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9화
각성자 사관 학교의 첫 등교 날이 밝아 왔다.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제복을 입은 채 정문을 통과했다.
기념적인 일.
무사고 학생뿐만 아니라 사마고 학생에 이어 마력을 지닌 해외 각성자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이런 대통합은 없었다.
각사학 이사장인 한민성이 흡족한 얼굴로 학생들을 맞이했다.
“각사학에 입학한 걸 축하해요.”
입학생들도 한민성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 달만인가요? 열심히 해서 등급 상승을 바라요.”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원래부터 아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를 처음 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저 사람이 진법서생?”
“얼마나 능력이 좋으면 막중한 각사학 이사장 자리에 앉은 걸까.”
“소문으로는 무사고 애들 전원을 현역 각성자 실력으로 높였다는데?”
“리더십이 뛰어나다는 말이네.”
사마고를 다녔던 학생들과 유학 온 외국 자제들은 한민성을 유심히 관찰했다.
현재 신기지가는 힘을 잃은 상태.
그럼에도 한민성은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문의 위기에 초조할 법도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각사학에 오신 걸 환영해요.”
한민성이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카인 한지유의 막대한 성장.
신기지가는 SS급 각성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국가 전력급을 가뿐히 뛰어넘는 존재.
나라에서 보호하고 나설 인재가 한지유였기에 걱정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SS급 무공을 지니기도 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이 아닌 덕에 능력을 잃을 일도 없을 터.
한민성이 여유만만할만 했다.
“이사장님.”
“어떻게 됐나요?”
“불가하다는 마지막 통보가 왔습니다.”
“후우우. 결국 그렇게 됐군요.”
전부 한민성의 계획대로 됐다.
대한민국에서 오대 가문과 마벽의 영향력은 이전 가문 연맹회보다 더욱 커진 상태.
거기다가 각사학까지 개교하니.
오대 가문과 마벽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퍼즐만이 남았다.
그 하나만 끼우면 완벽.
하나 그 퍼즐이 경고를 보내온 것이다.
“그분께서 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 들어도 뻔하군요.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러면?”
“또다시 귀찮게 군다면 지유 아가씨의 무공을 뺏어 버린다고 합니다.”
“으음….”
한민성이 신음했다.
그와 신기지가가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한지유 덕분이었다.
그녀가 SS급 각성자가 됐기에.
혈족보다 식객의 숫자가 많은 신기지가가 아직도 견고한 거다.
만약 한지유가 무공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제갈세가의 무공을 계승한 신기지가는 하루아침에 멸문을 당하고 말 것이다.
이 경고를 무시해선 안 된다.
“어쩌다 그와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
“이사장님께서 먼저 선을 넘으셨습니다.”
“그를 생각해서 한 일인데.”
“지유 아가씨가 그만하라고 할 때 멈췄어야 했습니다. 이사장님께서 자초한 일이십니다.”
“남 비서는 계속 팩폭을 날릴 건가요.”
“전 사실만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
이준을 위해 한다는 일이 그만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관계가 이토록 안 좋아질지 누가 알았겠나.
이리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석상을 세우지도 않았을 터다.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늦었습니다.”
“팩폭으로 그만 때리세요.”
“그래도 그분을 제외하고는 완벽합니다.”
퍼즐의 완성은 이준이었지만 그를 빼고도 충분했다.
아니, 차고 넘쳤다.
학생들을 가르칠 이들이 바로 이준에게 가르침을 받은 특별 1반 학생들이었으니까.
그들이 이제는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상심은 그만하시고 이제 대강당으로 가셔야 합니다.”
“준비가 끝날 시간이군요. 갑시다.”
여유롭게 웃던 한민성의 어깨가 왠지 축 늘어진 느낌이었다.
* * *
각사학 대강당에 엄청난 인원이 모였다.
3만 명이 넘는 숫자.
그들이 웅성대니 순식간에 시장통이 됐다.
단상에서 이사장이 말하든 말든.
그들의 관심은 따로 있었다.
이사장의 뒤에 앉아 있는 이들.
자신과 또래거나 나이가 훨씬 어린 남녀였다.
“꺄아아! 철룡 좀 봐. 어쩜 저리 남자답게 생겼을까.”
“광마도는 어떻고! 손에 난 힘줄도 섹시해.”
“맹호쌍검은 두 사람하고 다르게 날렵해서 좋아.”
여자들의 목소리는 진경수와 허수 그리고 남선호의 귀에 들렸다.
낯간지러운 소리지만 그들은 뿌듯해했다.
이게 바로 성공의 맛.
사람들이 왜 악착같이 성공하려는지 알 것만 같았다.
여자들은 단상에 앉아 있는 특별 1반 출신을 보며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암화와 독화, 빙화에게 첫눈에 반한 듯.
몽롱한 눈으로 그녀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빙화 미모 미쳤네?”
“이러니까 연예인이란 직업이 망하지.”
현시대는 예쁘기만 해선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예쁜 건 기본으로 깔아야 했고, 각성자여야 했다.
그래야지만 경쟁력이 생기는 시대였다.
연예인이 사라지게 된 이유가 바로 단상 위.
한민성 뒤에 앉아 있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연예인을 오징어로 만드는 미모를 지녔다.
그중 단연 으뜸은 빙화 한지유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렵게 만들었다.
한데 계속 보게 만드는 매력.
남자들은 그 마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남자들이 특별 1반 출신 여자들에게 빠져 있는 사이.
한 남자는 오로지 검룡만을 보고 있었다.
“검룡이 저 자리에 있다는 게 신기해요”
“나랑 학교대항전에서 비무를 했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말이야. 출세했어.”
“선배. 검룡은 이제 저희와 겸상할 짬이 아니에요. 말조심해야 합니다.”
“나도 알아 인마! 배 아파서 해 본 말이다, 이 새끼야.”
스물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그의 이름은 구찬기였다.
나이는 스물둘.
한때는 박혁진과 견줄 만큼 명성도 있었다.
사마고를 졸업하고 현역 각성자로 혈마련, 지금은 마련이 된 곳에 들어가서 활약했는데.
그사이 박혁진은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심지어 마련주보다 강해져 있으니.
한편으로는 허무했다.
이게 맞나 싶을 만큼 벌어진 격차.
각성자를 그만둬야 하나 싶은 허탈감마저 들었다.
같은 검사가 봐도 그의 재능은 엄청났으니까 말이다.
“선배. 커리큘럼에 검법 수업 넣으실 거예요?”
옆에서 구찬기의 후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배는 그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어도 마음이 상했다는 걸 안다.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자가 갑자기 커다란 벽이 되어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검법 수업을 들으면 라이벌 아래에서 배우게 될 터.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 아니었으면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구찬기는 강해지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다.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자의 밑에서 배우면 어떻나.
강해질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도 파는 게 바로 각성자.
박혁진은 무려 SS급 각성자였다.
그의 밑에서 검을 배우는 걸 거부하는 건 병신 짓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검룡의 수업을 듣겠다 해서 맘대로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업에는 정원이라는 게 정해져 있다.
SS급 각성자인 검룡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 안달인 이들만 한 트럭.
그들을 따돌리고 강의 신청에 성공해야지만 검법 수업을 듣는 게 가능했다.
구찬기는 진지하게 대답했는데 질문했던 후배가 다른 곳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선배.”
“뭐.”
“여긴 천국인가요?”
“뭐라는 거냐.”
“빙화와 독화가 예쁘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저 뉴페이스는 누구예요? 선배는 알아요?”
후배가 손가락으로 단상의 누군가를 가리켰다.
“누구?”
“저기 단아하게 앉아 있는 여자 말입니다.”
독화를 지나 암화 옆에 있는, 청순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를 본 후배가 입을 떡 벌렸다.
예상하지 못한 꽃을 찾아 기쁜 얼굴.
후배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구찬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디어에서 본 얼굴.
하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누굴까.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인데 입 밖으로 이름이 안 나왔다.
구찬기와 후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무사고의 재학생이었던 남학생이 대신 답해 주었다.
“빙결장 박은비 누나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 여자의 이름이 박은비야?”
“네. 무사고 특별 1반 출신이에요. 일반 각성자 최초로 S급 초입에 든 대단한 누나입니다.”
“꽤 친한가 봐?”
“아, 아니에요. 워낙 밝은 누나라 먼저 인사해 주고 몇 마디 이야기 나눈 게 끝이에요.”
“그래?”
후배가 눈을 빛냈다.
청순한 얼굴에 마음씨까지 착했다.
“네 이상형인데?”
“선배. 저 이제부터 장법을 배워 보려 합니다.”
“너 검사 아니냐? 그리고 네 내공은 음기와는 정반대일 텐데?”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내공의 성질도 기꺼이 바꾸겠습니다.”
후배가 진심 어린 얼굴로 말하자.
구찬기가 눈을 질끈 감았다.
후배는 금사빠였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
하필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버렸으니.
사랑에 빠진 것이다.
구찬기가 후배를 향해 농담을 했다.
“한결이 너 설화 보면 말 달라질걸?”
“제 사랑을 부정하지 말아 주세요.”
“네 이상형이 청초하고 조신하며 마음씨 착한 여자 아니야?”
“맞아요.”
“청초하고 조신함에 있어선 빙결장보다 설화가 한 수 위라는데? 착한 건 모르겠다만.”
어디서 들어 본 이야기였다.
인터넷인가?
설화와 빙결장의 청순함을 두고 설전을 벌인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
후배, 최한결의 눈에는 박은비의 청순함도 한도를 넘었다.
그런데 그녀보다 청초함에 있어 한 수 위의 여자가 존재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여긴 천국인가.
1년 전에 사마고를 졸업하지 않고 무사고로 전학왔다면 그녀를 더 빨리 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검화와 설화가 안 보인다.”
단상에는 특별 1반 출신들이 전부 있었지만.
박정연과 이지안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두 사람이 있었더라면 시장통이 아니라 아수라장이 됐을 터.
그만큼 박정연과 이지안의 존재는 강렬했다.
“두 사람도 강의는 한대.”
옛날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무리 뛰어난 천재지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설화였다.
그녀는 이제 막 고2.
열여덟이었다.
어리긴 하나 그녀가 속한 가문은 사신가.
심지어 파천자 이준과 신권 사형준이 직접 가르친 인재였다.
파천자와 신권에게 직접 배운 이지안이었기에.
그녀가 강의를 하겠다면 하는 것이었다.
“들어 볼 강의가 많을 것 같습니다, 선배.”
“강의 신청 망하지나 말아라.”
“제 내공을 전부 운용해서라도 반응 속도를 최대한으로 늘릴 거예요.”
“무운을 빈다.”
구찬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사장의 훈화를 들었다.
이사장의 말이 끝나고 교수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학생들에게 첫 번째 과제가 부여됐다.
바로 강의 신청 전쟁.
입학생들은 내공까지 써 가면서 강의 신청에 열을 올렸다.
* * *
검법 강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수는 박혁진과 박정연이었다.
여자들은 박혁진을.
남자들은 박정연에게 몰렸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강의를 듣게 된 이들은 잔뜩 기대했다.
전날에 참석하지 않았던 검화 박정연을 처음 보는 시간.
박정연의 강의를 듣는 남자들이 광활한 운동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9시 정시가 되자.
저 멀리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흰 크롭 티에 청바지를 입고 왼손에는 검을 든 사람.
검법 강의를 맡은 박정연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미디어에서 박정연을 많이 접했지만 실물로 보는 건 처음.
남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굴 실화냐.”
“아….”
“저렇게도 생길 수 있구나….”
박정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남자들.
하이에나 같은 표정으로 모두가 침을 질질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