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0화
[스페인에 거대한 나무가 솟았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연의 생명을 빨아들인다.]
[강력한 마기를 뿜어내며 균열을 일으킨다.]
전 세계의 이목이 스페인 마드리드를 주목하고 있었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나무에 전 국가가 긴장했다.
자국이라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그래서일까.
각국에서 각성자를 차출해 스페인으로 보냈다.
혼돈의 나무를 직접 보기 위해.
그리고 엉망이 된 스페인을 돕기 위해.
유럽 각성자들이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반응은 똑같았다.
“헉!”
“맙소사!”
“생지옥이… 따로 없어.”
몬스터의 시체가 혼돈의 나무로 가는 길목에 널려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밖으로 나왔는지.
추측이 안 될 정도였다.
“이런 광경은… 처음 봐.”
“나도….”
각국에서 파견 나온 각성자는 모두 배테랑이었다.
전장의 경험이 무수한 인원.
하지만 그들도 이렇게 많이 죽어 있는 몬스터 떼는 처음 보았다.
“베, 베히모!”
“다크 웜도 있어!”
“악케라니!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가 얼마나 많이 나왔다는 거야….”
각성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이 말한 몬스터는 모두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
일반 블랙급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와도 나라가 피폐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하고 흉포한 카오스 몬스터가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하루가 안 돼서 나라가 망한다.
그만큼 카오스 몬스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레드급 카오스 몬스터도 일반 블랙급 몬스터를 도륙하는 무력을 지녔는데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는 오죽할까.
스페인이 안 망한 것 자체가 미스터리였다.
“이,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좋을 지도.”
“언제 다시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올지 몰라….”
유럽 연맹의 각성자들은 전장의 결과를 본 것만으로도 공포에 빠졌다.
경험 많은 각성자라 그들이 본 광경이 얼마나 생지옥이었을지.
상상이 갔으니까.
그때 한 각성자가 용기 있게 입을 열었다.
“파천자가 스페인을 구했다고 하니 괜찮지 않을까요?”
“그, 그런가?”
그들도 파천자의 이야기는 들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귀가 따갑게 들었던 소리였다.
파천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오스 몬스터를 전부 처리했다는 말이었다.
“과장이 심하다고 치부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니.”
“들은 바로는 파천자와 무극단으로 막았다는데 믿기지 않습니다.”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는 SS급 초입 각성자도 상대하기 힘겨워한다면서요.”
그들이 아는 상식선에는 그랬다.
SS급 초입.
요즘에서야 드물게 나타나는 등급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SS급 초입에 든 각성자는 전무했다.
그런 초월 등급의 각성자도 상대하기 힘든 게 블랙급 카오스 몬스터였다.
그러니 지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이 쉬이 믿기지 않는 것이다.
시체가 된 몬스터를 죽이려면 적어도 SS급 초입 이상의 등급을 가져야 했으니까.
“후우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
“상황은 종료됐다고 하니 우선 파천자에게 합류하죠.”
“그럽시다.”
유럽 연맹 각성자들은 두려움을 뒤로 하고 혼돈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많던 카오스 몬스터의 시체는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공기 중에 떠도는 짙고 강한 마기가 증명해 줬다.
이곳에 얼마나 강한 카오스 몬스터가 많았는지를.
그들은 마력으로 몸을 보호한 채 혼돈의 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파천자를 볼 수 있었다.
스무 살도 안 된 각성자.
SSS급을 찍었다는 소식 이후에는 정보를 알 수 없었던 인물.
유럽 연맹 각성자들은 이준을 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공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일반인 같은데.’
‘저 청년이 동양 최고의 각성자라고?’
‘너무 평범해.’
그들의 생각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이준의 몸에서는 그 어떤 기운조차 흐르지 않았다.
마력에 감지된 기운은 아예 없었다.
기운을 갈무리한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특유의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나.
위압감이나 위화감 같은 그런 종류 말이다.
한데 이준에게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유럽 연맹 각성자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디 소속입니까?”
그들의 앞에 거대한 덩치를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이 이준에게서 원하던 모습을 이 남자가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는 남자였다.
“도, 독일의 검독수리 기사단입니다.”
“저흰 영국의 금색 여우 전단….”
“이탈리아 황혼의 여명의….”
그들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사형준이었다.
압도적인 분위기에 나라를 대표하는 각성자들이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했다.
이에 사형준 또한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전 사신가의 무극단주 사형준이라 합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김봉팔이 삐딱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상황 끝나니까 도와주러 오는 건 무슨 심보래? 몬스터 몇 마리 치우고 나서 생색내는 건 아니겠지?”
정중한 사형준과는 달리 김봉팔의 태도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싸가지 없는 말투.
품위 없는 행동.
꼭 동네 양아치의 모습이었다.
“부단주.”
“뭐요. 내 말이 맞지 않소. 주군께서 카오스 몬스터를 다 해치우고서야 저들이 나타났는데 좋게 보이겠소?”
김봉팔이 게슴츠레 눈을 뜬 채 노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사형준이 대표들에게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부단주가 예민해져 있는 모양입니다.”
“아, 아닙니다.”
“저렇게 행동할 만… 합니다.”
대표들이 손사래를 쳤다.
사형준도 대단한 각성자라 생각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양아치처럼 행동하는 부단주라는 사람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사 단주 못지않은 각성자다!’
‘저렇게 강한 각성자가 같은 부대에 있다니.’
‘말도 안 된다! 능히 한 단체를 이끌 만한 인물이 어찌 부단주로 있단 말인가.’
그들은 김봉팔을 보곤 기겁했지만,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김봉팔뿐만 아니라 무극단 전체가 괴물이었다.
‘이런 막강한 부대를 데리고 다니는 파천자는….’
유럽 연맹 대표들은 떨리는 눈동자로 이준을 보아야만 했다.
* * *
벨렌 로레스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몸은 헐렁한 로브로 전신을 가렸다.
유럽 연맹 대표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위장한 거다.
이러고 있으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무도 모를 만했다.
“이준.”
“…….”
“이준!”
“응?”
“말하다 말고 왜 그래?”
“게이트가 커졌어.”
“어디 게이트?”
“중국 쪽에 있는 게이트… 아마도 혼돈의 나무와 카오스 몬스터의 영향인 것 같아.”
“네가 우려하는 그들 말이지.”
“맞아. 완전히 열린 건 아니지만 시일이 앞당겨졌어.”
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벨렌 로레스에게도 그의 긴장이 역력히 보였다.
그 많던 몬스터를 쓸어버린 절대자가 보이는 긴장감이라니.
대체 어떤 자이기에 저러는 걸까.
그녀의 궁금증을 알기라도 하는지.
이준은 천주에 대해서 말했다.
“최고위급 악마 봤지?”
“봤지. 살 떨리게 강했어.”
“그런 놈들 백 명이 와도 천주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해.”
“그 정도로 강해!?”
“내 예상이야. 직접 봐야 알 것 같지만.”
회귀 전에 봤던 천주는 강했다.
하나, 무공을 얻고 천주를 이길 수 있다 여겼다.
그를 봤을 때보다 자신이 더 강해졌으니까.
그런데 회귀 후에 봤던 천외천은 과거에 봤던 이들이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등급도 과거보다 두, 세 단계 높았다.
자신이 강해진 만큼 그들 또한 강해져 있었던 것.
그렇다는 건 천주 대사형도 다른 천외천과 마찬가지란 소리 아닌가.
전생에도 악마와 같은 능력을 지녔는데 현생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 왔다.
‘무극자 사부님은 칭찬을 잘 하지 않아. 그런데 천주 대사형은 천재라고 하셨지. 자신을 죽인 제자를 향해. 그건 극찬이야.’
무극자 사부가 제일 걱정한 건 천주 사형과 자신의 경험 차이였다.
안 그래도 각성자는 싸움의 경험이 많이 없었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목숨을 내놓고 하는 싸움은 손에 꼽혔다.
반면 무림인인 천주 대사형은 어떤가.
어렸을 때부터 갖은 시련과 고난을 줬다고 무극자 사부가 말했다.
심지어 무림은 하루가 멀다 하고 피 냄새가 풍겼다고 하니.
자신과 천주 대사형의 경험 차이가 나는 건 당연했다.
과연 지금은 이 차이를 메꿀 수 있을까?
답은 아니었다.
‘지금은 온전히 압도적인 무공과 내공으로 찍어 누르고 있을 뿐이야. 천주 대사형에게는 안 통할지도 몰라.’
이준이 제일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했고 무극자 사부가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정 안 되면 드래곤 하트라도 먹고 싸워야지.’
마력을 만들어 주는 드래곤의 심장.
이준은 최후의 보루를 가지고 있었다.
여태 안 먹은 이유기도 했다.
천주 대사형을 보고 난 후 드래곤 하트를 먹을지 말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드래곤 하트는 마력을 만들어 주기에 내공과 부딪힐지 모른다.
미리 먹었다가 탈이 나는 것보다 천주 대사형을 보고 먹는 게 나았다.
드래곤 하트를 먹으면 일시적으로 마력의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드래곤의 힘이 몸에 자리 잡는 건 그 이후의 문제였다.
천주 대사형이 드래곤 하트를 먹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의 결과는 모르지만, 단기적으로는 폭발적인 힘을 자랑했다.
그 때문에 미리 먹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악마보다 강하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널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나도 처음에는 벨렌처럼 생각했는데 강한 사람이 있더라고. 그것도 두 명이나.”
한 명은 무극자 사부였다.
선계의 신선들도 우화등선을 거부한 사람.
사부의 말로는 화딱지가 나서 선계의 신선을 묵사발로 만들었다나.
허언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진짜 같았다.
무극자 사부의 성격을 보면 깽판을 치고도 남았으니까.
“두 명? 누구?”
“한 사람은 천주고, 다른 한 사람은 있어. 천주보다 더한 분이.”
긴장해 있던 이준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피었다.
벨렌 로레스는 그를 보더니 주위가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멍을 때리는 그녀.
이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박정연과 한지유는 이걸 이준 효과라고 불렀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으, 응?”
“너무 뚫어지게 보길래.”
“내, 내가?”
“응.”
“그, 그냥 네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다른 이상한 마음은 없어.”
그녀가 당황해했다.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나보다 어린 애한테 무슨 생각을! 벨렌 정신 차려. 넌 연하 안 좋아하잖아! 잠깐 분위기에 휩쓸린 거야.’
그녀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저 분위기에 휩쓸린 거라고.
저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지니고 있어 안쓰러워 그런 거라고 말이다.
* * *
거대하게 넓은 대전.
중년인이 권좌에 앉아 권태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버님. 운기입니다.”
“들어오라.”
대전의 문이 열리고 권좌에 몸을 기댄 중년인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역천진에 다섯 개의 불이 켜졌습니다.”
중년인이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생각했던 시기보다 앞당겨졌구나.”
“곧 역천진이 발동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드디어 때가 온 건가.”
권태로웠던 표정은 어디 가고 얼굴에 생기가 넘쳐나는 중년인이었다.
그가 권좌에서 일어나 대전을 나가려 했다.
“어디 가시는지요?”
“가 볼 곳이 있다.”
“소자가 따르겠습니다.”
“됐다. 혼자 행동할 것이다.”
중년인은 그 말을 남기고 신마회를 벗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신마회와 조금 떨어져 있는 절벽이었다.
절벽의 이름은 낙신곡.
신이 이곳에서 죽었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아래로 쭉 떨어지는 신형.
어느 순간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더니 절벽 중간의 난간에 섰다.
그곳에는 사람 한 명 들어갈 정도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과는 달리 거대할 정도로 큰 공동이 보였다.
공동 벽에는 만년한철로 만든 철문이 있었다.
중년인이 그 철문으로 다가가 내공을 주입하자.
그그긍-
철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주했다.
두 팔과 다리, 목에 쇠사슬이 묶여 있는 한 사람을.
중년인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부님.”
흑룡포를 입은 중년인의 입에서 사부란 소리가 나오자 치렁치렁한 백발을 한 괴인이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긴 머리 사이로 지독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