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4화
‘날 알아채다니.’
그림자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한국에 괴물이 살고 있었어.’
적에게 발각되는 건 그림자의 계획에 없었으나.
상대는 상상 이상의 괴물.
여기서 빠져나가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뜻밖의 수확이야.’
패룡이 죽은 건 아까웠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꽤 지원을 해서 키운 각성자.
성마회가 아시아를 정복하는 데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할 거라고 기대했다.
이휘가 귀국하고서는 그 계획대로 진행됐다.
저 이준이라는 괴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패룡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자신의 상관도 패룡이 죽을 줄은 몰랐을 거다.
‘이대로 귀환한다.’
그림자의 움직임은 은밀하고 빨랐다.
살막의 막주를 가뿐히 능가하는 속도였다.
그림자도 자신이 빠르다는 걸 아는지.
이준에게 발각됐으나 당황해하지 않았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 그림자의 생각일 뿐이었다.
“어어…!?”
그림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치 블랙홀로 빨려가는 듯.
무언가 뒤에서 강하게 끌어당겼다.
마나를 사용해서 저항했지만 달리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안, 돼애애!”
그림자는 중심을 완전히 잃었다.
몸이 뒤로 쑥 빨려 들어가더니 누군가의 손에 목덜미가 잡혔다.
그리고 들려오는 고저 없는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구냐.”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내가 알아내면 되니까.”
이준이 남자의 혈을 눌렀다.
“푸우웁!”
그러자 남자의 입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다.
“끄으어어어…!”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신음했다.
이준이 그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저 고통만 느껴질 거야. 내기가 네 몸을 헤집는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테니 빨리 입을 여는 게 좋을 거야.”
“끄으으으….”
이준의 말에도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는 고문에 잘 견딜 수 있게 훈련받은 암살자였다.
평범한 고문으로는 남자의 입을 열 수 없었다.
하나 고문자는 이준.
그의 고문술은 무극자에게 배운 것이다.
죽든가 입을 열게 되든가 둘 중 하나.
이준이 손을 쓴 이상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이제 시작되겠어.”
이준의 말에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피부가 동상이라도 걸린 듯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추, 추워어어.”
남자가 덜덜 떨며 몸을 웅크렸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런 남자의 몸을 이준이 발로 몸을 툭툭 건드렸다.
“끄아아아악!”
그저 발끝으로 건드렸을 뿐인데 남자가 괴성을 질렀다.
칼로 살을 도려 내는 듯한 고통이었다.
“이걸로 엄살은.”
시간이 흐르자 파랗게 질렸던 남자의 혈색이 돌아왔다.
아니, 전과는 반대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헉!”
방금 전 극한의 한기를 느꼈다면 이번에는 극한의 고온을 맛봐야 했다.
남자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땀이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다른 지옥을 연달아 맛보자 남자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했다.
“마, 말 하겠다아아. 이, 이것 좀!”
이준이 남자의 몸에 내기를 주입했다.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온 남자는 그 어떤 때보다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진작 말했으면 고통을 느낄 일도 없었을 텐데. 멍청하긴.”
“…….”
“아까 했던 질문에 대답해.”
“…난 프랑스 마법 학회 소속이다.”
“이휘와는 관계가 어떻게 되지?”
“같은 상관을 모시고 있다.”
“상관이 누군데.”
“…….”
“말 안 해?”
“베네로딕 님을 모시고 있다.”
“불멸의 마법사?”
이준은 베네로딕의 이명을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나.
이준이 죽기 며칠 전에 나타난 서양의 영웅이었다.
그전까지는 암흑대제나 성결기사가 가장 유명했다.
“네가 어떻게 베네로딕 님의 이명을, 억!”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무도 당황해서 실수한 표정이었다.
불멸의 마법사란 이명은 프랑스 마법 학회, 성마회에서도 몇몇만 아는 극비였다.
그런데 이 먼 한국에서 불멸의 마법사란 이명을 들으니.
남자도 당황해서 헛말이 나온 것이다.
“이휘가 불멸의 마법사 밑에 있었다는 게 재밌네.”
이준이 남자를 보며 웃었다.
불멸의 마법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휘의 몸에 있던 역겨운 흑마력.
이걸 얻게 해 준 게 베네로딕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흑마력은 인간의 생명을 흡수해서 힘으로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금지된 마법.
공인된 자로서 사용하면 안 되는 금서였다.
“네가 이곳에 온 건 이휘의 동향을 베네로딕에게 보고하는 거겠지? 이휘보다 강한 네가 도와주지 않은 걸 보면 이휘는 그냥 장기 말일 뿐이지?”
남자의 눈이 커졌다.
정확했다.
이휘가 SS급 각성자이긴 하나.
성마회의 힘이면 시간은 들겠지만 다른 SS급 각성자를 만들 수도 있었다.
성마회의 수장인 베네로딕은 무궁무진한 힘을 가진 마법사였으니까.
그래서 별로 아깝게 여기진 않았다.
그 점을 파천자는 정확히 꼬집었다.
“이휘를 통해서 사신가를 꿀꺽 삼키려 했던 건가? 먹으면 그만, 못 먹으면 조금 더 준비해서 다시 수작을 부리면 된다고 생각했을 테지?”
“그건….”
“네 표정을 보니 맞네. 어째 음흉한 새끼들 천지네.”
천외천도 음흉한 편에 속했지만, 불멸의 마법사라는 베네로딕도 만만치 않게 음흉해 보였다.
하는 짓이 천외천과 다름없지 않나.
서로 뭉쳐서 천외천에 대항하기도 빠듯한데 남의 가문을 통째로 먹으려 했으니 말이다.
“경고를 줘야겠지?”
이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남자의 몸에 무극기를 주입했다.
“내, 내게 뭘 한 거야?”
“베네로딕한테 가서 전해. 경고는 이번 한 번뿐이라고 만약 또다시 이런 짓거리를 벌인다면 천외천이고 나발이고 너부터 죽여 버린다고 말이야.”
“내가 그런 말을 베네로딕 님께 전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거냐.”
“암살자라도 목숨은 아까울 텐데 그래서 내게 베네로딕이란 이름을 입에 올린 거 아니야? 아니면 내가 프랑스 마법 학회를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남자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말이었다.
남자는 이준에게 프랑스 마법 학회의 이름을 올리면 그가 어느 정도 물러날 거라 여겼다.
프랑스 마법 학회는 유럽의 정점에 있는 단체 중 한 곳이었으니까.
파천자라 해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양과 동양의 국력은 천지 차이.
한 가문이 아니라 나라를 생각한다면 신중히 행동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름을 들먹였는데 이준에게는 무엇도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작은 정보로 여러 상황을 유추해 냈다.
생각보다 똑똑한 것도 놀랐지만 행동에 있어서 그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쉽게 말해 노빠꾸.
오로지 앞만 보고 전진하는 불도저 같았다.
“살려 줄 때 가라. 널 그냥 보내 주는 건 베네로딕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야.”
“우리와 척을 진 걸 나중에 후회하지 마.”
“알았으니까 가라고.”
남자가 이준의 눈치를 보다가 사신가를 떠났다.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 재밌는 선물을 보냈거든. 이걸 눈치 못 채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놈이고 눈치챈다면 꽤나 당황할 거야.”
이준이 사형준을 뒤로 하고 김봉팔에게 갔다.
“봉팔아. 넌 어째 맨날 누구한테 맞아서 누워 있냐.”
“끄응… 농담할 상황이 아닙니다 주군. 저 아파 뒤질 것 같아요….”
“엄살은. 아직 수련이 부족해서야. 백호한테서 뭘 배운 거지? 넌 그동안 뭐 했냐.”
이준이 고개를 돌려 빈 허공을 보았다.
몸을 숨기고 있던 백호가 은신을 풀었다.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게만 만들어 준다고 약속했다.]
“저게 사람 구실을 하는 걸로 보여?”
[음… 못 한 것 같군.]
“…상대가 강한 걸 어떻게 합니까 끙.”
“사신수도 별거 아니네. 약속 하나 제대로 못 지키고.”
[저놈이 약한 것뿐이다. 저 아이는 달라.]
백호가 사형준을 가리켰다.
백호의 말대로 사형준은 확실한 성장을 이루었다.
딱 봐도 SS급 초입을 넘어선 상태.
조금만 더 수련하면 완숙에 접어들지도 모른다.
“저…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시면 안 됩니까? 저 죽어 가고 있는데요.”
“각주님, 봉팔이 입은 바늘로 못 꿰맵니까?”
“실로 묶어도 자기가 알아서 풀어 버리고 떠들 놈입니다.”
“저 면상 좀 치워 주세요. 맨날 당하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미네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부대주를 동의각으로 치우게.”
이의태의 명령에 동의각원들이 김봉팔을 들것에 실었다.
“너무합니다. 주군…. 제가 주군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십니까 전 언제나… 읍!”
김봉팔이 울상을 지으며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다 죽어 가면서도 쉬지 않는 입.
이의태가 그의 입을 막지 않았다면 계속 떠들었을 거다.
“좀 닥치시게.”
“으으읍!”
그로 인해 경직된 분위기가 많이 풀렸다.
가주로서 이준을 존경하고 신뢰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대하는 게 껄끄러워진 상태였다.
이준의 달라진 분위기는 가솔들이라도 살이 떨려 왔으니까.
* * *
성마회의 마탑.
최상층에서는 로브를 입은 중년인이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허공에 펼쳐진 수많은 마법 수식들.
황금색으로 물든 수식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베네로딕 님. 검은 늑대가 공간 이동 마법을 요청했습니다.]
안경을 쓴 남자.
베네로딕이 있는 공간에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승인한다.”
그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끌어 올리면서 허공에 있는 마법 수식을 회수했다.
손에 옹기종이 모인 마법 수식.
그가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하나 꺼내 펼쳤다.
비어 있는 페이지에 마법 수식을 기입했다.
빈 페이지가 글자로 꽉 채워지자 책을 원래대로 다시 쏟아 넣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루실. 무슨 일인가.”
루실은 검은 늑대.
이휘의 동향을 파악하라고 성마회에서 파견한 어쌔신이었다.
“패룡이 당했습니다.”
베네로딕이 평온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누구에게?”
“파천자와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파천자란 이명이 나오자 베네로딕이 관심을 가졌다.
파천자는 동양의 최고 각성자였다.
세계 랭킹 3위의 무력은 SS급 각성자를 상대로 얼마나 먹혔는지 궁금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땠나?”
“패룡이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했습니다.”
“그래도 랭킹 3위에 있는 각성자라… 잠깐!”
이준에 대해서 말하던 베네로딕이 루실을 보며 화들짝 놀라했다.
“왜 그러시는지?”
“자네 이리 가까이 좀 와 보게.”
루실이 베네로딕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까지 오면서 몸에 이상을 못 느꼈나.”
“네. 무슨 일이라도?”
“자네 몸에 이상한 기운이 있네.”
“아! 파천자가 제 몸에 이상한 짓을 하면서 베네로딕 님께 경고를 보냈습니다.”
루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상관인 베네로딕에게 이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그였다.
“말해 보게.”
“그게….”
“괜찮네.”
“경고는 이번 한 번뿐이랍니다. 지금과 같은 짓을 벌인다면 천외천이고 뭐고 베네로딕 님부터….”
“죽이겠다던가?”
“예….”
“자네의 몸에 깃든 기운은 나에 대한 도발이군. 어디 자세히 보세. 파천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판단해 보겠네.”
베네로딕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루실의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기운이 어떻게 각성자에게!?”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자도 우리와 같이 각성자의 몸에서 눈을 뜬 것인가? 아니면 후예?’
루실의 몸에 있는 기운은 그가 과거에 잠깐 만났던 사람의 것이었다.
서쪽 대륙.
미지의 땅에 존재했던.
인간을 뛰어넘은 괴물의 것.
그곳의 황제조차 두려워했던 절대자의 기가 루실의 몸에 맴돌고 있었다.
‘확실히 알아봐야겠어. 파천자가 그라면… 아직은 맞닥뜨리면 안 돼. 대륙 칠좌가 완전히 눈을 뜨지 않은 이상은 그 괴물을 이길 수 없어.’
베네로딕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루실의 몸에 깃든 기운은 황제, 기사, 마탑주, 용족 등으로 이루어진 그란투스 대륙의 절대자들을 좌절시킨 인간.
파천혈신이라 불린 괴물이 가진 기운과 매우 흡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