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4화
이준은 청룡이 있는 동쪽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그곳에는 낙뢰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쳤구만.”
박정연과 박혁진 그리고 류가을과 남선호는 낙뢰를 피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의 속도는 육안으로 구별하지 못한다.
내공을 통해 뇌기를 읽어 예측해 피할 뿐이었다.
“청룡! 게이트를 부술 심산이냐?”
이준의 목소리에 청룡이 고개를 돌렸다.
[수련 중이다.]
“네 온전한 힘을 게이트가 감당하리라 보는 거야?”
[잘 조절하고 있다.]
“저게 말이냐?”
땅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푸르른 들판은 낙뢰로 인해 불에 탔으며 곳곳에 거대한 웅덩이가 생겨 났다.
이를 메꾸려면 테구르가 고생 꽤나 할 것 같았다.
[훈련의 일환이다. 양해 바란다.]
“그러니까 여기서 훈련을 왜 하냐고 다른 게이트 있잖아.”
[웬만한 게이트는 내 힘을 버티지 못한다.]
“그러겠지. 제일 강한 힘을 가진 너인데 게이트가 멀쩡하겠어?”
[칭찬 고맙다.]
“칭찬 아닌데? 당장 멈추고 다른 훈련으로 바꿔.”
[그럴 수 없다. 이제야 훈련의 성과가 나오고 있다.]
이준의 시선이 박정연에게 옮겨졌다.
그녀는 뇌운보를 밟으며 번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에선 낙뢰의 비가.
땅에선 전류의 밭이 있음에도 그녀는 경쾌한 움직임을 보였다.
뇌기에 아무 영향이 없는지.
주변의 뇌기까지 이용해가면서 낙뢰의 비를 피하는 게 아닌가.
“내 말이 맞긴 하네.”
[뇌후의 피가 어디 가겠나.]
“응? 무슨 말이야?”
이준이 청룡을 바라 보았다.
박정연이 계승한 무공은 뇌전검문, 뇌후 연아린의 무공이었다.
[저 아이가 뇌후의 혈통이라는 말이니라.]
무극자 사부의 말이었다.
“정말요?”
[한데 이상하단 말이지. 뇌후에게는 자식이 없는데 그 아이의 피를 진하게 이은 아이가 몇 백 년 만에 나타났다는 거야. 청룡, 너는 저 아이의 정체를 알고 있겠지?]
[그렇다.]
청룡은 순순히 인정했다.
한번 궁금증이 생기면 무극자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답을 알아내려고 할 터.
청룡은 그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순순히 말했다.
“뭔데?”
이준도 궁금했다.
청룡이 수련을 시켜주고 뇌기를 잘 다룬다 하더라도.
박정연의 성장은 괴물 같았다.
마치 이미 걸어본 길인 것마냥.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파천혈신 아니 신선제여 연아란을 기억하는가.]
[연…아란?]
무극자가 골똘히 생각했다.
떠오를 듯 안 떠오르는 얼굴.
분명 익숙한 이름이었다.
무극자가 한참을 생각하자.
청룡이 재차 힌트를 주었다.
[뇌후의 쌍둥이 언니라고 하면 알겠지?]
[뇌봉 연아란!?]
무극자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커졌다.
그가 놀라는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청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저 아이가 뇌봉의 환생이다.]
[맨 처음 만났을 때는 연아린의 환생인 줄 알았는데 신선계에 연아린이 있어서 생각을 접었건만 뇌봉의 환생일 줄이야…]
뇌봉 연아란.
뇌후 연아린의 쌍둥이 언니였다.
꽃을 피우기 전에 죽지만 않았더라면 뇌후의 이명은 연아린이 아닌 연아란에게 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천재였다.
천주 진무열 정도의 재능.
수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하는 재능이었다.
안타깝게도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각성은 하지 못했다. 자기가 연아란이라는 걸 알게 되는 날엔 전무후무한 여제가 탄생할 것이다.]
무려 천주 진무열과 같은 재능을 타고났던 연아란이었다.
악마의 재능을 가진 여자.
그러니 청룡이 관심을 가진 것이다.
“사람이 환생했다는 건 또 처음 들어보네.”
이준은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그는 환생이 아닌 회귀란 것을 겪었다.
회귀를 겪지 않았더라면 무극자 사부처럼 놀랐을 터다.
“혁진이도 뇌전검왕의 환생이라고 하면 재밌겠다. 한 번 놀려볼까?”
이준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박혁진을 놀릴 생각에 벌써부터 즐거웠다.
그런데.
[뇌전검왕의 환생이 맞다.]
청룡의 목소리에 이준의 표정이 굳었다.
농담 삼아 던진 말이 들어맞았다.
“진짜? 거짓말 아니고?”
[네게 농담 할 정도로 난 가볍지 않다.]
“헐.”
뇌봉과 뇌전검왕의 환생이라니.
두 남매의 재능이 특출 났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염라대왕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그의 의중을 어찌 알까 다만 추측을 하자면…]
청룡은 이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극자도 이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옛날과 느낌이 비슷하지 않나?]
[그 생각은 전부터 했다.]
무극자는 박혁진을 처음 만났을 때 뇌전검왕을 닮았다고 했었다.
이준은 첫째 제자와 많이 닮았고.
뇌전검왕과 천주 진무열은 죽마고우였다.
박혁진과 이준의 관계도 비슷했다.
[하나 준이는 첫째의 환생이 아니다. 엄연히 피가 다르고 정신력이 강한 아이다.]
[그래서 추측일 뿐이라 하지 않았나. 염라대왕이 네 첫째 제자와 거의 흡사한 아이를 인계에 내려보냈을 거라는 추측을 말이다. 요즘 인계 말로는 상위 호환이라 할 수 있겠군. 그 덕분에 너도 신선계로 갈 수 있지 않았나.]
맞는 말이었다.
이준은 천주보다 모든 면에서 앞섰다.
무공의 이해.
내공의 관대함.
싸움의 적응.
두뇌 회전.
강인한 신체와 정신력 등.
청룡의 말처럼 이준은 천주의 상위 호환이었다.
[거기에 본좌도 포함이 될 수 있겠군.]
[염라대왕이라면 그리 했을 것이다. 물론 확실하진 않다.]
[준이에 대한 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뇌후에게 이 사실을 말해줘야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무극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 *
신선제의 옥좌에 앉아 있던 무극자가 눈을 떴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여신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선제를 뵈옵니다.”
“신선제를 뵈어요.”
여신선들이 무극자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들은 무극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폭군.
수가 틀리면 신선이라 할지라도 개 패듯 패버린다.
신선이란 감투는 그의 앞에서 소용없었다.
그 때문에 모든 신선이 무극자를 어려워했다.
단 한 명.
“신선제께서 어인 일로 이곳에 오셨어요?”
뇌문의 여신선 연아린만이 무극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연아란에 관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의 예쁜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우연찮게 들었다. 염라대왕이 네 언니를 환생시킨 것 같다.”
“언니가 환생을!?”
연아린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신선의 힘을 총 동원해서 어렸을 적 죽었던 연아란을 찾았다.
하지만 연아란은 찾을 수 없었다.
지옥계에서 정보를 주지 않았다.
지옥부 관리자에게 뇌물을 찔러주기도 했지만 무의미했다.
돌아오는 건 ‘불가’란 단어뿐.
결국 연아란을 찾는 걸 포기해야만 했다.
“내 제자의 친구로 환생해 있다. 이름은 박정연 이명은 철혈뇌후이니라.”
“실례하겠습니다.”
연아린은 무극자에게 고개를 숙인 후, 신선경의 중앙 호수로 갔다.
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호수물을 들여다보자 박정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아이가 아란 언니의 환생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본좌 또한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느낌이 닮았거니 생각한 게 다였다.”
“그래도… 환생했다니 천만다행이에요. 지옥계에서 전생의 벌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더 놀라운 사실을 들어볼 테냐?”
“또 무엇이 있습니까?”
“놀라지 말거라. 저기 저 아이가 네 동생의 환생이다.”
무극자는 호숫가에 비친 박혁진을 가리켰다.
박혁진 또한 낙뢰를 물고기처럼 요리조리 피하고 있었다.
“연우가 아란 언니의 옆에 있다니!”
환생은 랜덤이었다.
전생에 가족이었어도 원수로 환생하는 경우가 흔했다.
또다시 가족이 되는 게 오히려 희박할 정도.
연아린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다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신선제님, 저 세 사람이 같이 있는 건 안 됩니다!”
“본좌도 안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내 제자는 첫째의 환생이 아니야. 염라대왕이 나와 첫째를 합쳐놓은 아이일 뿐이지. 첫째의 환생이었다면 네가 생각한 것처럼 불행이 일어났을 거다.”
연아란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은 이유.
뇌문의 여신선이자 뇌후인 연아린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본좌가 옆에서 지켜볼 것이다. 과거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뇌전검왕과 천주는 죽마고우였다.
동시에 철천지원수기도 했다.
천주의 질투와 불안감이 뇌봉을 사지로 몰아넣어 죽였으니까.
뇌후와 뇌전검왕은 죽을 때까지 천주를 용서하지 못했다.
뇌문의 여신선이 된 지금도 천주란 단어만 들어도 이를 갈았다.
“준이는 첫째의 환생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그랬으면 좋겠어요.”
연아린의 눈은 호수가에 나타난 이준을 뚫어지게 보았다.
* * *
“컥!”
“어, 어서… 이 사실을 가주께 알려 억!”
현원단 소속 각성자가 비명을 지르며 절명했다.
“끌끌. 황 가주께서 주신 약이 명약이구나!”
노인의 중소 문파의 가주 중 한 명이었다.
금룡황가의 가주 황바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얻은 단환.
그 영단을 먹고 난 후 겪은 변화는 굉장했다.
그의 성격에도 영향을 주었다.
소심할 정도로 신중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최근의 현원단은 AA급 각성자로 이루어진 단체.
그런 이들을 도륙하는 게 자신과 가문의 가솔들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꿈에도 못 꿀 일.
한데 지금은 현원단이 벌레보다 못한 존재였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생포해라! 병신이 되어도 좋아. 목숨만 붙여놔.”
“예 가주!”
노인의 명령에 그의 수하들이 현원단을 압박했다.
“하악… 여기서 죽을 순 없는데…”
현원단은 서로 몸을 기대었다.
흩어져봤자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것뿐.
하나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제 가주님. 아직 안 끝나셨습니까? 제가 도와드릴까요?”
새로 나타난 남자의 제안에 제 가주란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네.”
“황 가주님이 한 놈도 놓치면 안된다 하십니다.”
“내가 저놈들을 놓칠 것 같은가?”
“나이가 들어서 모르는 일입니다.”
“흥. 내가 공을 전부 차지하는 게 배가 아픈 모양이군.”
노인과 남자는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남자도 노인과 같이 단환을 먹고 강해졌다.
그러자 내부는 결속이 아닌 분열이 되고 말았다.
누가 더 공을 세우나.
금룡황가의 가주에게 보이는 걸 우선시 했다.
큰 공을 세우고 오면 황 가주가 보상을 쥐어줬으니까.
그 보상은 고작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엄청난 포상.
신물급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뿐인가.
계승의 꽃과 함께 새로운 무공도 줬다.
기존의 무공과는 아예 격이 다른 무공을.
그 때문에 15가문 연맹회 출신의 중소 가주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황바울의 눈에 들기 위해서 말이다.
노인과 남자가 설전을 벌이자.
현원단은 이때다 싶었는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살아서 만나자.’
‘가주께 제가 본 사실을 꼭 전하겠습니다.’
현원단 각성자들이 땅을 박차고 흩어졌다.
단원 중 무공이 가장 강한 자들이 시간을 벌었다.
“죽어라!”
“나랑 함께 지옥으로 가자!”
현원단 각성자의 검에서 검기 가닥이 무수히 많이 뿜어졌다.
검기는 노인과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온 힘을 다해 공격한 합공.
하나.
푹푹푹-
검기를 날린 현원단의 몸에 여러 개의 검이 박혔다.
“커헉!”
“예전의 우리가 아니란 말이다.”
“…천인공노할 푸우웁!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줄 아느냐…”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봤구나 끌끌.”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름 돋는 미소였다.
“너희가 우리의 몸에… 들어온다고 허어억 모를… 가주님이 아니다…”
“끌끌. 과연 그럴까? 네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신기학사 앞에 설건데?”
노인이 현원단원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입을 활짝 벌리자.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현원단원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