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8화
중국 북경.
가장 높이 솟은 빌딩에서 죽음의 향기가 났다.
불이 켜진 빌딩 안.
인기척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그 안에는 시체만이 가득했다.
그곳의 복도를 걷고 있는 사람은 한 명.
얼굴과 손에 피를 잔뜩 묻힌 한 젊은 남자였다.
“크크.”
그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가 혀로 손에 묻은 피를 핥았다.
“구천옥에서 탈출했다. 드디어! 크하하하.”
남자의 웃음소리가 빌딩을 떠나가라 울렸다.
그가 복도를 지나 멈춘 곳은 빌딩의 창문.
북경 시내가 훤히 보이는 자리였다.
“내가 구천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남자는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밝은 세상을 눈에 가득 담았다.
지옥 같은 구천옥에 비하면 이곳은 무릉도원.
길바닥에서 자도 행복할 지경이었다.
“앞으로는 내가 지낼 곳. 기대가 돼. 크크.”
그런데 심지어 부자의 몸으로 들어왔다.
근골도 썩 나쁘지 않았다.
본래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그런지 훈련이 잘된 몸.
탁기가 몸에 많이 쌓여 있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남자의 능력이라면 이런 탁기쯤은 금방 날려 버릴 수 있으니까.
그의 곁으로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다가왔다.
“살주. 모두 처리했습니다.”
“잘했다. 들어간 몸은 어때?”
“형편없습니다.”
“그 몸이라도 얻은 걸 감지덕지하게 여겨. 영혼인 채 떠돌다가 저승사자에게 잡혔으면 그대로 소멸했을 테니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말이야.”
“그런데 살주께선 괜찮으십니까?”
“응?”
“파천혈신에게 입은 상처가….”
살주의 수하가 말을 흐렸다.
살주는 구천옥에서 파천혈신에게 된통 당했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입장.
아직도 맞은 부위가 욱신거릴 것이다.
“그 새끼만 떠올리면!”
살주의 눈이 붉어졌다.
빌딩에 요동치는 살기.
건물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렸다.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 주겠다.”
살주는 이를 뿌득 갈았다.
구천옥에서 어깨에 힘주고 산 지가 억겁.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한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나타나 개망신을 주는 게 아닌가.
살아 있는 상태로 회를 떠서 먹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주는 파천혈신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다가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보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어.”
“신선제 말입니까?”
“그래. 금지의 노괴가 신선제였다니. 전대의 구주가 저항하지 못하고 죽은 이유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 돋았다.
구천옥에 있을 적 기회가 된다면 노괴를 죽이겠다고 벼르던 살주였다.
그는 살의 주인.
살수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암살자였다.
한두 수 앞선 무인도 죽이는 게 가능한 그.
노괴라고 못 죽이진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신선제라면 달랐다.
신계의 왕 중 한 명.
신선계에서 가장 강한 자가 바로 신선제였다.
그런 자를 죽이는 건 아무리 살주라도 불가능했다.
신선제를 죽이는 게 가능했다면 염라대왕의 목을 따는 것도 가능했을 테니까.
“우리가 구천옥을 탈출했으니 염라대왕은 신선계와 함께 우릴 노릴 것이다.”
“으음….”
살주의 수하가 신음했다.
구천옥에서 탈출한 이상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저승사자나 신선들이 인계로 내려온다면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죄인들에게 뇌옥은 사치.
영원한 소멸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승사자들이라도 우리의 기운을 쉽게 알아내지 못할 거야.”
구천옥의 죄인들은 지옥부에 이름이 오른 자들.
지옥부는 영혼의 영원한 소멸 명단이었다.
여기에 이름이 오르면 세상과 아예 끊기는 것.
그 어떤 기운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저승사자들은 구천옥의 죄인들을 찾는 게 굉장히 어려울 거다.
“다만, 사신수가 있다면 다르지.”
우주 만물의 근원.
자연을 수호하는 영수들이라면 죽음의 기운을 뿌리는 죄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신수가 나타나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린 이제부터 사신수를 사냥하는 거다.”
“예?”
“사신수가 죽으면 염라대왕이 직접 인계에 강림하지 않는 이상. 우리를 찾는 건 요원한 일이다.”
“아, 언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구천옥 탈출을 모의할 때 제일 처음 나온 말이었다. 다른 놈들도 적합한 인간의 몸에 들어가면 아마 사신수부터 찾을 거야.”
사신수만 찾아 없애면 구주를 위협할 존재는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저승사자들이 인계에 내려오든 말든 앞으론 구주의 세상일 것이다.
“아이들을 풀어 사신수부터 찾아라.”
살주는 명을 내리곤 구주와 계획했던 일을 곱씹었다.
‘마계의 문을 열어 마계로 간 마주를 맞이하면 된다.’
사신수를 죽이는 일과 더불어 인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마계의 문을 여는 일이었다.
* * *
대한민국.
아니, 아시아 국가에 비상이 떨어졌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을 계승한 각성자가 능력을 잃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요즘 들어 게이트의 태동이 심상치 않은 이때.
하필 각성자가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능력을 잃었다 하더라도 평생을 익힌 심법과 무공이 있었으나.
각성자들은 상태창에 등록된 무공 스킬에 의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상태창을 잃어버렸으니.
패닉에 빠진 것.
AA급 각성자에 속한 이들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였다.
균열을 뚫고 나온 몬스터의 등급은 높아져 있었으니까.
이로 인해 아시아 국가에 위기가 찾아왔다.
대한민국도 능력을 잃은 각성자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 이야기 들었어?”
“구파일방의 무공을 계승한 각성자가 능력을 잃은 거?”
“어. 뭔가 불안하지 않아. 곧 재앙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야.”
“불안하긴 하지. 각성자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소리잖아.”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이들.
학교 가는 학생들.
심지어 주부조차도 이를 걱정했다.
각성자들은 몬스터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는 수호자.
그들이 능력을 잃은 건 시민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를 해결해 줄 사람은 한정적.
보호를 못받은 이들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을 익힌 각성자의 비중이 낮아서 다행이야.”
“하긴 그래.”
“가문 연맹이 있었을 때였다면 식겁했을 거야.”
현재 대한민국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비중이 현저하게 낮았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신 오대 가문과 마벽의 시대.
이 세력 중 무력화가 된 곳은 철혈과 만독, 신기 세 곳뿐이었다.
사신가와 진씨 가문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과는 연관이 없는 곳.
마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철혈과 만독, 신기의 전력 공백이 생겼으나.
사신가와 마벽만으로 서울을 지키는 건 충분했다.
문제는 지방 도시였다.
충청도는 진씨 가문이.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은 암상이 해결하고 있었으나.
강원도나 전라도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영향력이 지대한 곳.
이 두 지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이준은 홀로 강원도에 파견나왔다.
그가 한적한 곳을 걷고 있는데.
그의 앞에 블랙급 몬스터가 늘어서 있었다.
파멸겁도 꺼내지 않은 채 걷기만하는 이준은 홀로 중얼거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을 익힌 각성자가 맛이 가서 내가 고생하네.”
[다 수련이라 생각하거라 제자야.]
“수련이 되어야 말이죠. 저거 봐요. 그냥 죽잖아요. 이게 수련이 되겠어요?”
이준은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몬스터가 픽하고 쓰러졌다.
기절이 아닌 즉살.
이준이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블랙급 몬스터가 죽어 나갔다.
그의 말처럼 훈련도 되지 않았다.
이건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러니 내공을 금제하고 순수한 힘만으로 몬스터와 싸우라는 말이니라.]
이준은 무극자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부터 들었던 의심이 증폭된 상황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에요.”
[무엇이 말이냐.]
“사부님이 나타나자마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을 계승한 각성자가 능력을 잃었단 말이죠.”
[…그런데?]
무극자는 순간 뜨끔했다.
수염을 만지며 은근슬쩍 고개를 돌렸다.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
참고로 무극자는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고금제일인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겠나.
“제 생각에는 말이죠. 이 일련의 사건이 사부님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
[가아아아알!]
“억!”
이준이 손으로 귀를 막았다.
무극자의 일갈이 그의 골을 울렸다.
자연경에 오른 이준이지만 여전히 무극자의 일갈은 버티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무극자는 탈신경의 경지에 있는 신선.
또한 이준의 옆에 나타나기 전 신선계의 지고한 위치인 신선제에 오른 이였다.
이준이 강하다고는 하나.
무극자 앞에선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또… 왜요…?”
[빌어먹을 제자 놈이 사부를 상대로 불손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상하잖아요. 사부님이 친절히 옆에서 쫑알쫑알하는 게 더 의심을 만든다고요.”
무극자는 굉장한 실속파.
그리고 멋에 살고 멋에 죽는 위인이었다.
평소 무극자 사부라면 멋에 있어서 최고봉인 무공, 무극군림보를 사용하라고 보챘을 터.
한데 훈련이란 명목으로 내공 금제를 제안하는 게 아닌가.
전혀 훈련되지 않은 몬스터를 상대로 말이다.
너무 이상했다.
무극자를 잘 아는 이준으로서는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사부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게 아닌가.
“제가 볼 때는 사부님이 신선계에서 깽판을 쳐서 신선들이 앓아누운 게 아닐까 해요.”
[…….]
“사부님이 제게 능력을 주신 것처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신선들도 각성자들에게 힘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란 추측을 해 봅니다. 고로 이건 사부님 때문에 일어난 참사라는 거죠.”
무극자가 다시 한번 뜨끔했다.
‘귀신 같은 놈. 고자 같은 제자가 이런 눈치는 참 빠르구나.’
여자한테는 젬병인 제자.
평생을 홀로 살아가도 누구의 원망을 하지 못할 만큼 눈치가 없는 놈이었다.
한데 다른 걸로는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천재 뺨치는 머리 회전 속도.
자신을 잘 아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단서조차 없는.
그저 추측으로만 돌출한 결론이 굉장히 정확했다.
“사부님 저한테는 사실대로 말해 보세요. 신선계에서 쫓겨날 때 신선들 죄다 두들겨 팼죠?”
[제자야.]
“네. 전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
[너에게만 특별히 말해 주겠느니라.]
“제 생각이 맞았나 보네요.”
[이 사부는 신선계에서 지고한 위치에 올랐느니라. 고금제일인을 넘는 자리이지.]
“네?”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무극자가 말을 이었다.
[네게 고금제일인의 자리를 물려줄 때가 왔구나.]
“일부러 화제를 돌리시는 거죠?”
[앞으로 네가 고금제일인이 되거라. 이 사부는 더 높은 곳인 신선제의 자리에서 널 지켜보겠느니라.]
“신선제요? 사부님의 새로운 이명이에요?”
두 사제는 서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항상 이랬다.
두 사람 다 투 머치 토커.
자기가 생각한 말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그런 타입이었다.
[사부는 신선계의 왕인 신선제가 되어 네 옆에 왔느니라.]
“…….”
정적.
이준은 크게 뜬 눈으로 무극자의 영혼을 보았다.
무극자는 어깨를 한껏 편 채 기다란 수염을 매만졌다.
젊은 모습이 아닌, 이준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의 모습.
정말 신선을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로웠다.
무극자의 몸에서 뿜어지는 찬란한 빛까지 더해지니.
한층 더 신선처럼 보였다.
그때 정적을 깬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눼눼. 그러시겠죠. 제가 신선계에 안 가 봤다고 그런 거짓말을 치시다니. 사부님께 정말 실망입니다.”
이준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신선제가 됐다면 자기 옆으로 왜 오겠나.
사부 말에 의하면 신선계는 무릉도원.
굳이 인계, 자신의 옆에 올 필요 없이 거기서 편하게 생활하며 무위도식하지 않을까.
이준의 시원찮은 반응에 무극자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기대했던 반응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이 빌어먹을 망종 같으니라고! 오냐. 내 오늘 네 해이해진 정신머리를 싹 고쳐 줄 것이니라!]
무극자가 하얀 도복의 소매를 걷으며 이준에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