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1화
“왔느냐.”
백발 괴인의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에는 천하를 손에 쥔, 군림자의 위엄이 담겨 있었다.
다만, 아쉬운 건 감정이 일체 배제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인지 마주하는 이들은 그를 대하기 어려워했다.
이곳에 들어온 중년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롯이 천하를 내려다보던 행동은 어디 가고 백발 괴인의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모습이었다.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벌써… 균열이 열렸더…냐.”
“예.”
중년인이 대답하자 잠시 조용해졌다.
계속된 침묵.
한참이 지나고서야 침묵이 깨졌다.
“…생각보다 빨리 열리고 있…구나.”
백발 괴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작은 미소가 어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속에는 기쁨, 반가움,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중년인이 속으로 놀라 했다.
‘사부님이 감정을 드러내셨다. 100년을 넘게 봐 왔음에도 저런 미소를 보지 못했는데.’
저 감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따스함이 있었기에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감정을 억제해야 했다.
조금의 흐트러짐만으로 사부는 자신의 기분을 알아차리시니까.
중년인은 화를 누르며 그동안 못했던 말을 했다.
“사부님.”
“말하…라.”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금지에 계신 지 무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그 족쇄를 풀고 밖으로 나오셔…!”
중년인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거센 바람.
그 바람은 살기가 되어 중년인을 조여왔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면서 목과 이마에 힘줄이 툭 튀어 올라왔다.
“금고를… 하고 있음에도 너는 본좌의 기 하나 제… 대로 막지 못하고 있지 않… 느냐. 이 상태로 밖으로 나가라는… 말인가.”
백발 괴인의 말이 끝나고서야.
“허억… 허억!”
중년인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백발 괴인이 손과 발목에 차고 있는 건 금고라는 신물.
내공을 봉인하는 기능을 가졌다.
그 어떤 무지막지한 내공을 지닌 무인도 금고를 차면 일반인이 된다.
하나만 차도 그럴진대, 백발 괴인은 무려 다섯 개를 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발 괴인의 내공을 전부 금하지 못했다.
신물조차도 어쩌지 못한 인물.
백발 괴인은 전 무림인이 두려워하는 파천혈신이란 이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계의 신선조차 마주치길 꺼려 하는 무인.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있는 고금제일인이었다.
“너는… 본좌가 시킨 일이나 잘… 하거라. 알겠… 느냐.”
“예 허억허억… 사부… 님.”
“가 보…거라.”
파천혈신의 메마른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동굴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떨구었다.
중년인은 파천혈신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제자, 진무열. 마지막으로 사부님께 절을 올립니다.”
구배지례를 끝낸 진무열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금지에서 나갔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혼자 남은 파천혈신.
그가 조금 전에 보였던 미소를 다시 지었다.
‘나의 제자 준아.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이 사부를 이길 수 있느니라.’
천주가 무림을 떠난다는 건 그만큼 이준이 강해졌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신을 죽일 힘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신을 죽여야 했다.
‘흉살이 골수까지 차올라 이 사부가 더는 버틸 수 없구나. 준이 네가 나를 막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 소중한 것들을 다 잃을지 모르니라.’
그래야만 모든 세상이 평화로워질 테니까.
* * *
벨렌 로레스의 거처에 있는 푸른 등불 꽃의 효과는 좋았다.
혼돈의 나무가 사라지진 않았으나 스페인 전역에 난 균열을 조금씩 없애 갔다.
소량의 재료만 사용한 것치고는 효과가 괜찮았다.
물론 문제를 아예 해결한 건 아니었다.
“주군, 미국에도 혼돈의 나무가 피었다고 합니다.”
“벌써 세 그루째네.”
이준과 무극단, 그리고 각국에서 지원 나온 각성자들이 힘을 합쳐 균열을 없앤 지 한 달.
그 사이 미국과 러시아에 혼돈의 나무가 나타난 것이다.
다행인 건 혼돈의 나무가 나타났을 뿐.
스페인처럼 대규모의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그저 자연의 생명을 야금야금 먹는 게 다였다.
‘칠죄종의 부재로 마계는 싸울 수 없는 상태야. 이곳에 나타났던 선발대가 균열 점령을 선포했다면 말이 달라졌을 건데, 수문장인 페데리아가 죽는 바람에 마계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처했어.’
페데리아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칠죄종의 부재로 대외에 관한 건 페데리아가 모두 맡았다.
그런데 인간계에서 죽고 말았으니.
악마들로선 비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혼돈의 나무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놔둔 것이다.
인간계에 혼돈의 나무를 보내려면 엄청난 악마력이 필요했으니까.
다시 거둬 가는 건 악마들로서 큰 손해였다.
그래서 그냥 둔 것이다.
‘차라리 잘 된 거야.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나무가 미리 나타났으니 대응이 가능해.’
혼돈의 나무가 나타나면 그 즉시 수많은 게이트와 함께 카오스 몬스터가 쏟아진다.
스페인처럼 카오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거니.
이미 생긴 뒤에 대응하려고 하면 늦는다.
하지만 지금은 게이트가 열리지도, 카오스 몬스터가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사 대주. 혼돈의 나무가 나타나면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달해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꼭 결계를 치면 주변에 푸른 등불 꽃을 최대한 많이 심든가 그 액체라도 많이 뿌리라고 해.”
“예.”
“벨렌.”
“응?”
“너를 대신해서 앞으로 내세울 사람 있어?”
“그건 왜?”
“스페인도 안정되어 가니 난 빠지려고. 언제까지 내가 다 해결할 수 없잖아? 이곳을 이끌 사람이 필요해.”
스페인은 현재 무정부 상태였다.
카오스 몬스터로 인해 거의 모든 가문이 몰락한 상황.
소속이 없는 각성자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을 이끌 구심점이 필요했다.
“난 앞으로 나설 생각이 없는데.”
“스페인을 이대로 둘 거야? 벨렌의 나라잖아.”
“사람들이 몬스터에게 위협을 받아서 나타난 것뿐, 나라를 구하려고 싸웠던 게 아니야.”
벨렌 로레스는 스페인에 대한 마음이 크지 않았다.
스페인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던 로레스 가문이 멸문할 때 스페인은 뭘 했던가.
그토록 나라를 위해 희생했지만 돌아온 건 무관심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로레스에 대한 건 싹 잊고 자기네만 잘살기 바빴다.
그래서 벨렌은 스페인에 대한 애정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면 이대로 그냥 지켜만 봐?”
“안정이 되면 다른 나라를 돌아볼 생각이었어.”
벨렌 로레스는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여자였다.
그러니 암흑대제란 사실도 로레스 가문이란 사실도 숨겼겠지.
이 두 사실만 밝혀도 그녀는 스페인의 정점에 설 터.
어쩌면 여왕으로 추대되지 않을까.
하나 그건 그녀가 거절할 것이다.
“벨렌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어.”
“그런데 이준.”
“응?”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며칠 더 지켜보고 돌아가야지.”
“나도 따라가도 돼?”
“벨렌이?”
“한국도 구경하고 네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고 싶어.”
“나중에 한국 오면 구경시켜 줄게. 지금은 할 일이 많아.”
“아, 천외천을 상대해야 한다고 했지. 잊고 있었어.”
서양은 천외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벨렌도 마찬가지였다.
이준에게 천외천에 대해서 듣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들의 위험을 몰랐으리라.
벨렌은 아쉬운 표정을 했다.
예전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이준을 따라 한국에 갔을 텐데.
혼돈의 나무가 나타나고 천외천이 곧 활동을 시작한다고 하니.
이준을 귀찮게 할 수 없었다.
“그래 알았어.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그때 놀러 갈게.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그 전에 연락해.”
벨렌 로레스는 이준에게 주먹만 한 구슬을 주었다.
마법 통신구.
전파가 끊겼을 때를 대비한 비상 연락용 장치.
이 통신구는 게이트 내에서도 바깥과 연락이 가능한 물건이었다.
“고마워 벨렌.”
이준이 마법 통신구를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에 벨렌 로레스가 다시 한번 멍을 때렸다.
“아.”
이준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저 상태로 늙어도 잘 생겼을 거라 생각한 그녀였다.
* * *
평화로웠던 시대는 지나갔다.
전 세계가 공황에 빠졌다.
혼돈의 나무로 인한 패닉이었다.
처음에는 스페인에서 그다음에는 러시아에서 그다음은 미국에서.
혼돈의 나무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조사관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세계수와는 정반대의 힘을 가진 나무라고.
세계수가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을 지녔다면.
혼돈의 나무는 생명을 파멸로 이끄는 능력을 지녔다고 말이다.
조사관들의 말에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이러다 정말 지구가 멸망하는 게 아니냐며.
서양인들은 혼돈의 나무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안감에 삶이 점점 피폐해져 갈 무렵.
딱 한 나라만 평화로웠다.
그곳은 바로 한국이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
이준과 무극단은 귀국하자마자 훈련에 돌입했다.
모든 대외 활동도 끊었다.
이준은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마기의 냄새가 짙어질수록.
자신의 부족함이 느껴질수록.
불안했다.
혼돈의 나무가 안 나타난 곳은 한 곳뿐이었다.
“중국에 혼돈의 나무가 나타나면 동시에 천주도 이곳으로 오게 될 거야.”
확신했다.
중국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기가 혼원신공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이준은 중국이 있는 방향을 보고 있는 사이.
김봉팔이 중얼거렸다.
“주군께서 요즘 부쩍 멍하니 계시네.”
“형님이 속을 끓여서 그렇지 않소.”
“야야. 장난칠 상황이 아니야. 주군께서 언제 저렇게 진지하신 적 있냐?”
“조금 다르긴 하오.”
“저러니까 겁나 불안하다.”
“형님의 똥 촉이 이럴 때는 잘 맞는데.”
“천주가 얼마나 강하면 저러실까요.”
무극단이 수련은 안 하고 잡담하고 있자 사형준이 소리쳤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훈련해서 주군의 걱정을 덜어 드릴 생각을 해.”
매일 투덜대던 김봉팔이 요번만은 고분고분했다.
그도 이준에 대한 일이라면 진지해지는 사람이었다.
“맞는 말이오. 이럴 게 아니라 약 빨고 수련해야겠어.”
김봉팔은 이의태가 만든 보약을 한사발 들이키고는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다른 인원들도 이에 질세라 몸을 움직였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날 무렵.
낙성각 앞 연무장에서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던 이준이 눈을 번쩍 떴다.
“혼돈의 나무가 나타났어!”
중국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강력한 마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멀리 있음에도 피부가 따끔거렸다.
“혼원신공의 내기가 날 뛰는 걸 보면 천주 대사형이 나타나겠어.”
생각했던 날짜보다 훨씬 빠르게 모습을 보이려 한다.
“얼마나 강하려나.”
천주의 실력이 예상 가지 않았다.
인주와 지주는 그럭저럭 이겼으나 천주는 요령만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가주님!”
때마침 정보를 담당하는 백호각 각주 송선형이 급하게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송선형이 이준의 앞에 멈추더니 곧바로 보고를 했다.
“허억, 가주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중국에 혼돈의 나무가 솟았습니다.”
“어느 쪽인가요?”
“신장 위구르 쪽입니다.”
“역시.”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다.
기에 누군가가 잡히는지.
혼원신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던 그때!
이준의 기감에 누군가가 잡혔다.
서서히 드러나는 존재감.
짙고 어두운 마기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 대사형….”
천주로 추측되는 인물의 기가 온전히 드러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