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2화
이준의 웃음은 그들의 전신을 굳게 했다.
모두가 아는 사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면 재앙이 일어난다.
피를 보지 않고는 끝난 적이 없다 하여 사람들에겐 혈소라 불리었다.
“가주들에게 알려야, 헉!”
홍엽상이 말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이준이 불쑥 다가왔기 때문.
이준의 수도가 홍엽상의 목을 노렸다.
홍엽상은 S등급에 있지만 군사형 각성자.
항상 최전방에서 싸우는 이준과는 경험의 격이 달랐다.
이준의 수도를 피하려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란 생각을 했을 때.
검제가 나타나 검으로 이준의 수도를 막았다.
그그그그.
수도가 검을 긁으면서 만들어 낸 마찰음.
스파크가 일어나며 수도가 홍엽상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검제는 반대편 손으로 천뢰기를 시전했다.
뇌의 무공.
그의 손에 무지막지한 기류가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모여든 뇌기를 이준의 옆구리에 박아 넣었다.
‘됐다!’
검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래의 실력이라면 절대 공격에 성공하지 못했을 터.
내공이 제한된 이준이라 이렇듯 공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나 그건 검제만의 생각.
천뢰기의 장력이 이준의 옆구리에 닿으려는 찰나.
이준이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의 손이 멀뚱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한지웅에게로 뻗어졌다.
한지웅의 검이 검집에서 뽑히더니 허공을 빠르게 갈라 왔다.
푹-
한지웅의 검이 홍엽상의 가슴에 박혔다.
“컥!”
홍엽상이 피를 토했다.
“이런!”
검제는 아차 싶었다.
공격에 성공하거나 이준처럼 막아야지만 반격 기회가 생긴다.
지금처럼 피하면 틈을 벌리며 도리어 상대가 이득을 취한다.
단순한 이치지만 실제로 이를 실행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검제는 검에 일부러 천뢰기를 많이 실었다.
설산을 내려간 이들이 볼 수 있게끔 하려고.
하나 이준은 개의치 않아 했다.
이곳에서 세 사람만 제거해도 아니, 검제만 없애도 한결 수월할 테니까.
이준은 홍엽상을 제거한 후 곧바로 땅을 박찼다.
목표는 한지웅이었다.
한지웅은 환영진을 펼쳤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
하나 한지웅도 별수 없었다.
그 또한 홍엽상과 같은 군사형 각성자였으니까.
검제의 도움에도 한지웅은 이준의 수도에 목이 꿰뚫리고 말았다.
검왕은 어떤가.
한지웅을 지키려고 다급히 왔다.
힘이 많이 들어간 검강.
강맹하긴 하나 느렸다.
속도가 느리면 이준의 먹잇감일 뿐이었다.
이준은 몸을 낮췄다.
검왕의 품으로 파고든 이준의 손에 무극장이 펼쳐졌다.
쾅-
무극장에 맞은 검왕의 몸통이 뻥 뚫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검제 한 명뿐이었다.
검제는 이를 악물고 이준을 공격했다.
아슬아슬하게 이준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
천뢰기의 영향으로 경직 상태가 될 법도 하나.
이준은 천뢰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듯했다.
검제의 검이 이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이준은 어느새 사라졌다.
검제의 검은 애꿎은 땅만 때렸다.
얼마나 강대한 힘이 담겼는지.
검제의 검으로 인해 산이 갈렸다.
“다들 눈치챘나 보네요.”
“이제 버텨 볼 생각이네.”
“가능하리라 보세요?”
“나도 한 방어 한다네.”
“알고 있어요.”
사람들은 몰라도 이준은 안다.
과거, 천주 사형의 손에 죽어서 그렇지.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고 버틴 건 다 검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에 수성의 군주가 있듯.
대한민국에도 수성의 달인이 있었다.
검제의 또 다른 별명.
많은 사람이 알지는 못했으나.
그는 공격만큼 방어도 잘했다.
물론 이준은 그를 뚫을 자신이 있었다.
검제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오른 다리. 다크 엘프를 상대하다가 다친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어.’
검제를 수련시킬 때도 확인한 사항이었다.
그가 절뚝거리거나.
사람들이 알아차릴 만큼 장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무리하면 오른쪽 다리에 힘이 많이 실리는 정도가 다였다.
‘하단을 노린다.’
이준은 두 손에 내공을 응집시켰다.
그의 주위로 눈발이 회오리쳤다.
눈 폭풍이 몰아치는 광경.
보통 사람이었다면 눈 폭풍에 휘말려 몸이 갈기갈기 찢겼으리라.
무극장이 생성되자 검제를 향해 날렸다.
무극장은 검제의 다리를 노렸다.
검제는 보법을 밟으며 장력을 피했다.
쾅-
쾅-
이준의 장력이 눈밭에 폭사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검제를 향한 장력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그는 장력을 쪼개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간간이 검막을 펼치기도.
검으로 흘려보내기도.
장력을 튕겨 내기도 했지만.
빠르게 움직이며 장력을 피하는 횟수가 제일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제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내 약점을 알고 있다.’
하나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이준은 검막을 펼치거나 장력을 튕겨 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도 공격을 주도하며 일부러 자신이 상대할 수 있게끔 힘을 보내고 있으니까.
‘등급이 세 단계 정도 차이가 나는데도 이렇게 밀리다니… 이게 바로 깨달음의 차이인가?’
뜻대로 공격을 주도하는 일.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상대방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했다.
버릇, 습관, 내공의 흐름까지.
완벽히 파악해야 했다.
‘이대로면 내가 먼저 쓰러져. 언제 오는 거냐.’
빠르면 5분.
늦으면 10분이었다.
1초가 하루 같은 느낌.
그만큼 검제가 이준에게서 받는 압박은 컸다.
그의 기감에 혈마를 비롯한 가주들이 잡혔다.
그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중요한 건 그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냐는 것.
이대로 끌려간다면 지원군이 오기 전에 죽을 터다.
‘반동! 반동을 이용하자.’
이준이 쏘아 보낸 장력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공격에는 잘리지 않는 장력.
이를 이용해 몸을 뒤로 빼는 게 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장력이 날아왔다.
‘지금이다!’
검제는 이준의 흐름을 거슬렀다.
보법을 밟아서 피해야 했으나.
검을 세워 장력에 맞섰다.
검이 장력에 부딪힌 순간.
검제는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몸을 날렸다.
그의 의도대로 됐다.
무지막지한 힘이 담긴 장력이 그를 뒤로 밀어 버렸다.
이 속도라면 설산 아래로 순식간에 떨어질 수 있었다.
검제의 눈에 거점에 꽂힌 깃발이 보였다.
‘깃발은 걱정할 것 없다. 파천자라면 깃발을 차지해 이기려 하실 거다.’
이준이 깃발을 뽑으려 했다면 진작 뽑았을 터.
그는 자신을 비롯하여 신기학사와 뇌마를 탈락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깃발을 신경 쓰지 않은 거다.
이제 몸을 누이면 끝.
허리를 뒤로 젖히려는데 지근거리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공격을 주도하고 있다고 느꼈을 텐데요. 그걸 거스르면 어떻게 될지 아시는 양반이 악수를 두시네요.”
검제는 뒷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살기라든지 압박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이미 읽고 있었다는 게 소름이 돋았다.
‘아뿔싸!’
어느새 장력이 소멸해 있었다.
대신 이준의 손이 검제의 뒷덜미를 덥석 잡았다.
이준은 검제를 잡아 깃발이 꽂힌 설산 꼭대기로 집어 던졌다.
쾅-
검제가 설산 바닥에 처박혔다.
“컥!”
큰 충격에 그의 몸이 눈 속에 파묻혔다.
하얀 눈에는 검제의 피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위에 서 있는 이준.
그의 미소가 검제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시네요.”
이준의 오른쪽 발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인지했다.
발이 아래로 내려졌다.
쿵 소리와 함께 검제가 파묻힌 바닥이 거대한 실선으로 금이 갔다.
“크허어억!”
검제는 밀려오는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이건 특별 거점 점령전.
수련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여기서 이준에게 공포를 느끼리라 어찌 생각했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끽해 봐야 엄습해 오는 고통뿐이겠거니 여겼다.
검제는 오만 생각이 다 났다.
파천자를 상대하는 적은 매일 같이 이런 심연을 파고드는 공포를 느껴야 했던 걸까.
직접 겪어 보니 동정심마저 들었다.
다신 겪어 보고 싶지 않은 공포.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였다.
하지만 검제는 모를 것이다.
그가 느낀 공포는 이준의 적에게 비할 바가 아니라는 걸.
새 발의 피였다.
이준의 발이 다시 한번 위로 올라갔다.
가슴이 아닌 검제의 오른쪽 다리였다.
콰직-
“아아아악!”
검제의 처절한 비명이 설산에 울려 퍼졌다.
이준은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이는 검제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이 적을 상대할 때 어떻게 하는지를.
검제의 몸이 축 늘어졌다.
걸레짝이 된 몸.
다리의 뼈란 뼈는 모조리 가루가 되었기에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검제가 전투 불능 상태가 되자 딱 알맞게 혈마와 가주들이 설산 정상에 도착했다.
* * *
“검제 영감!”
혈마가 검제를 불렀으나 검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몸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
천하의 검제가 저토록 걸레짝이 된 게 얼마 만인지.
혈마와 가주들은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이준이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뒷짐을 진 채 그들을 내려보았다.
검제의 상태를 봐서 그런가.
그들의 가슴 속에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준이 내공 제한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게 됐다.
“어, 어딜 봐서 제약이 걸린 상태란 말이오.”
“검제께서 저리 엉망이 되실 줄은….”
“허, 이게 가능할 리가….”
모두가 떨리는 눈동자로 이준을 보았다.
거대한 산을 보는 느낌.
넘을 수 없는 존재가 앞에 있는 듯했다.
“천외천급이라 하더니… 명불허전이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이때.
진병철만이 환하게 웃었다.
“역시 파천자 님! 우리 같은 떨거지는 저분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해.”
공포와 두려움도 있었지만 이준에 대한 끝없는 경외가 더 컸다.
진병철은 그에게 수련받은 게 자랑스러웠다.
저런 사람 밑에서 배운 아들은 어떻겠나.
다음 세대를 이끌며 이름을 날릴 게 분명했다.
흥분한 사람은 진병철뿐만이 아니었다.
류한길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사선을 넘나드는 긴장감.
목숨을 거는 사투.
이준과 수련 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지금에서야 느끼게 됐다.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는 거다.”
류한길이 내공을 극성으로 끄집어냈다.
그의 몸에서 붉은 혈기가 줄기차게 뿜어졌다.
눈에서 적안이 번쩍였다.
류한길을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아수라파천공이었다.
진병철도 투심공을 끄집어냈다.
투존의 무공은 싸울수록 강해지는 무공.
이준과의 싸움은 그를 한층 더 강한 각성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류한길과 진병철이 기세를 드러내자.
다른 가주들도 덩달아 용기를 냈다.
검제가 걸레짝이 됐다고 여기서 물러나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밖에선 이 광경을 모두 보고 있을 터.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교육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 포기하겠다는 마음은 내다 버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좀 빡셀 것 같네요.”
일부러 괴개와 검제를 먼저 제거했다.
여기서 제일 걸림돌은 혈마였다.
다행인 점이라면 혈마는 여럿이서 함께 싸우는 걸 잘하지 못한다.
합격진을 구사하는 게 젬병.
차라리 혼자 따로 싸우는 게 가장 그다웠다.
그랬기에 암습으로 그를 죽이는 게 가능했다.
생각을 정리한 이준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모두 합격진을 갖추시오!”
진병철의 외침에 혈마를 뺀 나머지가 조를 이루었다.
그들은 이준의 기척을 찾기 위해 감각을 모두 개방했다.
노말 페니모어의 감지 능력.
파스콜의 동물적인 감각.
진병철과 류한길의 위험 감지 본능.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감각을 끄집어냈다.
그래서인지 이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아채는 게 가능했다.
몸을 숨긴 채 자신들의 주위를 배회하는 이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사자와 같았다.
틈이 보이면 당장이라 달려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 가주 내게 보조를 맞춰.”
“알겠소.”
여기서 제일 강한 사람이 류한길이니.
그의 지시대로 하는 게 맞았다.
페니모어나 파스콜은 마력 각성자이나.
전장에 선 경험이 다수라 그런지.
수월하게 합을 맞춰 왔다.
물론 손발이 완벽히 맞는 건 아니었지만.
류한길의 말에 그의 보조를 맞추던 진병철이 지근거리에 있는 이준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혈마! 당신 뒤에 있소!”
이를 진작 알아차렸던 혈마가 권강을 뽑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