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4화
이준은 벨렌 로렌스를 만나기 위해 각사학으로 왔다.
그의 뒤에는 그리에스가 딱 붙어 있었다.
“안 도망가니가 좀 떨어져.”
“난 신경쓰지마.”
“내가 신경쓰여서 그래.”
“왜?”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게 안 보여?”
그리에스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주위는 남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여학생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남학생.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와….”
“저게 말이 되나….”
“누, 누구지?”
“저런 얼굴이면 굉장히 유명할 텐데.”
“누구 아는 사람 없어?”
“세계 각성자 명단에도 안 나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지금은 눈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남학생들은 그리에스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한 표정.
심한 남학생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렸잖아.”
“난 괜찮아. 익숙해.”
그리에스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많이 겪어본 상황인 듯 보였다.
“내가 안 괜찮아. 동물원의 동물이 된 느낌이야.”
“쫒아내줘?”
그녀가 푸른 안광을 번쩍였다.
안 좋은 예감.
쫓아내라고 말하면 드래곤의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았다.
“후우. 됐다. 그냥 가자.”
이준이 한숨을 쉬고 가던 길을 갔다.
그녀도 이준의 뒤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그 사이.
대부분 남학생이던 주변이 어느새 여학생으로 바글바글했다.
“꺄아아악!”
“파천제니이임!”
“어떡해. 이준 님이 학교에 나오셨어.”
“말이라도 걸어볼까?”
“응응. 걸어봐. 혹시 알아? 이준 님이 네 이름을 기억해줄지?”
이준을 보기 위해 훈련도 팽개친 그들.
폰으로 그의 모습을 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때 한 여학생이 용기를 내어 이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준 님.”
이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여학생을 응시했다.
[큭큭. 곧 등장하겠군.]
삼두가 음흉하게 웃었다.
“전 카미키 가문의 장녀 카미키 미오라고 해요.”
“그런데?”
이준이 지그시 보며 짧게 대답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음성.
그와 안 친한 사람은 너무 쌀쌀맞다고 생각할 목소리였다.
이준 앞에 자신 있게 나온 카미키 미오란 여학생도 몸이 굳었다.
조각같은 외모와는 별개로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왜 다음 말이 없어?”
[너 같으면 목소리가 나오겠냐. 눈빛봐라. 살벌에서 어디 말이라도 제대로 걸겠어?]
‘내가 뭘 어쨌다고.’
이준은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현재는 꽤 많은 감정을 되찾은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고쳐지는 게 있었다.
차가운 표정.
옛날 짓궂은 장난을 쳤던 때로는 잘 돌아오지 않았다.
사신기의 영향.
마기가 이미지를 차갑게 만들었다.
[왔다. 큭큭.]
이준이 영문을 모르게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공간이 번쩍이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
손에 검집을 들고 있는 모습은 남자들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정연 누나 오랜만이야.”
“이준 너….”
박정연이 이준을 흘겨봤다.
그리고는 카미키 미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 학년?”
“이, 일학년입니다.”
카미키 미오는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말했다.
박정연의 강의는 지옥 수준.
학생들을 피말리게 하는 수업으로 유명했다.
학교 전체에 소문난 박정연의 강의.
신입생의 기피 수업 1순위이기도 했다.
“수련은 안하고 지금 여기서 뭐를 하고 있었을까?”
박정연의 말에 학생들이 뜨끔해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다음 말을 이어서 했다.
“넌 얘가 누군지 알아?”
“파천제 이준 님…입니다.”
“틀렸어.”
“네?”
카미키 미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쟤 내 거니까 그 예쁜 눈으로 보지 말라고.”
[크하하하. 내가 이걸 보기 위해 여태껏 수모를 견뎌왔다.]
삼두가 고개를 올려 위를 보았다.
이준이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은 멘트가 굉장히 강했다.
그도 당황할 정도였다.
“알아 들었으면 가서 훈련해.”
“예….”
카미키 미오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를 떠났다.
박정연의 기세에 대부분의 여학생들도 흩어졌다.
물론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여학생들이 대부분 사라지자.
박정연이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내가 학교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지.”
“푸른 등불 꽃 때문에 벨렌만 잠깐 만나고 가려고 했어.”
“네가 오면 항상 이 사단이 나잖아.”
“조용히 왔다 가려고 했지.”
“조용히 왔다 가려는 사람이 저렇게 예쁜 여자를 데리고 다녀?”
그녀가 이준의 뒤에 있는 그리에스를 가리켰다.
“같이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얘가 무작정 따라왔어.”
“누군데?”
이준이 그리에스를 소개하려는 순간.
그리에스가 박정연의 앞으로 나와 자기 소개를 했다.
“만나서 반가워. 난 그리에스 에스터라고 해.”
많아봐야 고등학교 3학년 나이로 보이는 그리에스가 반말로 말하자.
박정연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바로 여자들의 기 싸움이라는 것이다.]
[헉, 서로 싸우려는 거야? 그럼 큰 일인데.]
[넌 아직 배워야할 게 산더미군. 여자들의 기싸움은 말이다…]
삼두가 파랑에게 인계의 여자들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파랑이는 삼두의 말에 귀를 바짝 세웠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아, 이제야 알겠어.]
[넌 절대 이준처럼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안된다. 그러면 저렇게 돼.]
[응. 명심할게.]
이준은 삼두와 파랑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공기 중에 무언가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뭔가 일촉즉발의 상황이랄까.
무기만 안 들었지.
서로 수십 번은 부딪힌 것 같았다.
두 여자가 눈싸움하고 있는 사이.
벨렌 로레스가 나타났다.
“이준. 여기에 있었어?”
* * *
이준과 박정연, 그리에스는 벨렌의 교수실로 왔다.
박정연과 그리에스는 여전히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애지? 지유랑 지안이보다 예쁘잖아?’
박정연도 인정하는 한지유와 이지안이었다.
하지만 얼굴과 몸매에선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한데 강적이 등장한 것.
어디하나 빠진 구석이 없었다.
단점을 찾아보려 했지만.
‘몸매는 졌다….’
그녀는 그리에스의 몸을 훑어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볼륨에는 자신있다고 생각한 그녀였으나.
역시 외국은 이길 수 없었다.
한편 그리에스 또한 박정연을 인정했다.
‘이준이 쩔쩔매는 이유가 있었어. 남자를 잡아끄는 매력이 있구나….’
그리에스는 용계에서 인계를 수시로 내려다 보았다.
이준이 어려워하는 인간 중 한 명.
그녀를 끔찍이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휴 살았어. 벨렌.”
“싸울 때는 앞뒤 안 가리면서 이럴 때는 왜 이렇게 답답하게 행동해?”
“내가?”
“응.”
이준은 모태솔로였다.
회귀 전에는 외톨이로 죽었다.
회귀 후에는 여자가 많이 꼬이긴 했으나.
여자를 사귄 경험이 있어야 시작을 하든지 하지.
모든 면이 서툴렀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잘생긴 얼굴에 큰 키.
강한 무공도 가지고 있으니.
여자를 사귄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답답해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벨렌 로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됐고. 이 여자가 하이 드래곤이란 말이지?”
“빙룡족이야. 네 칼바스는 흑룡족 계열이야.”
벨렌 로레스와 계약한 칼바스는 블랙 드래곤.
녀석이 죽으면 하이 드래곤이 되는 것이다.
물론 칼바스가 완전한 성체가 된 후, 죽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우우.”
칼바스가 그리에스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날개를 파닥인 채 벨렌 로레스의 뒤에 숨었다.
드래곤은 자기보다 강한 드래곤에게는 꼬리를 마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그리에스는 하이 드래곤.
드래곤의 신인, 용신족이었다.
칼바스가 잔뜩 겁을 집어먹는 건 당연했다.
“네 말대로라면 또 다른 위기가 세계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건데….”
이준은 그리에스에 대해서 모두에게 말했다.
어떻게 만났는지.
그녀가 왜 자신을 따라다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에스는 용신족이 인계로 못 내려온다고 말했지만 좀 꺼림직해.”
“정말 마력이 없어진 거야?”
“보시다시피 파르가의 마력은 사라졌어.”
이준은 마력이 아닌 내기를 보였다.
회색의 기운이 그의 손에서 맴돌았다.
“내공으로 안 돼?”
“될리가 없어. 만약 됐다면 이미 다른 4대 신계에의해 사라졌을 거야.”
신계는 오직 네곳만이 인정을 했다.
신선계와 지옥계, 천계와 마계.
이외의 계층은 모두 하위 층계로 분류 했다.
다른 층계가 신들이 사는 곳이라 떠벌리고 다닌다면 곧장 4대 신계가 나서 없애버렸다.
신을 사칭한 죄.
신계에서 가장 큰 죄였다.
“난감하네.”
“좀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또 다시 전쟁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용신족이 인계에 모습을 드러내면 큰 피해를 입지 않을까 싶다.
마계의 악마들보다는 못하지만 용신족 또한 강할 터다.
무엇보다 용신족은 하늘을 난다.
아무리 각성자라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하늘을 날진 못한다.
용신족에게는 큰 이점이었다.
“벨렌 너희 나라도 대비는 해놔.”
“그래야겠어.”
“나도 오랜만에 가주 회의를 나가야겠네. 아, 그리고 푸른 등불의 꽃 트리플 에스 등급까지 만들었어.”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아티팩트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거야?”
“내 밑에 자연을 다루는 유능한 몬스터가 있거든.”
이준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 *
그 무렵.
그리스의 한 신전.
예배를 드리고 있던 대신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신께서 신탁을 내리셨다.”
“오오!”
“드디어.”
사제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들은 레미엘을 모시는 사도들이었다.
신탁은 그들에게 절대적.
신의 말씀이 내려오길 간절히 기다렸다.
모두가 대신관만 보았다.
그가 어떤 신탁을 전할까 잔뜩 기대했다.
“빙룡족의 흔적이 한국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빙룡족이라는 말에 사제들이 아쉬운 표정을 드러냈다.
“아….”
“하필 빙룡족이라니.”
“철룡족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레미엘 신의 가호는 강철.
얼음과는 상관이 없었다.
빙룡족은 라파엘 쪽이 좋아할만한 속성.
그들이 실망한 이유였다.
그들의 표정을 읽었는지.
대신관이 사제들을 다독였다.
“빙룡족으로 보이는 여자만 데려온다면 더 강한 강철의 가호를 내려준다고 하시니. 모두 임무에 최선을 하다라.”
“예, 대신관님.”
사제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래도 신탁이었다.
아쉽긴 하나 오랜만에 내려온 신의 말씀.
자신들에게 이득이 안 된다더라도 신탁은 지켜져야 했다.
“안테로만 남고 모두 자리로 돌아가도록.”
대신관의 사제들이 흩어졌다.
안테로란 남자가 대신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안테로. 철의 어쌔신이여.”
“말씀하십시오. 대신관님.”
“네가 나서줘야겠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왜 반문하지 않는 것이냐.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무섭지 않은가? 파천제와 마주칠 수도 있다.”
파천제.
세계의 영웅이었다.
세계 랭킹 1위의 각성자이기도 했다.
신탁의 목표는 한국.
어쩌면 파천제와 싸워야할지 몰랐다.
“제 목숨을 바쳐서 빙룡족의 여자를 데려올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안테로의 말에 대신관이 흐뭇했다.
대답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사제로서 참된 마음가짐이로다. 네게 레미엘님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안테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전을 나갔다.
신의 석상 앞에 혼자 남은 대신관.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