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화
포항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로 가는 구간은 안전했다.
해저에 게이트가 열려 있긴 했지만 배가 지나가는 구간이 아니었다.
만약 몬스터가 각성자의 내공 냄새를 맡았다고 치자.
굳이 이 먼 곳까지 헤엄쳐서 각성자를 공격할까.
몬스터는 피에 굶주려 있을 뿐이지.
특별히 각성자를 좋아하진 않았다.
차라리 바다 생물을 먹으면서 균열을 넓히는 게 이득이었다.
무엇보다 해양 몬스터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드물기도 했고 말이다.
“왔다.”
이준은 모습을 보인 거대 해양 몬스터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몬스터의 이름은 크라킹.
문어가 몬스터화 한 거라고 보면된다.
등급은 레드급.
전투 종족인 샤크로아보다는 못하나.
크라킹도 꽤 강했다.
녀석은 이준을 발견하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얼어붙은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다른 애들은 안 와?”
크라킹이 눈알을 굴렸다.
뭔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곧이어 녀석과 비슷한 덩치의 크라킹이 나왔다.
네 마리의 문어 몬스터.
그것들은 배를 둘러싸고 위협을 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에피타이저 정도는 되겠구만.”
이준은 녀석들을 일부러 불러냈다.
바다 깊숙한 곳에 있던 놈들을 위협해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한 것이다.
자기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는데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배길 수가 있나.
상대가 안 된다면 굴복하는 게 몬스터의 습성이었다.
“난 공격 안 할 테니까 이 배를 부숴 봐. 제대로 안 하면 문어 회로 만들어 버릴 거다.”
이준의 협박에 네 마리의 크라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문어 다리가 배를 부술 듯 감쌌다.
이준은 고개를 돌려 박정연과 한지유에게 말했다.
“몬스터가 나타났으면 바로 움직여야지. 늦으면 배 부서진다?”
이준의 수작에 박정연과 한지유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네가 배 앞머리에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지?”
이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더는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 박정연과 한지유가 움직였다.
두 사람이 검을 뽑아 각자의 검법을 펼쳤다.
박정연은 뇌신검법.
한지유는 복마제령검식을.
그녀들의 검에서 수십 가닥의 검기가 뿜어졌다.
서걱!
크라킹의 다리를 자르고 수면 위를 강타하는 검기들.
배를 감고 있는 다리는 아예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다.
박정연은 검기를 날린 후 다음 목표물을 향해 접근했다.
극성으로 펼쳐진 뇌운보.
눈 깜짝할 사이에 배 뒤편에 나타난 박정연이었다.
그녀가 검기를 날리려는 순간!
“언니, 멈춰야 해요!”
한지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박정연이 내기를 거두었다.
“다리를 자를수록 더 많은 촉수가 생겨나고 있어요.”
수십 개의 문어 다리가 어느새 백 개 이상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귀찮은 레드급 몬스터잖아?”
이준이 괜히 크라킹을 부른 게 아닌 듯.
박정연과 한지유는 난감해했다.
다리를 자르면 더 많은 촉수가 생긴다.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노릇.
가만히 구경만 하다가는 배가 위험했다.
‘크라킹의 약점을 찾을 수 있으려나.’
이준이 부른 이 크라킹은 핵이 없었다.
몸통을 자르고 눈을 파도 재생하는 몬스터.
마치 아메바가 세포 분열을 하는 것과 똑같았다.
굉장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가 바로 저 크라킹이었다.
촉수가 많아질수록 강해지는 녀석들.
무턱대고 칼질하면 도리어 낭패를 볼 것이다.
크라킹의 거대한 다리가 위로 솟으며 배를 향해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이건 잘라야 해!”
박정연의 외침에 허수가 대신 대답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허수의 참마도에 내공이 가득 깃들었다.
그가 펼치려는 도법은 용살도.
도에 붉은 기운이 미친 듯이 몰려드는 것을 보아하니 강맹한 도법이었다.
그의 참마도가 크라킹의 거대한 다리를 갈랐다.
단번에 두 조각으로 나누어지더니.
파스스.
바다에 떨어지기 전 다리가 모래처럼 부서지면서 공기 중으로 증발했다.
다행히 배를 침몰시키려는 촉수는 없앴으나 그렇다고 위험이 해소된 건 아니었다.
“내가 재생도 못 하게 아예 소멸시켜 볼게.”
박정연의 검이 번쩍였다.
휘두른 모습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쾌검술.
뇌기가 짧은 찰나에 거대해졌다가 이내 모습을 감췄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박정연이 목표로 하던 크라킹이 허물어졌다.
아니, 몸의 형태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켰다.
뇌신검법의 1식 뇌격.
SS급에 오르자 무공의 위력이 차원이 달라졌다.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몬스터를 처치했다.
“저렇게까지 했는데 재생하는 건 아니겠지?”
정예나가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무슨 몬스터가 저따위야!”
“상당히 위험한 놈들인 것 같습니다.”
퍽-
크라킹의 다리가 배를 후려쳤다.
수백 개의 촉수가 있는지라 큰 공격은 막아도 작은 공격까지 다 막긴 힘들었다.
“배가 단단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물고기 밥이 됐을지도 몰라.”
“인정. ”
“입만 나불대지 말고 너도 도와!”
박정연이 진경수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예나랑 이야기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
박정연과 눈을 마주친 진경수가 움찔했다.
“아, 알았어.”
대답을 마친 진경수도 크라킹을 향해 쇄도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특별 1반 전원이 촉수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크라킹을 죽일 방법을 찾을 때까지 버텨야 해. 다른 애들도 불러와.”
“제가 데려올게요!”
한지유의 말에 홍원찬이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박정연은 검을 휘두르면서 누군가를 찾았다.
“혁진이는 어딨어?”
특별 1반 모두가 이곳에 있었는데 박혁진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 * *
“어억!”
“뭐, 뭐야?”
배 안에 있는 학생들이 흔들리는 배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쾅!
또다시 충돌이 일어났다.
배가 격하게 흔들리자 벽에 부딪힌 학생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각자 자유 시간을 즐기고 있던 학생들이었기에 충격에 대비하지 못했다.
“모두 내공으로 중심을 잡아!”
뒤늦게 나온 특별반 선생들이 학생들을 살폈다.
“차, 창밖을 봐!”
“촉수?”
“저게 뭔데?”
연이어 일어난 충격에 촉수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박혁진이 학생들의 의문을 풀어 줬다.
“크라킹이야.”
“크, 크라킹?”
“해양 거대 몬스터 말입니까?”
“준이가 또 일을 벌였나 보다.”
“그건… 무슨 말인가요?”
“이 안전한 항로에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이상하잖아. 분명 준이가 몬스터를 불렀을 거야.”
“서,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요.”
“바다에서의 싸움은 육지보다 배는 더 힘들지 않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스스로 몬스터를 부르지는….”
학생 모두가 부정했다.
혼자서 배를 타고 울릉도로 가는 게 아니었다.
전교생이 같이 가는 증이었다.
이준 혼자 배를 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설마 전교생이 타고 가는 배를 향해 몬스터를 불렀을까.
“너희가 준이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 걔는 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
“그래도….”
학생들이 의아해하고 있는 사이.
홍원찬이 갑판 위에서 내려왔다.
“크라킹과 싸울 수 있는 선배님은 모두 위로 올라오셔야 할 것 같아요. 특별반 선생님도 도움을 주셨으면 해요.”
그에게 청운 스님이 물었다.
“특별 1반의 전력으로도 버거운 건가요?”
“네. 죽여도 끝이 없어요.”
“크라킹이 얼마나 많기에.”
“빨리 움직여 주세요!”
“특별반 학생들은 전투 준비를 하세요.”
청운 스님과 특별반 선생들은 특별반 학생들을 데리고 올라갔다.
일반 학생 중 B급 이상의 각성자도 포함시켰다.
“나도 올라가 봐야겠어.”
박혁진도 뒤늦게 갑판 위로 갔다.
어마어마한 양의 촉수가 배를 뒤덮고 있었다.
“와. 뭐냐. 이거.”
박혁진이 자신을 공격해 오는 촉수를 검으로 잘랐다.
그런데 그 촉수가 분열하는 게 아닌가.
두 개도 아닌 세, 네 개의 촉수가 됐다.
“박혁진! 이제 나오면 어떡해!”
박정연이 버럭 소리쳤다.
“이럴 줄 몰랐지. 누나가 있어도 해결이 안 돼?”
“일반 크라킹이 아닌 것 같아.”
“무슨 말이야 그게.”
“크라킹이 아메바처럼 분열을 잘한다지만 무한으로는 하지 못해. 그런데 이놈들은 거의 무한으로 분열하고 있어.”
“하아?”
“해결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배를 보호해. 무턱대고 벨 생각하지 말고.”
“알았어.”
박혁진의 눈에 푸른 빛이 어렸다.
뇌신공을 끌어 올려서이기도 하고, 그가 특기를 발동시켜서이기도 했다.
‘왜 핵이 없지?’
박혁진은 태어나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명안으로 크라킹을 살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눈.
몬스터의 약점을 알아보는 눈이기도 했다.
‘몬스터는 저마다 핵을 가지고 있지 않나?’
블랙급 몬스터에게도 있던 핵이 크라킹에게는 없었다.
핵은 몬스터를 유지하는 힘.
사람으로 치면 심장과도 같은 기능을 했다.
‘일반 몬스터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럼 핵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핵이 아예 없는 몬스터는 없었다.
사람이 심장이 없으면 살 수 있나.
몬스터도 똑같았다.
핵이 없으면 살아 있지 못한다.
‘핵만 찾으면 간단히 해치울 수 있어.’
박혁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산책하듯 갑판 위를 여유롭게 걷는 그였다.
그때 그의 눈에 재미난 게 잡혔다.
‘저건가?’
박혁진은 갑판을 박차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 * *
그 무렵.
마벽의 세 주인이 긴급히 모였다.
마벽의 정원에는 이미 살마와 뇌마가 와 있었다.
혈마가 뒤늦게 등장했다.
눈을 시퍼렇게 뜨며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살마, 중소 가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니.”
“놈들의 회동이 잦소. 아무래도 무언가 꾸미는 것 같소.”
“제깟 놈들이 일을 꾸며 봤자지.”
혈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뇌마가 고개를 저었다.
“파천자께서 저희와 신기지가에 중소 가문의 동태를 살펴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하, 하긴. 파천자 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일인데 가볍지 않겠지. 내가 잘못 생각했어.”
혈마가 재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다.
세 사람에게 파천자는 자식들의 선생님임과 동시에 신이었다.
자신들을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 줄 인도자.
그의 말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따를 수 있었다.
“살마, 네가 얻어온 정보는 뭐야. 설마 회동이 잦다는 이유만으로 모이게 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소? 놈들이 타국과 접촉하려는 것까지 입수했소.”
“타국?”
혈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살마의 이야기를 들은 뇌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혹, 중소 가주들의 이동 경로를 아십니까?”
“강화도나 평양 쪽을 기웃거리고 있소.”
“그 멍청한 놈들이 도움을 청할 곳은 한 곳뿐이군요.”
뇌마는 자신이 생각한 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누군데?”
“천외천 아니겠습니까? ”
“그 괴물들은 파천자 님에 의해 사라지지 않았어?”
“사라진 척한 거지요. 그들이 어디서 모습을 드러냈는지 생각해 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중국!?”
“맞습니다. 자신들이 무공의 원류라 말하는 자들이니 숨어 있어도 중국 어딘가에 있지 않겠습니까?”
“뇌마의 말이 일리가 있소. 중소 가주들이 천외천과 접촉하려고 강화와 평양 쪽을 기웃거리는 거라면?”
쾅-
혈마가 동그란 원형의 테이블 위로 손을 내리쳤다.
철제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가루가 되었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제 살길을 모색한다고 천외천이란 괴물과 손을 잡으려 해?”
“우리보다 더한 놈 아니오.”
“저희도 나쁜 짓을 했지만 나라는 팔아먹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지. 그리고 우리 셋은 꽤 깨끗한 편이잖아?”
“사람을 많이 죽이긴 했지만 개중에는 나쁜 놈도 있으니… 동의하오.”
“나라 팔아먹는 게 제일 나쁜 짓거리입니다. 사람들에게 절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에요.”
마벽의 주인들이 흥분했다.
파천자가 그렇게 경고했는데 고작 기댄다는 곳이 천외천이었다.
천외천은 세상을 파멸로 몰아갈 괴물들.
힘을 합쳐 대항해도 모자란데 알아서 그들의 밑으로 기어들어 가려 한다.
“그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요.”
“뒤는 계속 밟고 있지?”
“신기지가의 비선과 살막의 흑운들이 뒤를 쫓고 있소.”
“절대 놓치면 안 돼.”
“알겠소.”
“이참에 파천자 님께 점수를 왕창 따자고. 사람들에게 매국노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도 알리면 우리 마벽의 이미지도 좋아지겠어.”
“국민들도 천외천이라면 치를 떠니 굉장히 좋은 기회라 생각됩니다.”
혈마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마벽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아직까지 사마련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일본 대균열에 참가해서 이미지를 많이 챙겼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그냥 우리가 직접 움직일까?”
이참에 아예 사마련의 꼬리표를 뗄 기회.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끝낸다면 사마련 출신이란 오명을 완전히 벗을 수 있었다.
“흑운들을 믿어 보시지요.”
“살마, 애들한테 단단히 일러 놔. 놓치면 안 된다고 말이야.”
“내가 직접 키운 애들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살마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서도 그 안에 살기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아서인지.
혈마가 은근슬쩍 살마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무슨 좋은 일 있냐? 묘하게 들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