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6화
패천기공 중 사공.
파천멸진.
기운으로 자신의 영역을 선포하는 무공으로 무극자가 구천옥에서 구주를 상대로 사용했다.
살주와 의주, 신주와 권주는 파천멸진으로 인해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파천멸기의 무서운 점은 사용자의 영역에 들면 능력이 반감된다는 거다.
1이던 숫자가 0.5로 줄어든다는 뜻.
사기적인 무공이었다.
뿐인가.
파천멸진에 한 번 들면 빠져나갈 수 없다.
사용자를 죽이면 가능했지만 제 의지로는 나가지 못했다.
쿠웅!
이준의 발 밑에서 회색의 기운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의 생각도 무용지물이 됐다.
마기는 무극기로 마력은 혼돈의 기운으로 막으려던 생각을 비웃듯.
무극기가 주경아의 쌍장을 막았다.
“네 멋대로 해봐라. 난 나대로 움직이지.”
무극기로 인해 남아도는 손.
이준은 곧바로 진천무를 사용했다.
쩌어억-
진각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발이 닿은 바닥이 갈라졌다.
“풍살.”
이준의 손에 가득 모인 기류가 터졌다.
바람은 칼날이 되어 온 사방을 난도질 했다.
주경아에게도 향하는 바람의 칼날.
그녀는 주먹으로 강하게 땅을 쳤다.
콰앙!
땅속의 돌이 공중으로 튀어나와 바람의 칼날을 막았다.
돌에는 그녀의 진기가 담겨 있어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주먹이 돌을 뚫고 나왔다.
주경아는 이준이 접근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퇴보를 밟아 이준의 주먹을 가볍게 피했다.
아니, 피하려 했으나.
그의 권경에 의해 얼굴에 상처가 나고 말았다.
“아쉬워. 조금만 왼쪽이었으면 머리통을 부술 수 있었는데.”
이준의 얼굴은 조금도 아쉬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주경아의 경지는 탈신경.
천살성의 힘을 받아들였다고 한들.
간단히 결판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주경아는 뒤로 물러나 얼굴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만졌다.
“빨간 피… 정말 오랜만에 봐.”
그녀는 구주로서 구천옥에서 오랫동안 군림했다.
그녀가 피를 본 건 구주에 오르기 전.
구주가 되고선 그녀에게 피를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구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그녀는 절대 강자로 있었다.
구천옥도, 마계의 관문도 아닌 인간계에서 피를 보게 된 것.
안 그래도 설극의 무공이 각성자에게 계승됐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황.
그녀의 얼굴에 냉기가 흘렀다.
“널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야겠다. 그리고 설극의 반응을 볼 것이야.”
주경아가 팔을 휘둘렀다.
쌍장이 아니었다.
마왕의 흑마력.
손톱 모양의 강기가 허공을 발기면서 이준에게 날아갔다.
무식할 정도로 강한 강기.
그것도 수십 갈래였다.
그대로 충돌했다간 골로 갈지 몰랐다.
이준은 진천보를 밟으며 날카로운 검은 강기를 피했다.
그를 스치고 지나간 검은 강기는 마계 군단과 신선, 야차와 나찰을 가리지 않고 쓸어버렸다.
“캬아아악!”
“컥.”
“푸우웁!”
마계 군단이 비명을 질렀다.
시선과 야차들은 신음을 내뱉었다.
주경아의 강기에 휩쓸린 이들은 피를 쏟아냈다.
“뒤로 물러나세요!”
뇌문의 여신선 연아린이 검을 미친 듯 휘둘렀다.
신선들에게 날아오는 검은 강기를 연신 튕겨 냈다.
가장 강한 신선은 그녀였으니까.
지옥계도 입장은 같았다.
지옥의 수문장이자 지옥계 서열 공동 2위인 삼두가 암화를 뿜어냈다.
암화로도 막지 못하면 이빨로 씹어 으깼다.
[나를 넘어야 지옥의 전사들과 싸울 수 있다.]
삼두는 그 말을 한 직후 결계를 쳤다.
아무래도 신들의 싸움이었다.
이대로 계속 하다간 땅이 남아돌지 않았다.
땅이 사라질 걸 염려한 삼두를 본 신선들.
그들 또한 아차 싶었는지 뒤늦게 결계를 쳤다.
신들의 격렬한 싸움은 계속 되었다.
치열한 전쟁 속.
이준과 주경아는 두 사람만이 이 공간에 있는 듯.
연신 부딪혔다.
* * *
알제스 루퍼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이준과 주경아가 싸우는 걸 유심히 보았다.
‘주경아가 간단히 제압할 줄 알았건만…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온단 말이냐.’
그는 이준이 힘없이 쓰러질 줄 알았다.
주경아는 구천옥의 죄인이었지만 현재는 마왕이었다.
명색에 마계의 왕인데 인간과 동수를 이룬다는 게 말이 되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저 무공 때문일 게야.’
자신을 죽였던 설극의 무공.
천하제일인이라고 자부했는데 설극에게 너무도 허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몇수를 나누는 것만도 벅찰 정도.
설극의 무공은 그야말로 신의 무공이었다.
그는 대체 이런 무공을 어디서 배워왔을까.
이 파괴적인 무공을 전수해 준 사람은 누굴까.
과연 자신이 이 무공을 배운다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죽어가면서 든 생각이었다.
‘설극의 무공만 있다면 내가 하늘에 우뚝 설 것이다.’
알제스 루퍼의 눈이 탐욕으로 일렁였다.
이준이 마왕이된 주경아와 손을 나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설극의 무공은 이미 증명됐다.
만약 이준이 주경아를 이긴다면?
‘무조건 저 무공을 가져야 한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몬.”
그는 질투의 군주를 불렀다.
“예 알제스님.”
“우리가 마왕님을 도와드려야겠다.”
“싸움에 끼자는 말씀이십니까? 절대 안됩니다. 싸움에 끼어든다는 건 마왕의 명예와 권위를 넘본다는 뜻입니다.”
질투의 군주 하몬이 결렬하게 반대했다.
오만의 군주인 알제스 루퍼를 따르고 있으나.
마왕이 생긴 지금은 달랐다.
무엇보다 지금은 전쟁 중.
내부의 분열보다 화합이 중요했다.
“마왕의 권위에 도전하라는 게 아니야. 저분을 도와주자는 말이지.”
“그래도 명예로운 싸움에 어찌….”
“우리가 벌레라 여겼던 인간이 마왕과 동수를 이루고 있어. 자네는 어떻게 보는가?”
하몬 레탄이 이준과 주경아의 싸움을 눈여겨봤다.
알제스 루퍼 말대로 박빙.
누구하나 밀리지 않았다.
“비슷합니다.”
“더 면밀히 봐봐.”
알제스 루퍼의 말에 하몬 레탄이 최대한 집중하며 싸움을 보았다.
하몬 레탄의 눈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미세하게 마왕이 밀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무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도 아니고.
동수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나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잘 보았어. 내가 왜 끼어들어야 한다고 말한지 알겠나?”
“마왕의 체면을 살려주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여기서 밀리면 우린 끝장이야. 마왕이 왕의 권한도 사용하지 않았나. 천계도 아닌 인계에서 패배한다면 마계는 끝장이야.”
하몬 레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제스 루퍼의 말이 옳았다.
천계의 마족도 아닌, 인간.
그들에게 마족이 진다면 어떻게 되겠나.
나머지 세 개의 층계에서 마계는 비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자식들은 천족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체면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아니 그런가.”
“맞습니다.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마족끼리 있을 때만 명예를 중시하면 되네.”
하몬 레탄이 마음을 정했다.
지금은 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왕의 싸움을 방해한다 하더라도 이기는 게 가장 중요했다.
“마왕을 도우러 가세.”
알제스 루퍼가 은밀히 움직였다.
하몬 레탄도 기척을 숨기며 그를 따랐다.
군주가 은밀히 행동하니.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싸우면서도 그들을 눈여겨보던 연아린도 잠시 잊었다.
두 군주는 보폭도 줄여가며 은밀히 움직였다.
***
푹-
푹-
주경아와 정신 없이 싸우던 이준이 신형을 멈췄다.
그리고 뭄을 뒤로 돌렸다.
“비겁한 놈들.”
이준의 입에서 선혈이 흘렀다.
그의 등에는 단검 두 자루가 박혀 있었다.
단순한 단검이라면 불편을 감수하고 싸움을 강행할 터.
등에 박힌 건 치명적인 독이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준은 끝까지 움직였다.
파멸겁이 허리춤에서 나와 2단계 모습으로 변했다.
그 즉시 하몬 레탄을 향해 맹렬히 날아가는 파멸겁.
“헉!”
하몬 레탄이 기겁하며 파멸겁을 막았다.
그가 양손을 모아 펼친 마법진에 파멸겁의 창두가 맞닿아 있었다.
파멸겁이 맹렬히 회전했다.
“아, 알제스님 도와,컥!”
하나 파멸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천살성과 동화하지 않아도 하몬 레탄 정도는 가뿐히 제압할 수 있는 게 그였다.
하물며 천살성화 동화한 이준이라면 괴물 그 자체.
저들의 왕인 주경아와도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독에 중독되었다 하더라도 하몬 레탄 정도는 제압이 가능했다.”
“끄으으….”
파멸겁이 복부에 박혀 움직일 수 없던 그를 향해 이준이 짧게 말했다.
“흑염.”
“끄아아악!”
하몬 레탄의 몸을 검은 화염이 휘감았다.
지옥의 불꽃.
생명이 꺼질 때까지 잠잠해지지 않은 불이었다.
이준은 하몬 레탄을 처치하고 내부를 살폈다.
‘내공이… 원활하지 않다.’
그토록 무지막지하던 내공이 뚝뚝 끊겼다.
독이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독.
‘하필 지금… 이지…?’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승기는 자신의 것이었다.
거의 다 왔다 싶을 때 기습을 당했다.
주경아를 상대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기습 당할 일은 없었다.
마왕인 그녀에게 집중했기에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잘못.
그 결과 치명적인 상처로 이어졌다.
혼원신공이 독을 몰아내고 있었다.
하나 쉽지 않았다.
어떤 독이길래 이리 지독한지.
그 대단한 혼원신공조차 애를 먹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해.’
하나 하몬 레탄을 제압할 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주경아와 대치 상황.
뒤편에는 좀 떨어진 곳에 오만의 군주도 있었다.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몰랐다.
‘젠장.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았는데.’
이준의 탓이 아니었다.
마왕과 싸우고 있는데 어떤 누가 한눈을 팔까.
마왕을 뛰어넘는 경지에 있지 않은 이상 딴생각을 할 순 없었다.
한편 주경아는 알제스 루퍼를 노려봤다.
“무슨 짓이죠?”
“마왕께 도움을 주기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제 허락도 없이 말인가요?”
“이 벌은 전쟁이 끝나고 달게 받겠습니다.”
알제스 루퍼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주경아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도 음흉한 자.
알제스 루퍼를 보고 있으면 그 옛날. 역겨운 무림맹주가 생각 났다.
억겁의 세월에도 잊혀지지 않은 얼굴 중 하나.
그의 간계로 인해 삶이 무너졌다.
구천옥에 든 것도 백무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를 아예 영혼까지 소멸시키려 했으나.
구천옥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얼굴을 가진 악인.
지옥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번 다시 제 허락없이 움직이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알제스 루퍼가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그의 말아 올려진 입꼬리는 굉장히 음흉해 보였다.
“가서 군단을 2차 각성 시키세요.”
“알겠습니다. 마왕.”
알제스 루퍼가 두 사람에게서 유유히 벗어났다.
* * *
신선계에서 인계를 보고 있던 무극자가 분노했다.
신선경의 호수가 파도쳤다.
“감히 내 제자를! 저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당장이라도 인계로 내려갈듯했다.
호수 중앙에는 인계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움직였다.
“신선제여, 아니됩니다!”
“인계로 강림하시려면 왕의 권한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본좌가 직접 강림해서 제자와 경아를 구하고 말 것이다.”
무극자의 말에 선계에 남은 신선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라면 분명 그리 할 거라 생각했다.
신선들은 그를 말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였다.
“멈추거라.”
작은 음성이었으나 좌중을 휘어잡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고개를 돌린 무극자였다.
“사, 사부님!?”
무극자는 사부인 천극자를 보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선제가 그리 엉덩이가 가벼워서 쓰겠느냐.”
“사부님. 그게 아니오라….”
아무리 막 나가는 무극자라도 천극자에게는 그도 한낱 제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