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5화
[또 혼자 감당하려는 게냐.]
‘그게 편해요.’
[저 아이들 말대로 언제까지 네가 모두를 보호할 수는 없느니라.]
‘저도 알아요. 하지만 소중한 이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소중한 사람을 잃어 봤다.
무극자 사부를 제 손으로 죽였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면 아직도 몸이 떨렸다.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잃는다면 또다시 그때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네 마음은 안다만.]
‘사부님도 항상 혼자 해결하셨잖아요.’
[이 사부에게는 믿을 만한 친구가 없었느니라. 허나 너는 다르니라. 너를 따르고 어떻게든 쫓아오려는 아이들이 있지 않느냐.]
박정연을 비롯한 아이들이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지유는 민트초코 우유 팩을 찌그러트리고 있었으며 허수는 참마도를 꼭 움켜잡았다.
이지안은 입술을 깨물었고 진경수와 조용석은 바닥의 돌을 찼다.
나머지도 마찬가지.
각자 분한 마음을 표출했다.
‘그래서 더 위험해요.’
분노는 이성을 집어삼킨다.
냉정한 상태를 유지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차라리 이 분한 마음을 적이 아닌, 자신의 발전에 사용하는 게 나았다.
‘저 혼자 감당할래요.’
이준은 확고했다.
무리해서라도 모두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려면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야 했다.
“소환.”
이준의 근처에 게이트가 열렸다.
테구르와 샥쿠, 로티틸과 파들락이 나왔다.
그 뒤로 귀속된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루급부터 블랙급 몬스터까지 다양했다.
“테구르.”
“옙! 주인님.”
“서쪽 지역에 거점을 만들어야겠어. 불의 고리를 연결해.”
불의 고리라 함은 지옥지대 게이트 입구를 바늘처럼 엮는 것이다.
한 게이트가 열리면 다른 게이트도 열리게끔 만드는 장치.
비상 사태일 때나 하는 방법이었다.
지옥지대의 게이트가 한꺼번에 열리는 건 서쪽 지역을 불의 생태계로 바꾸는 것과 같으니까.
어쩌면 자연의 균형이 깨질지 모른다.
“괜찮겠습니까요?”
“시키는 대로 해.”
“명을 받들겠습니다요!”
테구르가 각을 잡고 경례했다.
녀석은 스케먼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일꾼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다른 몬스터도 스케먼들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샥쿠.”
“말씀하십시오, 주인님.”
“네가 경계를 맡아야겠다.”
“어디를 방어하면 되겠습니다.”
“거점으로 만들어질 이곳을 24시간 교대로 경계해. 이 기운이 보이는 놈이 있으면 바로 죽여도 좋아.”
이준은 페니모어에게 받은 종이를 샥쿠에게 내밀었다.
“파랑님의 기운과 흡사합니다.”
“지옥의 기야. 죽은 망자의 기운이라 할 수 있지.”
“명심하겠습니다.”
“방심하면 안 돼. 제일 약한 놈도 너보다 강할 거야.”
“맡겨만 주십시오.”
샥쿠에게 맡긴 이유는 단 하나.
현무의 수호성이기도 했으며 매우 냉정했다.
공격적인 면모가 부각돼서 그렇지.
머리도 상당히 똑똑했다.
현무는 지혜의 상징.
샥쿠가 수호성으로 등급이 상승되자 머리도 덩달아 똑똑해졌다.
그 때문에 샥쿠에게 일을 맡겼다.
“적과 마주치면 많이 죽을 거야.”
“주인님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도 죽을지 몰라.”
“영광입니다.”
이준은 희생할 이들을 몬스터로 선택했다.
더 없이 충직한 몬스터들.
녀석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저 인간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고마워.”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한 법이니까.
샥쿠가 몬스터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스 몬스터들은 샥쿠의 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샤크로아들은 얼음으로 뒤덮인 곳부터 정찰을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에 이준이 몸을 돌렸다.
“너희들은 지금처럼 학교에 집중해. 당분간 실습은 중단하고.”
“오빠!”
이지안의 외침을 싹 무시한 이준이었다.
오히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너희 중 한 명이 적에게 잡히면 내가 불리해져. 내 발목 잡지 말고 얌전히 있어. 특히 정연 누나랑 혁진이. 알아듣겠어?”
이준은 두 사람을 콕 짚었다.
실력이 올라간 만큼 독단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은 두 사람.
모진 말을 하지 않는다면 위험한 일을 할지도 몰랐다.
“우리도 널 도와주고 싶어.”
“그 실력으로는 무리야. 도움? 오히려 내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이다.”
혈주만 나타났다면 가슴을 후벼파는 말은 하지 않았을 거다.
혈주를 죽인 후에 다른 구주를 찾으면 되니까.
하지만 적이 동시에 나타났다.
백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높은 확률로 구주 중 한 명이 한국에 숨어든 가능성이 있다는 말.
다른 놈을 혈주와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
한국에 숨어든 놈을 먼저 제거하면 좋겠으나.
찾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만에 하나 구주 중 한 명이 죽었다는 소리가 혈주에게 들어간다면 그는 음지로 숨어들 것이다.
혈주는 구주에서 3강에 속한 거물.
놈이 숨어들기 전에 꼭 죽여야 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려 하지 마.”
이준은 박혁진에게 모진 말을 던진 후 자리를 떠났다.
* * *
박혁진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를 비롯한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준의 찬바람.
성격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렇듯 모진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의 말이 모두 진담처럼 느껴졌다.
진경수는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우리가 선생님의 발목을 잡는다니….”
“형님. 이준 형님은 일부러 저희에게 모진 말을 하는 걸 겁니다.”
“그, 그렇지?”
“당연합니다. 항상 저희를 걱정하시는 분 아닙니까.”
“너무 진심이셔서….”
진경수가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쾅!
주변의 얼음이 터졌다.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폭음을 일으킨 사람은 박정연이었다.
그녀가 던진 검이 얼음 지대에 박혔다.
그 주위에서 흐르는 뇌기.
그녀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요!?”
테구르가 스케먼에게 명령을 내리다 말고 박정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주인의 1순위 신부감.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게 종복으로서 할 일이었다.
그러면서 한지유의 표정도 살폈다.
2순위 신부감.
언제 순위가 바뀔지 몰랐기에 두 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아니, 한 사람 더.
아직 신부 순위에는 들지 못하나 아주 가망이 없는 건 아닌 류가을이었다.
주인이 챙기는 걸 보면 가능성은 있었으니까.
“화가 나.”
“누구 때문입니까요? 이 테구르가 당장이라도 잡아오겠습니다요.”
“준이 때문에.”
“엑?”
“테구르 님. 빠지세요. 주인님께서 한바탕 퍼붓고 가신 것 같아요.”
로티틸의 목소리였다.
테구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테구르 눈치 없어.]
언제 이준의 품에서 나왔는지.
파랑이가 폴짝 뛰어 박정연의 품에 안겼다.
파랑이의 애교에 박정연이 중얼거렸다.
“네 주인 못됐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맥아리가 없었다.
언제나 자신감이 충만한 그녀였지만 이준의 말은 상처였다.
[주인님이 못된 구석이 있긴 해.]
“그치?”
[그래도 너희를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커. 파랑이는 느껴진다구.]
“네 주인이라고 편드는 거야?
[파랑이는 거짓말 안 해. 파랑이를 여기에 놔두고 갔잖아.]
파랑이는 언제나 이준의 곁에 있었다.
유일하게 떨어질 때는 이준의 부탁이 있을 때였다.
파랑이가 이곳에 남은 것도 그의 부탁 때문.
아니었다면 파랑이는 이준의 곁에서 안 떨어졌으리라.
“준이가 널 두고 갔어?”
[응. 영국에 다녀올 동안 너희를 지켜 주래.]
이준은 파랑이에게만 부탁한 게 아니었다.
지잉-
허공에 하얀색 게이트가 열렸다.
그곳에서 흑염마조가 나타나 한지유의 머리 위에 앉았다.
[오랜만이다. 꼬맹이들.]
위압감 넘치는 흑염마조의 음성이었다.
전과는 달리 아이들이 풀죽어 있자 흑염마조가 말했다.
[이 분위기는 뭐냐?]
[주인님 때문에 이래요.]
[작은 주인 때문에?]
[네. 자기 발목 잡지 말라고 모진 말을 했어요.]
[천살성과 한몸을 이룬 것 치고는 점잖군. 고작 그딴 걸 듣고 이리 기가 죽었다는 말이냐? 한심한 꼬맹이들 같으니라고.]
같이 이준을 욕하면서 공감할 줄 알았는데 흑염마조는 되레 호통을 쳤다.
[작은 주인의 말이 맞다. 너희가 적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작은 주인 성격상 적에게 휘둘릴 게 뻔해. 너희는 그러길 바라느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누가 스승이자 친구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겠나.
[구천옥의 죄인이 죽기 전까지 너희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괴감을 느끼지 마라.]
“구천옥의 죄인?”
“천외천의 마인을 그렇게 부르는 건가요?”
[몰랐더냐?]
“네….”
[작은 주인이 아무것도 이야기 안 해 준 것 같군. 하긴 그럴만 하지, 알아 봤자 위험할 뿐이지.]
차라리 적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게 나았다.
적으로 인해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대신 놈들만 아니면 너희를 무시 못 하게 만들어 주겠다.]
흑염마조의 말에 박혁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를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말입니까?”
[작은 주인의 부탁이다. 너희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지만 죄인들에게 붙잡혀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
못된 말을 퍼붓고 갔으나.
여전히 자신들을 생각한 이준이었다.
박혁진은 천월의 검병을 꽉 잡았다.
역시나 변했다고 해도 사실은 똑같은 이준.
이러니까 더욱 분한 거다.
[따라와라. 너희를 강하게 만들어 주마.]
흑염마조가 게이트로 사라지자 그들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 *
이준은 대륙간 포탈을 이용해 영국으로 넘어갔다.
페니모어 가문.
마법 각성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주님의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순서가 틀렸다. 여기 파천자 님께 먼저 인사를 하거라.”
마법 각성자는 이준의 얼굴을 확인하자 고개를 숙였다.
“파천자 님을 환영합니다!”
마법 각성자들은 기사 각성자들만큼이나 절도 있게 인사했다.
왜 페니모어 가문이 영국에서 1, 2위를 다투는지 단편적으로 보이는 부분이었다.
가주의 절대적인 힘.
마법 각성자를 완벽히 통제하는 권위.
저들의 동작으로 알 수 있었다.
“인사는 됐습니다. 블랙소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모시겠습니다.”
페니모어 가주와 파스콜 가주가 앞장 섰다.
그 뒤를 페니모어의 마법 각성자들이 보필했다.
상당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이준 앞에서나 위엄이 줄었지.
마법 각성자들과 함께하니 영국 최상위 랭커의 분위를 풍겼다.
그들은 시가지로 들어섰다.
은밀히 움직이는 대규모의 병력.
훈련이 잘됐는지 마법 각성자임에도 어쌔신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이었다.
“여기입니다.”
이준이 도착한 곳은 빈민가였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이들이 곳곳에 널부러져 있었다.
마치 마약을 한 사람처럼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뿐인가.
이곳에 들어선 이준과 두 가주를 흘겨보고 있었다.
마치 염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애들은 생각하는 게 다 똑같냐.”
대륙칠좌나 구주나 머리속에 든 건 비슷한 것 같았다.
성당 아니면 빈민가.
사찰 아니면 클럽.
여기만 가면 숨어 있는 놈들을 죄다 찾을 수 있었다.
이준은 페니모어 가주의 안내를 받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페니모어 가주가 뒤를 돌아보며 이준에게 물었다.
“나와.”
이준은 페니모어 가주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른 대답을 했다.
모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누가 있나 살펴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는데….”
“파천자 님의 기에는 뭐가 잡히는 건가?”
“우리와는 격이 다른 분이니.”
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다시 한번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강제로 끌어내 줘?”
쿵-
빈민가의 땅이 갈라지면서 흔들렸다.
이준의 예상치 못한 행동.
두 가주는 화들짝 놀라 했다.
“이러면 은밀히 온 이유가 없는데….”
“파천자 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그들은 이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이준이 대놓고 진각을 펼친 건 다름 아닌 혈주 때문.
어쩐 일인지 이곳에 혈주가 가까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을 염탐하며 말이다.
이준은 혈주를 발견한 즉시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