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0화
“아이고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김봉팔은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 없어도 잘하고 있구만 뭘.”
이준의 등장에 모두가 안색이 좋아졌다.
파천자.
그들이 아는 건 SSS급 각성자에 세계 최상위 랭커.
대한민국의 영웅.
이것만으로도 각성자들에게 든든한 힘이 됐다.
물론 그의 등급이 SSS급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절할 테지만.
이준의 등장만으로도 전장에 활기가 돌았다.
반면 일마존을 비롯한 다른 마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정녕 천주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일마존이 이준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에게 천주는 신이었다.
인간 따위에게, 그것도 무인도 아닌 각성자에게 천주가 질 거라고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나.
파천혈신의 무공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천주 또한 파천혈신의 제자.
무공을 익힌 시간도 천주가 길었고, 경험 또한 천주가 월등했다.
그러니 천주가 각성자에게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곳에 나타난 건 천주가 아니라 이준이란 애송이였다.
“천주의 기운이 사라졌구나.”
일마존은 인정해야 했다.
저 애송이, 아니 이준이란 놈은 천주보다 더 강한 무인이라는 것을.
일마존이 싸우는 걸 멈췄다.
박혁진과 진경수, 허수는 그를 공격하지 못하고 경계만 했다.
그가 이준의 앞에 섰다.
“천주께서는 어떻게 가셨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이준은 일마존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슬픔이 가득 담겨 있는 눈.
주인이 죽었다는 걸 받아들인 눈빛이었다.
“잘 갔어요.”
일마존은 천주의 최측근.
천주가 그 누구보다 믿는 수하였다.
평생을 천주와 전장에서 함께 보낸 사이.
그래서 일마존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 주었다.
“무인답게 말인가.”
“제 최고의 무공으로 보내 주었다면 대답이 됐을까요?”
“그분의 최후 무공이겠지? 정말 고맙군. 천주께서 속이 후련하셨겠어.”
일마존이 씁쓸하게 웃었다.
주인이 죽었건만 저 홀가분한 미소는 뭐란 말인가.
이준은 일마존의 미소까지 보고 난 뒤 또 한 번의 혼란을 느꼈다.
천주에 이어 일마존까지.
왜 저런 표정과 감정을 드러낼까.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어. 찜찜하던 게 불안감으로 변하고 있단 말이야.’
일마존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또한 마지막 일을 해야겠지.”
천주를 이긴 이준과 한 공간에 있는 일마존.
남은 마존들과 천외천이 이준에게 덤벼든다 해도 그를 이기지 못할 터.
어차피 목숨을 잃을 거 제가 할 일은 소임을 다 하는 것뿐이었다.
“신마회의 무인은 폭멸공을 운용하라!”
폭주한 상태에서 폭멸공을 운용하라는 건 자살하라는 뜻.
일마존의 뜻을 알아챈 마존들이 명을 수행했다.
“신마회를 위하여!”
“신마회를 위하여!”
마존들의 몸에서 파천멸기가 폭발했다.
선천지기와 함께 파천멸기는 하늘에 떠 있는 균열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 이 불안감. 바로 저 파천멸기 때문이야.’
정확히는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는 파천멸기 때문이었다.
“파랑아, 폭발을 막아!”
[응! 나한테 맡겨.]
“흑염마조도 도와줘.”
[본좌까지 나서야 하는 건가.]
“부탁해.”
[그러지.]
파랑이와 흑염마조가 폭발하는 마존들과 천외천을 막아섰다.
파랑이는 혹한지옥을 펼쳤다.
쩌저저적-
주변에 서리가 맺히면서 온통 얼어붙었다.
흑염마조는 성화를 태웠다.
마기에는 성화만큼 강력한 게 없었다.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튀는 육편을 둘러싼 노란 불꽃.
육편이 닿을 때마다 불을 뿜어내며 나쁜 기운을 소멸시켰다.
다른 마존들과는 달리.
화르륵!
일마존의 몸에서는 흑염이 타올랐다.
“크흡!”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음에도 파천멸기를 피웠다.
일마존의 몸에서 나온 마기와 하늘에 떠 있는 균열이 연결됐다.
그러자 흑염은 일마존의 몸을 서서히 녹였다.
“신마… 회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일마존의 몸이 흑염과 같이 산화하며 균열로 빨려 들어갔다.
* * *
쿠궁!
신선계에 큰 진동이 일었다.
“음….”
“드디어.”
윤기 나는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신선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여 있는 연못 중앙.
인간계에 열린 균열이 연못에 비쳤다.
육중한 진동이 사라지고.
연꽃에 고고히 앉아 있던 한 신선이 입을 열었다.
“균열이 열렸소. 어찌 생각하시오.”
“불가능하리라 봅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오.”
“그가 보통 인간이오? 신살자에 가까운 인간이오. 그런 자를 이제 갓 무공을 배운 아기가 죽일 수 있다니… 당치도 않소.”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딱 한 명.
여자 신선만이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그 신살자가 선택한 아이예요. 무공을 배운 기간은 상태창으로 뛰어넘을 수 있어요.”
“흥. 그깟 상태창이 얼마나 중요한 거라고.”
“상태창은 천계가 인간에게 내린 능력이에요. 신에게도 대항이 가능한 힘이죠. 그걸 무시하는 건가요?”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도 파천혈신을 이길 순 없소.”
“내 생각도 그러하오. 파천혈신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잖소이까.”
“정말 뭘 모르시군요.”
“뭘 말이오.”
“파천혈신이 어떻게 차원을 넘어 계승자와 소통했는지 말이에요.”
“그자가 어디 상식이 통하는 인물이오? 하급 신선 하나를 협박해 소통했겠지.”
여자 신선이 피식 웃었다.
파천혈신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지도 몰랐다.
신선들도 파천혈신을 두려워했으니까.
“천계가 먼저 파천혈신에게 접근했어요. 무림에 있으면서도 계승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고요.”
“천계가 먼저 말이오?”
“그들이 왜?”
“천계도 우리와 같이 파천혈신을 요주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으니까요.”
“허, 우리의 힘 말고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던 천계가….”
“그러니까 천계가 그를 굳이 관찰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오.”
“마계의 악마들이 파천혈신에게 접근하려고 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헉!”
“마계까지.”
“마계의 대군주 자리가 빈 건 아시죠?”
“알다마다. 대군주 자리를 놓고 마계 칠대 가문이 신경전을 벌이지 않았소. 하지만 천계와의 전쟁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고 하던데.”
“…설마!?”
“그 설마가 맞아요. 마계의 칠대 가문은 자기 중에서 대군주를 뽑질 않고 능력 있는 자를 대군주로 만들 생각이었던 거예요.”
“맙소사!”
“그 적임자가 파천혈신이라는 말이오?”
“천살성을 타고나지 못한 역천마신지체. 이거라면 이야기가 되죠.”
오직 피만을 갈구하는 살귀의 신체가 바로 역천마신지체다.
인간이 이 신체를 타고나면 서른도 안 돼서 피에 잡아먹힌다.
하지만 파천혈신은 2세기 동안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정신력.
인간이 맞나 싶었다.
천계와 신선계가 그를 위험인물로 판단한 이유기도 했다.
“마계 종자들이 발견한 인간이 하필 파천혈신이라니.”
“천계가 그에게 관심을 둔 이유가 있었구려.”
“그러니 회의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이준이란 아이는 파천혈신이 유일하게 인정한 인간이고 상태창으로 인해 마신지체와 천살성을 얻었어요. 파천혈신과 대적할 최소한의 조건은 갖춘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소.”
“천계가 개입했다면 믿어 볼 만하지.”
파천혈신의 죽음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던 신선들이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신선계뿐만 아니라 천계와 마계도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마계는 그가 죽지 않게 하고 싶을 테고.
천계와 신선계는 오직 그의 죽음만을 바랐다.
인간으로 계속 살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자였다.
“그런데 말이외다.”
“말씀하시오.”
“파천혈신이 죽으면 어디로 가오?”
한 신선의 물음에 모두가 침묵했다.
“…….”
“…….”
“음….”
예상 밖의 난제였다.
모두가 서로 눈치를 보며 먼저 말하길 꺼려 했다.
여자 신선만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신선계에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당치 않은 소리! 파천혈신은 피를 흠뻑 뒤집은 살귀요. 이 신성한 신선계에 들다니!”
“맞소. 그 옛날 파천혈신이 우화등선하려 했을 때를 잊었소? 그때 신선계가 엉망이 됐소이다.”
신선들의 반발이 거셌다.
여자 신선이 목청을 높인 이들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신선이란 자들이 뒤끝은, 파천혈신한테 처맞아서 그가 신선계로 올라오는 걸 반대하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고고하게, 목에 힘을 주며 살아야 하는데 혈신이 올라오면 그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니 그게 싫어서 반대하는 거겠지.’
저들은 인계에서도 신선계에서도 파천혈신에게 된통 당한 경험이 있었다.
파천혈신의 파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신선들.
그가 신선계에 들면 가장 손해를 보는 이들이 바로 저 신선들이었다.
“그럼… 지옥계의 염라에게 가는 거요?”
“당연하지 않소.”
“파천혈신 같은 죄인은 팔대지옥을 맛봐야만 하오.”
“본 신선도 그리 생각하지만… 염라가 혈신을 받겠소?”
“안 받으려 하겠지. 지옥계에 있는 죄인들만으로도 벅찬데 파천혈신이 간다 하면 당장이라도 신선계로 쳐들어오려 할 테지.”
“안 받으면 자기가 어떻게 하겠소. 신계에는 규율이라는 게 있지 않소. 죄인이니 지옥계로 가야만 하오.”
신선들의 당당한 말에 여자 신선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저들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었다.
“염라 님. 신선들의 생각은 이렇답니다.”
“응?”
“지금 뭐 하는 거요?”
어리둥절해하는 신선들의 귀로 벼락같은 일갈이 들려왔다.
[머저리 같은 놈들이 신계에 들었다고 신선놀음을 하고 있단 말이냐!]
“윽.”
“억.”
“여, 염라?”
[그래. 지옥의 염라대왕이다! 감히 파천혈신을 지옥계로 들이려 하다니 네놈들이 정녕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렷다!]
“여, 염라. 우리 말 좀 들어 보시오.”
[염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반말을 지껄여? 내가 너희보다 신계의 급수가 높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염라대왕의 노성에 신선들은 자라목이 되었다.
무어라 변명하려 했으나 그들의 귀에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파천혈신이 지옥에 들면 신계가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모른단 말이냐! 안 그래도 죄인들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는 지옥을 쑥대밭으로 만들 작정을 하고 있구나.]
팔대지옥을 겪은 죄인들은 이후 구천옥이라는 곳으로 보내진다.
오로지 죄인들끼리 있는 공간.
그쪽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게 가능했다.
단, 구천옥에서 죽으면 환생조차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천옥의 하루는 그 어떤 곳보다 치열했다.
무림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무림에서 악명이 높았던 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 툭하면 살수를 보였다.
구천옥에 수감된 죄인들은 특별관리 대상.
그들의 눈에 파천혈신이 들어온다면 안 봐도 뻔했다.
[만에 하나 파천혈신이 지옥계로 와서 구천옥의 죄인들이 도망이라도 치는 날엔 너희 신선들이 직접 잡아내야 할 것이다.]
염라대왕이 으름장을 내놓고는 사라졌다.
신선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염라대왕까지 파천혈신을 받지 않겠다고 하니 그들로선 굉장히 난감했다.
“어쩔 수 없이 저희 신선계에서 파천혈신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음….”
여자 신선의 말에 다른 신선들은 그저 신음만을 내었다.
파천혈신을 신선계에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다고 지옥계로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으니까.
* * *
일마존을 비롯한 신마회가 전부 산화했다.
동시에 하늘의 균열도 커졌다.
파지직-
불길한 기운이 몰아친다.
파천멸기를 머금은 균열이 요동치며 대기를 혼란스럽게 했다.
콰르릉!
천둥 번개가 쳤다.
전투에 승리해서 좋을 법도 한데.
“이 불길한 징조는 뭐란 말인가.”
검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이 번쩍였다.
세상을 집어삼키는 빛이었다.
이준을 포함한 모두의 눈을 멀게 만든 불빛.
하얗던 시야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 저길 보십시오!”
“사, 사람?”
균열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