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7화
“이제야 인과율이 원래대로 돌아왔군.”
염라대왕의 중얼거림이었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신계의 시간으로는 억겁.
그의 입장에서는 인과율이 정상으로 돌아올까 싶었다.
“경아, 이제 끝났어.”
설극의 말에도 주경아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떨리는 눈동자로 이준을 볼 뿐이었다.
설극은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으나 포기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터.
괜히 방해했다가는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그때였다.
염라전에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쳤다.
“헉!”
아지랑이가 사라지고 나타난 한 사람.
카오스 몬스터에게 사지가 찢겨 죽은 백무생이었다.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죽어서 지옥계로 온 것이다.
“여, 여긴!?”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염라대왕이 사악한 미소를 짓는 사이.
하나의 그림자가 백무생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백무생!”
쾅-
백무생이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예상하고 미리 결계를 펼쳤지.”
염라대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백무생을 공격한 자는 주경아였다.
그녀의 분노가 설극에게서 백무생으로 옮겨 갔다.
“경아, 여기선 참아!”
“말리지 마세요.”
설극이 천극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괜찮다. 염왕도 가만히 있지 않느냐. 백무생에게 분노를 다 토해내게 하거라.”
설극은 천극자의 말에 말리는 걸 그만뒀다.
백무생을 보자 가슴에 천불이 올라왔으나.
주경아보다 화가 날까.
자신의 복수는 뒤로 미뤘다.
무엇보다 염라대왕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하는 게 아닌가.
나서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대신 주경아가 백무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네가 내 옆에 있었단 걸 알았으면 너부터 죽였을 거야.”
그녀가 이를 뿌득 갈았다.
가장 죽이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끄윽… 누구냐!”
백무생이 머리를 흔들며 앞을 보았다.
어디론가 소환되자마자 받은 공격이었다.
감히 자신이 누구라고 공격한단 말인가.
눈에 초점을 맞추고 보자 여러 사람이 보였다.
“주, 경아?”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괴물이 눈에 들어왔다.
“서, 설극의 사부!?”
설극의 사부를 보니 이가 떨렸다.
조금 전에 봤던 공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설극의 사부가 이곳에 있다는 건.
설극도 있다는 소리.
백무생은 설극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을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 남자가 살기를 피워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서, 설극까지!”
이곳은 지옥계였다.
여기서 자신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린 거다.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칫.”
백무생이 다짜고짜 염라전의 문을 향해 뛰었다.
현재는 망자의 몸이라 경공을 펼치는 게 가능했다.
그는 한때 무림맹주였던 자.
무림에서 정점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입구에 다다랐는데.
“아, 안돼!”
뒤에서 잡아당기는 무형의 기운에 의해 다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설극이 손을 쓴 것.
허공섭물을 이용해 백무생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그 다음은 주경아의 차례.
그녀가 천마신공을 손에 두른 채 백무생의 몸을 두들겼다.
“커헉!”
복부를 시작으로 가슴, 어깨, 얼굴 등.
쉼 없이 두들겨 팼다.
“저거 네가 가르쳤느냐?”
염라대왕이 설극에게 물었다.
“적을 기절시키지 않고 패는 법을 가르쳐달라기에 알려줬소.”
“기가막히게 소화하는군.”
주경아는 강약을 조절하지 않고 오직 강만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무생은 기절하지 않았다.
고통을 온전히 느끼면서 맞아야 했다.
천마신공으로 연신 맞은 백무생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 그만!”
하지만 주경아는 그런 백무생을 가차없이 팼다.
주먹으로 때리면서 백무생의 혈도를 부수고 기혈을 모조리 잘라놨다.
악독한 수법.
그만큼 주경아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녀가 손을 멈췄을 때는.
“으으….”
백무생은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염라대왕을 향해 말했다.
“소멸을 시킬 건가요?”
“죄가 죄인지라 완전 소멸을 시킬 것이다.”
“그럼 지금 죽여도 되겠군요.”
주경아는 망설이지 않고 백무생의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퍼석-
목울대를 부숴버리곤 곧장 단전을 꿰뚫었다.
그녀의 손이 백무생의 복부를 관통했다.
인계에서도 이준에 의해 마력이 사라졌는데.
지옥에선 주경아로 인해 단전이 파괴됐다.
“널 더 고통 없이 못 죽이는 게 내 천추의 한이다.”
주경아가 백무생의 머리통을 단번에 깨버렸다.
백무생의 몸이 잿빛이 되어 흩어졌다.
복수가 허무하게 끝났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는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삶의 의지를 잃은 느낌이랄까.
복수하겠다는 일념이 사라지니.
마음이 허한 그녀였다.
* * *
그녀를 지켜보던 천극자가 설극을 불렀다.
“극아.”
“네 사부님.”
“마음을 돌리는 데 오래 걸릴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래. 너라면 끝까지 해낼 터. 믿어 의심치 않다.”
그가 설극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곤 염라대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염왕. 이제 마무리를 지으세.”
“가능하리라 보느냐.”
천극자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를 본 염라대왕이 직인인장을 소환했다.
계속 들고 있던 인장이 아닌, 특별 인장.
신계의 왕에 버금가는 자에게만 사용하는 인장이었다.
쿵.
염라대왕이 명부를 꺼내 특별 인장을 찍었다.
그러자 천극자의 발 밑에서 빛이 뿜어졌다.
“사부님?”
“극아. 행복하거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사부로 인해 깨진 인과율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없어져야지만 인과율이 정상으로 돌아오느니라.”
“염라대왕. 저 말이 사실이오?”
설극이 염라대왕을 보며 물었다.
“네 사부는 신선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순간부터 인과율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지옥의 입장에선 중범죄자지.”
염라대왕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게 무슨!”
설극이 천극자에게 손을 뻗었다.
천극자를 감싼 빛에 의해 설극의 손이 튕겨져 나갔다.
“극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거라. 이 사부도 이제 쉬고 싶구나.”
“이건 쉬는 게 아닙니다. 소멸이지 않습니까!”
“무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부에게는 안식이다.”
“어찌 제게 일언반구도하지 않고 가시려는 겁니까.”
설극의 눈동자에 슬픔이 맺혔다.
그에게 천극자는 사부이자 부모.
거렁뱅이인 그를 거둬준 은인이었다.
신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그의 위안이 지금 사라지려 한다.
“네가 이리 슬퍼할 것 아니냐.”
“무정하십니다.”
설극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인계와 신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파천혈신의 눈물이었다.
이에 천극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에게도 설극은 자식과도 같은 존재.
제자이자 자식이 우는데 누가 좋을까.
천극자는 설극을 다독였다.
“사부가 무로 돌아간들 뭐가 달라지겠느냐. 난 항상 네 옆에 존재할 것이니 그리 울지 말거라.”
“사부님….”
천극자의 말에도 설극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소멸하기 직전에도 자신을 생각하는 사부.
은혜가 하해와 같았다.
“아직 대장부가 되기에는 멀었어. 네 아들이 눈물 많은 게 널 닮아서 그런 게지.”
천극자도 설극과 똑같은 얼굴을 했다.
제자의 옆에 계속 있고 싶었으나 자신은 없어져야할 존재.
살아 있으면 또 다른 불행이 찾아올 것이다.
그랬기에 미련을 둬선 안 됐다.
천극자가 설극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경아를 불렀다.
“아가야.”
그는 주경아를 다른 호칭으로 불렀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처를 부를 때의 호칭이었다.
주경아가 고개를 돌렸다.
“….”
“극이의 섣부른 판단으로 인한 오해도 있으나 이 모든 건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극이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다오.”
천극자가 주경아에게 부탁했다.
고개를 숙이진 않았지만 정말 간절한 부탁이었다.
“….”
주경아의 눈동자는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든 상태였다.
증오 또한 옅어졌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천극자의 몸이 옅어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염라대왕을 바라보았다.
“염왕. 나중에 보세.”
“꺼져라. 네놈이랑 엮이면 재수가 없다.”
염라대왕이 다시 한번 특별 인장을 명부에 찍었다.
쿵.
“천극자 왕소. 인과율을 어겼으나 스스로 바로잡은 점을 높이 사 완전한 소멸이 아닌 일반 소멸을 명한다.”
빛이 천극자를 완전히 감쌌다.
그 속에 있던 천극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네놈 때문에 내 체면이 많이 구겨졌지만 나 또한 즐거웠다.”
완전 소멸과 일반 소멸은 완전히 달랐다.
완전 소멸은 인과율에서 아예 사라지는 것.
무로 돌아가는 거다.
하지만 일반 소멸은 천극자로 지냈던 기억과 육체를 없애는 것이다.
이 말은 즉.
“고맙네.”
염라대왕의 의지에 따라 환생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환생을 해도 절대 전생의 기억을 찾지 못하는 형벌.
많은 시간과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겠지만 완전한 소멸보다는 훨씬 좋았다.
지옥계의 왕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천극자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극아. 행복하거라.”
“사부님!”
천극자는 미소를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설극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까지 제자의 행복을 바라며 사라진 사부.
절망적일 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사람이 없어지니.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옆에 있던 주경아조차 느껴질 정도.
그녀가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일어나세요. 당신의 그런 모습을 어르신이 좋아하겠어요?”
냉정한 말투였다.
따뜻함이 전혀 없었으나 그를 걱정하는 게 언뜻 보였다.
염라대왕은 주경아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군.”
증오는 사라지고 분노도 많이 옅어졌다.
분노가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터.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했다.
“크흑….”
한참을 울던 설극이 몸을 일으켰다.
“…경아 말이 옳아. 사부님께서 안 좋아하실 거야….”
그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제 신선계로 돌아가는 것이냐.”
“그래야하지 않겠소?”
“그럼 주경아를 데리고 가거라.”
“정말이오?”
염라대왕은 귀찮은 듯 손을 휘저었다.
“너희는 내게 전부 골칫덩어리야. 눈 앞에서 안 보이는 게 편하다.”
왕의 권한을 사용해서 주경아의 죄는 면죄되었다.
구천옥에는 안 들어가겠지만 지옥의 벌은 계속 받아야 했다.
그동안 지었던 벌이 사라졌을 뿐.
환생하려면 죄업을 닦아야 했다.
그런데 그녀를 신선계로 데려가라한 염라대왕이었다.
“내 대신 네가 잘 감시해라. 신선직에 올려 선을 행해 죄를 닦게 해.”
“고맙소.”
설극이 염라대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에 염라대왕의 눈이 커졌다.
“네가 웬일이냐.”
“무엇을 말이오?”
“본왕에게 고개를 숙였지 않느냐.”
“나도 고마움은 아오.”
“허.”
염라대왕이 입을 벌렸다.
처음이었다.
파천혈신 설극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은 것이 말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여겼건만.
설극에게 인사를 받게 됐다.
염라대왕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설극은 주경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경아… 나와 함께 신선계로 가자.”
“….”
주경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설극이 가장 어려워하는 여자인지라.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답답한 침묵이 이어지고 설극은 점점 초조해했다.
그러던 그때 주경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라갈게요.”
“정말 잘 생각했어!”
“아직 당신을 용서한 게 아니에요. 지옥보다 선계에서 선업을 쌓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뿐이에요.”
“경아 뜻대로 해.”
설극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주경아의 화가 많이 풀린 느낌이었다.
구천옥에서 처음 봤을 때의 감정과는 많이 다른 상태.
자신이 노력하면 그녀가 용서해줄 것만 같았다.
“가자.”
설극이 주경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그의 활짝 펴진 손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앞장이나 서세요.”
“그, 그래.”
설극은 무안한 표정을 숨기고는 신선계로 향했다.
주경아는 그를 따라가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작게 숙였다.
염라대왕에게 고마움을 전한 것.
태어나지 못한 아들을 환생시켜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