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3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사신수였다.
감출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청룡을 여기서 볼 줄이야.”
도주가 입맛을 다셨다.
백호에 이어 청룡을 포획할 기회였다.
황바울은 도를 꺼내 들어 다짜고짜 박정연에게 쇄도했다.
쿠우웅!
황바울의 도가 박정연에게 닿으려는 순간 앞에 장막이 쳐졌다.
장막에 의해 도가 막혔다.
그의 팔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힘을 세게 주고 있지만 벽에 가로막혀 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뒤에 있던 그의 수하들이 입을 벌렸다.
“도주의 도를 막았다.”
“백호도 막지 못한 힘이거늘.”
“사신수 중 가장 강하다더니 사실이었군.”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도 죄인들은 청룡의 힘을 알 수 있었다.
백호는 도주의 일 합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
그런데 청룡은 어떤가.
너무 가볍게 공격을 막았다.
도주의 손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그들의 눈에 보였다.
하나 도주를 가로막은 장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견고한 벽.
금이라도 가야 정상이었지만 장막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
“그래도 도주의 손에 쓰러지는 건 기정사실이야.”
“당연하지. 사신수라도 도주의 도를 감당할 순 없다.”
“도주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그까짓 사신수들은 전부 죽일 수 있어.”
도주에 대한 죄인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구천옥에서도 무력만으로 최상위에 속한 무인.
사신수에게 쓰러질 리 없다고 여겼다.
쿵-
쿵쿵-
황바울은 재차 도를 휘둘렀다.
도와 장막의 부딪힘에 주위로 기파가 퍼져 나갔다.
[인과율을 어긴 자여.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
청룡이 황바울에게 경고했다.
그는 구천옥의 죄인.
인계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날 죽여서 지옥으로 보내든지.”
깡-
장막을 향해 힘껏 내려친 도가 두 동강 났다.
청룡이 펼친 장막의 강도를 도가 버티지 못한 거다.
황바울이 몸을 뒤로 뺐다.
그가 팔을 옆으로 뻗자 무형도가 생겨났다.
“무, 무형도강!?”
“황 가주님께서 무형도를 만들어 내셨어!”
“맙소사!”
뒤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던 각성자들이 기겁했다.
황바울이 강할 거라는 추측은 했지만, 저 정도 수준일 거라고 어느 누가 생각했겠나.
대한민국에 무형도강을 사용할 수 있는 각성자가 몇이나 있겠나.
애초에 무형도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헉!”
“하, 하늘에….”
“무형도가 만들어졌어.”
“…저게 대체 며, 몇 개야!?”
하늘에 무형도가 셀 수 없을 만큼 생겨났다.
“이 위력이면 너를 지켜 주는 결계도 부술 수 있을 것이다.”
황바울이 무형도를 사선으로 그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 떠 있는 무형도가 일제히 박정연을 향해 떨어졌다.
굉음이 끊이질 않았다.
무형도가 떨어질 때마다 땅이 갈리고 흙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하늘에선 무형도가.
땅에선 황바울이 연신 도를 휘두르자.
그 단단하던 장막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계에서 지옥의 기운까지 아주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구나! 아이야. 뒤로 멀리 물러나 있거라.]
청룡이 박정연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가만히 있다가는 순식간에 당할 터.
결국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도마뱀이던 청룡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콰릉!
천둥 번개가 더욱 강하게 몰아쳤다.
뇌전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우왁!”
“피, 피해.”
“컥!”
“으캬캬캬.”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금룡황가를 따라온 각성자들이 번개에 맞아 기절했다.
번개에 안 맞은 이들도 땅을 통해 전해지는 전류로 인해 쓰러졌다.
다만 황바울을 비롯한 구천옥의 죄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무기력하게 쓰러진 백호와는 다르다 이거냐?”
청룡의 앞에 있던 장막이 부서졌다.
아직 남은 무형도가 청룡을 향해 날아갔지만 바로 앞에서 유리처럼 깨져 버렸다.
“무형도강만으로는 안 되는군.”
“도주 저희가 돕겠습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최대한 압도적으로 죽인다.”
“존명!”
도주가 땅을 밟으며 청룡에게 달려들자 구천옥의 죄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 * *
청룡과 구천옥 죄수의 대결.
용호상박.
막상막하의 싸움이었다.
어느 하나 밀리지 않았다.
청룡의 몸에 상처가 나면 청룡은 죄인 중 하나를 죽였다.
“아.”
“우리가… 낄 싸움이 아니다.”
정심호와 박춘식이 신음을 토했다.
마치 신과 신의 싸움.
감히 하찮은 인간이 중간에 낄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
함부로 나섰다간 목숨만 잃을 것이다.
“보고만 있기에는 불안해요. 할아버지.”
박정연이 땀이 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아슬아슬했다.
팽팽한 듯 보이나 곧 균형이 깨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균형을 깨트린 이는 도주였다.
그의 경지는 자연경 완숙.
청룡을 이기려면 자연경 끝자락은 밟아야 했지만, 그에게는 생사경에 달하는 수하들이 있었다.
“도주께 이 영광을 바칩니다!”
죄인들은 도주에게 격체전공으로 내공을 전한 후 기를 폭주시켜 청룡에게 달려들며 자폭했다.
무려 생사경 무인의 자폭이다.
작은 기운이라도 폭주시킨다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다.
그런데 선천지기까지 모두 끌어다 쓰니.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다.
쾅-
콰광쾅쾅-
백호의 게이트가 유례없이 흔들렸다.
절대종의 게이트.
웬만한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게이트에 틈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죄인들이 자폭 공격을 할 때마다 그들의 머리 위, 하늘에 틈이 벌어졌다.
바깥세상과 게이트가 연결되려 했다.
“어르신, 청룡 님이 위험해 보입니다.”
허수의 말에 박춘식은 고민에 빠졌다.
청룡의 편에 싸워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도망을 쳐야 하는지.
“할아버지!”
사신수는 정말 중요한 존재였다.
천외천의 마인을 알아볼 수 있는 신수.
마인들이 신수를 꼭 죽이려는 이유기도 했다.
청룡이 마인의 손에 쓰러지는 날엔 재앙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저기 쓰러진 백호로 인해 한국의 서쪽이 얼음으로 뒤덮였다.
청룡은 동쪽을 관장하는 신수.
청룡이 쓰러지면 동쪽 역시 엉망진창이 될 거다.
“모두 조심하거라. 상대는 천외천의 마인이다.”
박춘식의 허락이 떨어졌다.
박정연과 아이들은 청룡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자폭해 오는 죄인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금룡황가 대 오대 가문과 마벽 출신의 싸움.
각성자들은 이에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검제 님이 청룡을 보호하고 있어.”
“왜 같은 편끼리 싸우는 건데?”
청룡은 각성자에게 그저 몬스터에 불과했다.
사방 중 동쪽을 수호하는 신수가 아니었다.
몬스터를 쓰러트려서 더 좋은 아티팩트를 얻는 하나의 관문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다.
대한민국에 사신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사계절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각성자들은 검제와 대표 가문 출신들이 청룡의 아티팩트를 노린다고 생각했다.
“위선자! 오대 가문과 마벽은 아티팩트를 차지하려고 금룡황가에 싸움을 건 거야.”
“갑자기 청룡을 도울 때부터 이상하더니만.”
“가문 연맹회도 이렇게 쳐 냈던 걸 테지.”
“더럽다 더러워. 퉷!”
싸움권에서 벗어난 각성자들이 검제와 아이들을 욕했다.
각성자들의 눈에 비친 건 탐욕.
오대 가문과 마벽에 아티팩트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발심이 일어난 거다.
“이러고 손가락만 빨다가 뺏길 수 없소. 우리도 금룡황가를 돕지 않겠소?”
“그럽시다. 우리 몫은 우리가 챙겨야지.”
“금룡황가는 우리에게 아무 대가도 없이 아티팩트를 줬어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작은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줍시다.”
“와아아아, 나가 싸우자!”
각성자들은 탐욕과 질투로 인해 금룡황가의 편에 섰다.
황바울이 구천옥의 죄인인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진경수는 각성자들의 합류에 욕을 터트렸다.
“저 병신들 누구 편을 드는 거야!”
그는 권각술을 펼치면서도 각성자를 향해 쉬지 않고 욕을 했다.
“죽어엇!”
어떻게 이곳을 뚫고 들어온 건지는 모르나.
한 각성자가 진경수를 향해 창을 뻗었다.
하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진경수였다.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와 공격해 오는데 그냥 돌려보내겠는가.
각성자의 목을 와락 움켜쥐고는 땅에 패대기쳤다.
“보는 눈이 없으면 그냥 잠자코 기절해 있어, 병신 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기절한 각성자의 몸을 차 버렸다.
싸움권 밖으로 나가떨어진 각성자.
이를 본 다른 각성자들이 치를 떨었다.
“저, 저!”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어.”
“우리도 저렇게 될지 몰라. 이번 싸움에서 꼭 이겨야 하오.”
“모두 힘냅시다.”
“우리가 이긴다아아!”
각성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들은 아티팩트를 오대 가문과 마벽에 뺏기지 않고자 의지를 보였다.
“크크. 잘하고 있군.”
도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저 벌레 같은 각성자들 때문에 청룡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사람들이 죽을까 봐 염려하는 모습.
도주의 입장에선 든든한 고기 방패가 생긴 것이다.
* * *
[철룡 진경수, C급 각성자를 죽이다.]
[광마도 허수의 선유도 게이트에서 각성자의 아티팩트를 강탈하다.]
[오대 가문과 마벽의 숨겨진 민낯.]
[가문의 어른인 검제와 괴개의 방관. 이대로 괜찮은가.]
이상한 기사들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함께 첨부된 사진과 동영상.
이 기사로 인해 각성자 커뮤니티는 현재 마비가 된 상태였다.
[나 이 동영상 이해 안 됨. 누가 설명 좀.]
[오대 가문과 마벽은 청룡과 한편 먹고 금룡황가랑 일반 각성자들하고 싸우는 장면임.]
[ㅅㅂ. 들어도 이해가 안 되네. 왜 몬스터와 한편이냐.]
[착한 몬스터도 있다. 모르면 아닥.]
[킹정. 우리나라에 천외천이 쳐들어왔을 때 막아준 게 몬스터였다. 잊지 말자.]
[거기에 주작도 포함됐지 아마?]
[주작도 우리와 같은 편이니까 청룡도 우리 편이다?]
[ㅇㅇ. 이제 좀 이해하나.]
[ㅈㄹ. 몬스터가 왜 우리와 한편이야. 걔들은 노예일 뿐이야.]
[인간을 찢어 죽이는데 같은 편? 소름 돋아.]
[이준이 힘으로 찍어 누르니까 같은 편인 척 연기하겠지. 등급 높은 몬스터가 얼마나 영악한지 모르냐?]
[너님보다 지능 높음. 같은 편이라고 믿었다가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름.]
4대 성지의 금역 몬스터에 호의적인 인간은 많았다.
다른 종족이지만 위험할 때 목숨을 구해 줬으니까.
하지만 안 좋게 보는 시선도 많았다.
결국 인간과 몬스터는 다른 종족.
특히 각성자는 몬스터를 잡으면서 성장해야 했다.
동족을 죽이는데 몬스터가 인간을 좋아하겠는가.
식량으로 생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 동영상과 사진만으로는 전후사정을 모르지.]
[난 중립기어 박는다.]
[오대가문과 마벽이 우릴 위해서 했던 일을 떠올려 봐. 천외천과 목숨을 내놓고 싸웠는데 좋은 아티팩트를 선점하려고 싸우면 뭐 어때. 우리한테 피해 줬음?]
[오히려 금룡황가가 그동안 조용히 힘만 모은 게 더 꼴 보기 싫다. 전력 누수가 없었으니까 망한 가문이 저렇게 일어섰지.]
[황바울의 무력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내가 알빠냐.]
커뮤니티에서는 설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준도 보던 기사를 닫았다.
“청룡이 금역에서 나왔네. 애들을 보호하려고 나온 건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룡은 언제나 중립을 지키는 신수.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은 무거운 몸을 가졌다.
“그래도 다행이네. 온전한 힘을 가진 청룡이 있어서 애들은 안 다치겠어.”
그는 선유도 게이트 입구에 있었다.
이제 막 도착해 안으로 들어왔다.
“그보다 누가 개수작을 부린 것 같은데 그렇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오대 가문과 마벽이 망했으면 하는 세력이겠지요.”
“천외천의 마인 짓 아니겠습니까.”
류한길과 진병철, 조민석이 이준의 말에 동조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르는 세 사람.
마치 껌딱지 같았다.
“저 그런데요. 자식들 걱정 안 되세요?”
“걱정됩니다.”
류한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는 딸바보.
류가을이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면 물불 안 가리고 나설 위인이었다.
“먼저 가도 돼요.”
“어떻게 파천자 님을 넘고 먼저 가겠습니까. 전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래요. 다 왔으니까 좀 더 속도를 내 보죠.”
이준이 무극군림보를 사용해서 나아갔다.
세 사람의 눈앞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이준.
류한길은 그의 행동에 감격했다.
“봤지? 파천자 님께서 나를 걱정해 속도를 내셨어.”
“저도 봤습니다.”
“벽주는 좋겠소. 파천자 님의 총애를 받으니.”
“하하. 살마도 나처럼 진심을 다해 모시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다.”
딸의 걱정은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류한길이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도 가 보자고.”
세 사람은 이준을 쫓기 위해 경공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