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0화
“남 비서, 방금 이 선생님의 말 들었어?”
“기초 체력 훈련 과목이라고….”
남 비서도 의아한 목소리였다.
“정말 기초 체력 훈련 과목을 맡으실 생각입니까?”
“네. 문제 있을까요?”
“그, 그게 아니라 선생님이시라면 조금 더 고차원의 과목을 하실 줄 알고….”
기초 체력 훈련을 무시하는 한민성을 보고 이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A급 각성자인 그도 기초 체력 훈련을 낮게 생각하는데 학생들은 오죽할까.
무극자 사부를 만나기 전, 자신도 한민성처럼 생각했다.
“이 사장님. 기초 체력 훈련은 각성자에게는 필수예요. 각성자들은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 기초 체력 훈련을 등한시하는데 이게 부족하면 상승의 경지에 오를 수 없어요.”
검만 종일 휘두른다고 체력이 오르지 않는다.
아니, 체력은 오르겠지.
다만 성장의 한계가 분명했다.
체력은 신체와 같이 성장해야 했다.
신체는 내공을 담을 그릇.
그 그릇의 모양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가 중요했다.
신체와 체력의 동일 성장은 필수.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기초 단련이 최고였다.
“이사장 님도 기초가 안돼서 A급에 머물고 있는 거예요.”
이준은 팩트로 한민성을 폭행했다.
한민성의 실력이 오르지 않은 건 훈련을 등한시하기도 했지만 기초 체력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는 탓이기도 했다.
“그, 그런 겁니까?”
“과목이 생기면 제가 했던 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 하. 제가 굉장히 실례되는 말을 했군요.”
“무튼 전 기초 체력 훈련을 맡을 테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무림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초였다.
각성자에게는 이 기초가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각성자 시스템이 강하게 해 주는데 굳이 힘들게 수련할 필요가 있나.
무극자 사부는 이 사실을 바로 눈치챘기에 이준을 각성자가 아닌, 무림인으로 키웠다.
한 단계 높은 등급의 각성자를 상대할 때 SSS급 무공의 도움이 컸으나 이를 받쳐 주는 건 기초 단련이었다.
이미 천외천과의 싸움에서 그들에게 체력적으로 밀리지 않는 게 증명됐으니까.
“그리고 중소가문의 동태는 어떤가요?”
“잠잠합니다. 그건 왜 확인해보라고 하신 겁니까?”
“권력의 중심에 있다가 나락간 이들이에요. 어떻게든 바득바득 다시 위로 올라오려고 하겠죠. 오대가문에게 버려졌으니 자신들을 보호해줄 다른 단체를 찾을 거예요.”
“아.”
한민성은 손을 탁, 쳤다.
처음에는 이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문연맹회의 힘은 오대가문에서 나왔다.
막말로 이외의 가문은 오대가문에 기생하는 이들.
오대가문이 없으면 그들의 막강한 권력도 없었다.
그랬기에 중소가문의 동향을 파악하라는 이준의 말에 의문이 생겼다.
“그들이 혹시 천외천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까 생각하신 거군요.”
“미끼라고 해두죠.”
지금보니 이준은 중소가문을 이용해 천외천에게 낚아 올릴 계획이었다.
‘뒤통수를 칠 불씨로 적을 끄집어 낸다라… 몇 수를 내다보는 거지?’
한민성은 자신도 꽤 머리를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준의 앞에서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똥줄이 탈테니 곧 움직일 거예요.”
“비선에서 확인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이준이 고개를 숙이고는 류가을의 훈련을 계속 진행했다.
조용석 또한 언제든지 이준을 기습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다.
특별 1반의 특이한 훈련 방식.
한민성은 학생들을 눈여겨보다가 이사장실로 돌아갔다.
***
이준의 말대로 중소가문의 가주들은 어느 지하 밀실에 모여있었다.
“이제 어쩝니까.”
“살길을 모색해야지 않소.”
“이러다가 다 죽을 판국입니다.”
“연합도 깨져 각자도생인데 저희는 혼자 자생할 능력이 안 됩니다. 게이트를 관리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해요.”
“우리도 마찬가지요.”
“걱정만할게 아니라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가주들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게이트가 그들의 목을 조여왔다.
자신들이 관리하던 게이트를 버리고 뒤로 물러난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가문의 운영은 물론, 있던 재산까지 전부 거덜 나게 될 상황.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해결책이 딱 하고 나오겠습니까? 지금 저희를 향한 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이에나 취급하고 있소.”
쾅!
한 가주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우리에게 길 때는 언제고, 버러지 같은 놈들!”
“행동반경이 제한돼, 더는 버틸 재간이 없소.”
여론의 시선 탓인지.
중소가문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이게 다 파천자 때문이오.”
“애초에 우릴 버리고 마벽을 택할 생각이었던 겁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오대가문을 위해 얼마나 일해왔는데!”
“미꾸라지가 들어와서 아주 제대로 흙탕물을 일으켰습니다.”
가주들은 똥 씹은 표정을 했다.
이준만 아니었더라면.
신력권가의 가주에 계속 권왕이 앉아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오. 다 죽게 생겼는데.”
“너무 분하지 않소.”
“사람들이 우릴 아주 쓰레기로 보고 있습니다. 내 아내는 자주 가던 백화점도 못 가고 있어 제게 얼마나 화를 내는지 아십니까.”
“여 가주도 그렇소? 나도 마찬가지요.”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혼하겠답니다.”
“환장할 노릇이군.”
“다들 이 난관을 타게 할 방법이 정녕 없소?”
가주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아아.”
“역시 모여도 방법이 없군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
“잠깐.”
가주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백발을 한 중년인이 가주들을 불러세웠다.
“내게 방법이 있소만.”
가주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구원의 목소리.
그들이 눈을 반짝이며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백발의 중년인을 향해 물었다.
“방법이 뭐요 백 가주.”
백발의 중년인, 백씨세가의 가주가 결연 눈으로 그들을 차례차례 보았다.
“살고 싶소?”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대로 있다간 가문이 쫄딱 망할 거요.”
“망하기만 할 뿐이오? 우린 대한민국에 발도 붙이지 못할 거요.”
그동안 해처먹은 짓을 생각하면 국민 재판이 안 열리는 게 다행이었다.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목적으로 세금은 기본이요, 거주지, 음식값까지 오대가문 모르게 통제해왔다.
제 발이 저린 것.
그들은 사마련과 다름없었다.
“대신 약속해야 할 것이 있소.”
“뭡니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소.”
“그건 말이오…”
백 가주의 입이 열렸다.
그의 말을 들은 가주들은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가주들의 신음은 더해져만 갔다.
백 가주의 말이 끝나자.
“나와 같이하겠소?”
가주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르겠소.”
가주들의 결정에 백가주의 입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
특별 1반의 수련은 점점 강도가 올라갔다.
더 이상 올라갈 난이도가 있을까 할 정도였지만, 그 위에 더 높은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혁진이랑 정연 누나는 그래도 사방환진에 버티네.”
처음 환영진에 들어간 것치고는 잘 대응했다.
확실히 SS급, 현경 초입의 각성자라 그런지 사방환진의 생문을 금방 찾았다.
그럼에도 진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는 사방환진의 효과 때문.
사방환진은 자연재해가 몰려오는 진법이다.
여러 속성을 겪을 수 있는 진이라 수련하기엔 정말 좋았다.
“잘만하면 진법도 깨고 나오겠는데?”
두 사람이면 가능성이 있었다.
남매는 진법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유로워졌다.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자 이제는 진법을 부수려고까지 했다.
“저 두 사람은 다른 훈련을 생각해야겠다. 뭐가 좋으려나.”
이준은 싱글벙글했다.
오랜만에 두 사람을 굴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어떤 훈련을 시킬지 생각하면서 두 사람에게 시선을 거뒀다.
이준이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류가을.
그녀가 연습하는 건 아수라파천공이 아닌, 소림의 백보신권이었다.
성질이 정반대인 무공.
이준이 시켰기에 류가을은 군말하지 않고 백보신권을 연마했다.
백보신권을 왜 배워야하는지 파천자에게 의문을 가지는 건 실례였으니까.
하나 권법을 수련할수록 류가을의 마음에는 의심이 싹텄다.
참다못한 그녀가 수련을 멈추고 이준에게 물었다.
“선생님.”
“묻지 마.”
“이유를 알려 주셨으면 해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다짜고짜 백보신권을 수련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요.”
“이유를 알면 네 특성을 개화하는게 더 힘들어질 텐데?”
이준은 아이들의 특성을 개화하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상대의 특성을 개화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자기가 특성이 생길 거라는 걸 알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려 할 터.
그렇게 되면 특성의 개화는 늦어진다.
특성을 제일 빠르게 개화시켰을 때가 바로 학생들이 수련에 빠졌을 때였다.
그런데 특성을 얻게 될 거라는 걸 미리 알려 주면 어떻게 될까.
개화하는 게 늦어질 거다.
류가을도 전에 특성을 얻은 적이 있었다.
이것도 이준이 개화해준 것.
일반 특성은 무아지경의 상태가 필요없는 반면, 특별 특성은 조건이 까다로웠다.
차원이 다른 어려움.
최대한 빨리 금강권문의 계승자를 얻게 하려면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지게 해야 했다.
한데 그 이유를 알려 주면 무아지경 상태로 수련에 임할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려서 집중을 못 할 거다.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대자니 굳이? 란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냥 무작정 백보신권을 배우라고 한 거다.
“그래도 가르쳐 주세요. 아버지도 제게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라고 하셨지만… 의문이 생겨서 집중이 안 돼요. 제가 왜 AA급 무공인 백보신권을 익혀야 하나요?”
“정말 이유를 알려 줘?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네.”
“너한테 금강권문의 무공을 잇게 할 거야.”
“금강권문이요?”
류가을이 눈을 깜빡였다.
금강권문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혈마가 아무런 이야기도 안 한 모양.
애들한테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약속을 지킨 것 같았다.
“중국 무공이 아닌, 한국 고유의 무공이니까 그렇게만 알아 둬.”
한국의 전 각성자는 중국의 무공을 계승했다.
한국의 무공을 계승한 사람은 전무.
최근 들어서 이준이 아이들의 특성을 개화해 준 덕분에 한국 무공이 늘어났을 뿐.
그전에는 한 명도 계승한 사람이 없었다.
“제가요?”
“그래. 금강권문은 네가 익힌 아수라파천공과 같은 계열이야. 백보신권은 금강권문의 무공을 얻기 위한 기본 수련이고.”
“아수라파천공은 사기와 혈기로 이루어진 무공인데.”
이준이 무극자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류가을이었다.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해.”
아수라파천공이 불기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그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대 가문과 마벽의 회동 때도 설명했는데 앵무새처럼 또 말하기 귀찮았으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류가을의 미모에 홀려 친절히 설명해 줄 법도 하나.
이준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손을 휘저었다.
그의 태도에 류가을은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도 남자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사마고에선 모든 이들의 우상.
특히 남자들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사마고뿐인가.
일반인들에게도 그녀는 검화, 빙화와 더불어 최고의 인기인.
연예인으로 치면 탑 중의 탑스타였다.
그런 그녀도 이준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멍하니 뭐해, 어서 권법 안 펼쳐?”
“예? 네!”
그녀가 이를 갈며 백보신권을 펼쳤다.
이준의 태도에 오기가 발동했다.
하지만 곧이어 이준의 호통이 들려왔다.
“그럴 줄 알았다. 내기가 흔들리잖아. 집중 똑바로 안 해?”
“네!”
류가을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이준에 대한 오기와 더불어 흥분이 됐다.
정씨 자매와 같은 서열의 무공을 얻게 된다고 하니.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것이다.
이준은 이마를 찌푸렸다.
예상했던 결과.
류가을의 특성 개방은 꽤 오래 걸릴 것 같아 시선을 돌렸다.
“용석아. 뭐 하냐. 언제까지 나무에 숨어서 기회만 볼 거야. 그러다가 늙어 죽을 때까지 나무에 숨어만 있겠다.”
“…….”
“너 알아서 해라.”
이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용석은 기습할 기회만 노렸다.
오직 기회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