경아에게 던졌다.
“봐보거라.”
그녀가 책을 받았다.
“전생서?”
그리고 책을 폈다.
-고려-
[파천혈신의 태어나지 못한 아들 설진.]
-그란투스 대륙-
[암흑대공]
위의 내공은 그녀도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쓰인 글자는 모르는 내용이다.
“어떻게 된 거죠?”
주경아가 염라대왕을 보았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이었다.
“너희 아들에게 전생이 하나 더 있다.”
“처음 환생한 게 아니라 이 말씀이시죠?”
“그렇다.”
그 말을 들은 설극이 주경아의 손에 든 책을 뺏어서 읽었다.
“그란투스 대륙 암흑대공?”
설극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처음 안 사실에 당황했다.
전생이 하나 더 있다니.
그것도 이명이 암흑대공이다.
이명에 검은색은 안 좋은 뜻.
십중팔구 평탄하게 살지 못했다는 뜻이다.
“현 세상에 이준이 필요하듯. 그란투스 대륙에도 이준이 필요했다.”
“왜 하필 제 아들인가요?”
“너희들의 업이라면 믿겠느냐.”
“저희들의 잘못이 준이에게 갔다는 말인가요?”
“몇 가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현재 준이에게 일어나는 상황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중이다.”
“4차 각성이라면 말씀이네요.”
“그렇다.”
주경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는 표현이었다.
“암흑대공으로 살았던 삶은 어땠나요?”
그녀의 물음에 염라대왕이 고개를 저었다.
“대충이라도 좋아요. 알려주세요.”
“현대에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고, 그란투스 대륙으로 넘어갔을 때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많이 아파했을까요?”
“너희들의 아들이다. 아파하긴 했지만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했다.”
“행복은요?”
“지금처럼 좋은 이들을 만났고 평생 옆에 있어 줄 정인도 있었다.”
“다행이에요.”
“내게 안 따지는 것이냐. 난 이준을 이용해 그란투스 대륙을 안정시키려 했다.”
“어르신께서도 알고 계셨나요?”
“….”
“그분이 소멸하면서도 함구하셨다는 건 대왕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말한 사람은 천극자였다.
전대 신선제이자 설극의 사부.
소멸하면서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걸 보면 염라대왕을 탓할 생각이 없다는 뜻.
그녀가 이준의 부모라 할지라도 염라대왕을 탓할 순 없었다.
그는 이준을 환생시켜준 장본인이었으니까.
제아무리 설극이 신계를 깽판친다하더라도.
염라대왕이 이준을 환생시켜주지 않으면 끝.
지금의 이준도 없었다.
어찌 보면 크나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
“궁금증을 해소 시켜주셔서 감사해요.”
주경아가 고개를 숙였다.
신선계에서 신선이 됐더니.
예의 또한 제대로 갖춘 듯했다.
“가볼게요.”
“이제 찾아오지 말거라.”
주경아의 입꼬리가 살짝 말아올려졌다.
“가가, 가요.”
“난 할 말이 남았…”
“제가 다 들었어요.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으니 신선계로 돌아가요.”
“아, 알았어.”
그녀의 말에 설극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함께 지옥계를 떠났다.
그들의 모습에 염라대왕이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저놈이 신계를 공포에 떨게 한 그 파천혈신이 맞나 싶구나.”
* * *
한지유는 이른 아침부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쩍-
그녀의 검이 공기를 벨 때마다 주변이 얼어붙었다.
신기한 건 그녀가 검을 회수할 때면 얼어붙었던 주변이 녹아내렸다.
한기를 완벽히 조절하고 있다는 뜻.
완급조절이 신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였다.
이준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검무를 추고 있었다.
“아름답네.”
한지유가 추는 검무를 보고 말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말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한번만이라도 같이 검무를 춰봤으면….”
“저렇게 아름답고 치명적인 검무는 처음입니다.”
접객당을 감시하던 사신가의 각성자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래라면 남의 훈련을 지켜보는 건 금기였다.
하지만 한지유는 개의치 않고 훈련했다.
그녀가 익힌 무공은 절세의 신공.
수천, 수만 번을 본다고 해서 도둑질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나… 지유 님으로 갈아탈래.”
“저도요….”
“이제 다신 안 바꿀래요.”
“이하동문이다.”
접객당에 있는 모두가 한지유의 검무에 빠져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검무는 끝을 달렸다.
이내 크게 숨을 내뱉곤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러자.
“와아아아!”
“휘이익!
함성이 쏟아졌다.
“아름다웠습니다!”
“지유 님 사랑해요!”
“탈덕한 제가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세요.”
가득한 칭찬에도 한지유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저 고개만 살짝 숙여 고마움을 표시할 뿐.
별다른 반응은 안 했다.
대신 이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에 그가 말했다.
“좀 하네?”
이준의 칭찬에 한지유의 입술이 살짝 실룩였다.
“배고파.”
민트 초콜릿 우유를 꺼내 마셨다.
칭찬을 받아 기운이 좋다는 표현이었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그리에스는?”
“나 여기에 있어.”
그리에스가 방문을 열었다.
사신가는 거의 대부분이 한옥집.
방문만 열면 바로 바깥이 보였다.
그리에스는 몸을 이불에 돌돌 말고 있었다.
“밥 먹자.”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방이 너무 따뜻해.”
“너 빙룡족 아니냐? 그러다 녹는다.”
“이렇게 좋은 곳은 처음이야.”
그리에스는 여전히 이불 안에 있었다.
이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때였다.
퍽-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이준의 발아래에 박혔다.
“누구냐!”
“침입자다! 가주님을 지켜라.”
접객당을 감시하던 청룡단이 무기를 빼 들었다.
허리를 숙여 단검을 줍는 이준.
단검에 묶여 있는 종이를 풀어 읽었다.
[철룡의 그림자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만날 의향이 있으면 저녁 9시. 명동 대성당으로 오십시오.]
“공간 전이 마법을 사용하는 각성자라… 재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