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부 3화
“이노오오옴! 감히 그 자리가 어디라고 너 따위가 함부로 앉는단 말이냐!”
무극자의 태도에 대노를 한 사람.
검은 도포를 입은 노인.
공동선이었다.
그는 무극자를 극도로 싫어했다.
인계에 있을 적 파천혈신으로 인해 사문인 공동파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
상승의 무학을 익힌 공동의 고수가 모두 파천혈신에게 한 줌의 혈수로 변하자.
더는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상승의 무학이 실전되니 공동의 부활은 요원했다.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뿐.
예전 찬란했던 영광은 과거의 망령일 뿐이었다.
“또 너인가? 지겹지도 않은가 보군. 그렇게 처맞고도 정신을 못 차려, 쯧쯧.”
무극자는 신선제의 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공동선을 내려다보았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헉!”
공동선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검회색의 아지랑이가 가시가 되어 공동선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다.
“이것도 반응하지 못하면서 꼴에 고위 신선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건가? 너희보다 내 제자가 더 강하겠다.”
인간과 우화등선한 신선을 비교하는 무극자였다.
신선들에게는 크나큰 모독.
그들은 수치로 얼굴을 붉혔다.
가시 모양의 아지랑이가 목젖에 닿았으나 공동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심해서 생긴 결과라 생각했다.
결단코 무극자가 강해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절대 여기지 않았다.
서걱-
공동선이 어느새 무형검을 빼 들어 아지랑이를 갈랐다.
“선계혈겁 이후 네놈만 강해진 게 아니다!”
그는 무극자를 향해 쇄도했다.
공동파가 잃어버렸던 천뢰복마신공을 극성으로 펼쳤다.
그의 하얗던 무형검이 붉게 물들었다.
복마검법.
사마외도의 무공에는 극상성을 지닌 검법이었다.
특히 마기를 지닌 자가 이 검에 조금이라도 스친다면 곧바로 치명상을 당할 만큼 상성을 지녔다.
마인과 상성을 지닌 무공이기에 자신 있게 펼친 것이다.
“지루해.”
무극자가 삐딱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오른쪽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무거운 호수 물이 하늘 위로 솟구친 게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그 호수 물이 공동선의 복마검을 틀어막았다.
그그그극!
마치 철벽을 긁는 것처럼 요란한 금속음이 들렸다.
무형검이 자르지 못한 건 없는데 고체도 아닌 액체인 호수 물에 의해 막혔다.
호수 물에 무형검이 막힌 것도 서러운데 물을 뚫고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와 공동선의 목을 와락 움켜쥐었다.
“컥!”
무극자의 손에 공동선의 목이 붙잡히자.
“파천혈신, 공동선을 놓아라!”
“이건 선을 넘었다.”
“이 이상하면 더는 우리도 간과할 수 없다!”
무극자에게 적대적인 신선들이 단체로 일어났다.
그들은 하나 같이 무형검을 만들어 냈다.
무극자에게 노골적인 살기를 드러낸 이들.
신선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살기였다.
하나 무극자에게 긴장 따위는 없었다.
도리어 그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큭. 옛날 일을 잊었나 보군. 분명 본좌 앞에서 그따위 저급한 살기는 보이지 말라 일렀거늘.”
무극자의 회안이 번쩍였다.
그뿐이었다.
그 어떤 패기도 파천멸기도 뿜어내지 않았다.
혼원신공의 내공이 눈에 집중되었을 뿐인데.
푸확-
신선경의 호수에 붉은 비가 내렸다.
“악!”
“크윽!”
무극자에게 살기를 드러낸 신선들의 몸에 큰 상처가 났다.
마치 검에 베인 듯.
가슴을 가로지르는 검상에 의해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신선들이 쓰러지자 뒤늦게 허공에 검회색의 실선들이 생겨났다.
“파천멸진….”
“이젠 기척조차 내지 않아.”
“저자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있기나 하단 말인가.”
이곳에 있는 신선들은 최상위급 신선들.
인계 무림의 경지로는 자연경에 든 이들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일곱이나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압했다.
아니, 저 정도면 의지에 따라 죽이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미치도록 무섭구나.”
“어찌 저런 자가 제자의 손에 죽었단 말인지.”
신선들은 믿기지 않았다.
파천혈신은 신살자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
굉장히 불안한 존재였다.
마신지체도 아니고 역천마신지체.
그를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천살성을 타고난 자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파천혈신만큼 강해야지만 가능한 일.
그 때문에 뇌후 연아린은 파천혈신이 신선계로 오자 확신한 것이다.
파천혈신이 일부러 제자에게 죽어 줬다는 사실을.
‘주경아의 일은 어찌한단 말이냐.’
주경아는 신선경에 오르지 못했다.
인계에서 강하긴 했지만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무엇보다 자살.
자살은 죄업이었다.
우화등선한다 해도 모자랄 판국에 자살을 하면 큰 죄를 받는다.
다만, 신계에서는 주경아를 예외로 삼았다.
신살자의 운명을 타고난 자를 제어할 역할.
오직 그녀뿐이라 여기고 4대 신계에선 주경아가 신선경에 오르는 걸 허락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고위 신선들이 이를 반대한 것.
신선계의 규칙을 무시한 채 신선경에 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그들의 반대로 신선계에는 들었으나 신선경 안으로는 가지 못했던 그녀였다.
4대 신계에서 이를 결정했으니 그녀를 신경 쓰는 게 마땅할 터.
4대 신계는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천계와 마계는 1차 신마대전이 일어났고.
지옥계에선 구천옥의 죄인들끼리 살육을 벌였다.
신선계에는 신선제의 자리가 공석.
신계의 각 왕들은 이를 해결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녀를 신경 쓰지 못했다.
이때 일이 벌어졌다.
신선계의 강은 지옥으로 이어진 길.
만약 강에 떨어지면 지옥계의 구천옥에 발을 들이게 되는 것이다.
고위 신선들.
특히 여신선들은 자격도 안 된 주경아가 신선계에 올라왔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4대 신계의 특혜를 받은 인간 여자.
여신선들은 주경아를 주기적으로 괴롭히다가 그만 실수하고 말았다.
주경아를 신선계의 강에 밀어 버린 것이다.
그녀를 구해야 했지만 신선계의 강은 그 무시무시한 구천옥과 연결된 통로.
자칫 지옥계로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실수라도 신선계의 강을 통해 구천옥으로 가면 신선이란 직위를 박탈당하는 터라.
여신선들은 그녀를 놔두고 신선경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후 주경아가 사라진 걸 안 신선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녀는 신살자의 운명을 타고난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자.
그런 그녀가 신선계에서 사라지니 비상이 떨어진 것이다.
신선들은 그녀를 쥐잡듯 샅샅이 찾아다녔으나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을 벌인 여신선들은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생각보다 일이 커졌으니까.
고작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최상위급 신선들이 직접 움직였다.
이를 보고 깨달았다.
주경아가 신선계의 강에 빠졌다는 걸 실토했다간 여신선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건 물론, 신선계의 옥에 갇힐 수 있다는걸.
그녀들의 함구에 결국 주경아는 찾지 못했다.
사건이 흐지부지해질 무렵.
지옥계의 염라대왕이 신선계로 연락을 해 왔다.
구천옥에 왜 주경아가 있냐고.
그냥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대노를 했다.
‘왜 하필 구천옥에 떨어져서… 그곳은 정상이던 이도 광인으로 만드는 곳인데.’
연아린도 구천옥이 어떤지는 소문으로만 들었다.
인계의 죄를 씻지 못한 영혼들만 모여 있는 곳.
지옥계의 감옥이면서 동시에 환생조차 못 하게 영혼을 지우는 장소가 바로 구천옥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게 다인 공간.
정상적인 이성을 지닌 자도 살육과 광기만을 지니게 했다.
구천옥에서 최상위 포식자들만이 유일하게 이성을 지니게 됐다.
그만큼 강한 걸 증명한 이들이니까.
아무튼 이곳에서 죽으면 삶은 영영 끝이었다.
죄를 씻고 환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주경아가 이곳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신계에 끔찍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순 없어.’
대체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걸까.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지금도 봐라.
파천혈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신선의 모습이 어떤가.
처참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상태.
한 마리 벌레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최상위급 신선에 위치한 자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지 않을까.
신선계가 파천혈신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그는 모든 전력을 보이지 않았어. 인계에서 보였던 무력에 일부분일 뿐이야.’
다른 신선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실이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괴물.
신도 죽일 수 있는 신살자가 바로 파천혈신이었다.
그가 오만한 눈으로 신선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본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이준에게 다정하게 말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살이 에일 듯한 살기와 함께 그의 몸에서 패기가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신선들이 있는 호수를 가득 메운 검회색의 실선들.
그들의 대답 여하에 따라 저 실선들이 빛을 발할 것이다.
* * *
그 무렵.
지옥계의 구천옥.
불빛 한점 없는 동굴에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진정한 마주여. 파천혈신이 신선계에 올랐다 하나이다.”
파천혈신이란 단어가 나오자.
동굴 한 곳에서 두 개의 붉은 빛이 번쩍였다.
눈동자에는 증오가 가득했으며 종래엔 분노로 이글거렸다.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신선들의 반응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름 끼친 분노를 보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맑은 음성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파천혈신과 충돌할 것 같습니다.”
남자가 대답하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났다.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남자의 곁으로 다가왔다.
서서히 실루엣이 보이는 여자.
검은 그림자가 모두 벗겨지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보였다.
청순한 얼굴과는 달리, 굉장히 차가운 표정.
마치 감정을 잃은 사람 같았다.
그녀가 어두컴컴한 동굴을 나왔다.
수하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럼 지옥계로 올 가능성은?”
“십으로 보고 있나이다.”
“파천혈신 설극이 이곳에 온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비치는 증오가 더욱 커졌다.
파천혈신은 지옥계의 염라대왕만이 관심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구천옥의 아홉 절대자 또한 그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아이들을 미리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다른 파는 파천혈신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나이다.”
“잘됐어. 그에게 전부 죽으면 나야 좋지.”
그녀의 말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팔주는 쉽게 죽을 리 없을 텐데…. 마주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걸까.’
파천혈신이 강하다는 건 안다.
하나 이곳 구천옥 안에서만큼은 아홉의 주인이 더욱더 강했다.
여긴 죄인들 이외의 인간이 들어오면 제약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른 신계의 이들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구천옥이었다.
“우린 그가 파멸하기만을 기다리면 돼. 그때 그자의 목을 취해도 늦지 않아.”
여자의 눈이 붉게 번들거렸다.
얼마나 증오가 깊은지.
주변이 한기로 가득했다.
그녀는 증오가 서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암지대.
죽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화기로 인해 살아가는 것조차 힘든 곳이다.
거기다가 이성을 붙잡는 것조차 힘든 장소.
이런 곳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냈다.
인계의 시간과 신계의 시간은 다르다.
신계의 시간이 수백 배는 훨씬 빠르게 흐른다.
파천혈신이 그녀를 찾은 시간보다.
그녀가 파천혈신을 기다린 시간이 훨씬 길었다.
시간이 흐르면 증오도 희미해질 법도 하나.
그녀의 증오는 더욱 깊어만 갔다.
“내가 반드시 그자의 심장을 도려내고 말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