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2화
사혈림 무인들의 몸이 기괴하게 꺾였다.
비파 소리에 맞춰 여기저기서 파육음이 났다.
강시, 몬스터 가릴 것 없이 죽어 나갔다.
탈령존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하필 요화의 무공이라니! 은서단의 무공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 않았나.”
“분명 확인을 끝냈습니다.”
“낭패야. 요화의 무공은 강시에 유독 강한데.”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주께서도 피해를 보실까 우려됩니다.”
“이혼대법에 천마강시의 신체를 가지셨으니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으시겠지. 어서 제거하세.”
“존명!”
탈령존자를 비롯한 나머지 존자들이 은서단을 향해 쇄도했다.
그들을 본 은서단이 코웃음을 쳤다.
“이상한 껍데기나 쓴 귀기들이 어디서 본녀에게 덤빈단 말이냐!”
그녀의 비파음이 거세졌다.
“읏!”
“억!”
요화 은서단은 인주, 지주와 비견되는 강자였다.
그런데 지주의 수하들인 존자들이 자신에게 덤벼드니 가소로운 것이다.
“지옥으로 썩 꺼지지 못할까!”
따당!
아름다운 선율을 보였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아무 음이나 튕긴 것 같았다.
하나 결과는 보기와는 전혀 달랐다.
요란한 음이 주변으로 퍼지는 순간!
음이 닿은 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콰광!
존자, 사혈림 무인, 몬스터, 암사회 각성자 가릴 것 없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어떤 자는 가슴이 함몰되었고, 어떤 몬스터는 칼로 베인 듯한 상처를 입었다.
여러 종류의 공격.
권강으로 때린 자국이나.
검강으로 맨살을 그은 자국.
내가중수법으로 내부를 엉망으로 만든 상처 등 아주 다양했다.
“깔깔깔! 네깟 놈들이 나 은서단에 어찌 대항할쏘냐.”
그녀가 비파를 뜯으며 광소를 터트렸다.
요사스러운 분위기가 지주 못지않았다.
그녀는 무공을 사용할수록 예전의 무위를 되찾고 있었다.
요화 은서단의 무서운 점.
각성자의 몸을 공유함과 동시에 곧바로 생전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미야와키 칸나가 개사기 캐릭터인 이유였다.
‘이게 본녀다. 무림의 요화라 불렸던 여제 말이다. 각성자에게 겁을 집어먹었던 건 혈신의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야. 최상위에 있는 마기에 의해 공포를 느낀 것뿐이지. 암, 그렇고 말고. 본녀가 각성자 따위에게 겁을 집어먹었을 리 없…어….’
조금 전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던 이준이었다.
자기가 파천혈신이라나 뭐라나.
그녀는 믿지 않았다.
파천혈신이면 자신이 정체를 드러냈을 때 다른 태도를 보였을 터다.
그는 옛 수하들에게 공포 그 이상의 존재였으니까.
자신이 감히 반말을 지껄일 수 없는 지고한 사람이었다.
파천혈신은 아니더라도 계승자라 치부했다.
물론 이마저도 믿기 싫었지만.
파천혈신의 계승자라면 자신이 모셔야 할 주인.
죽은 이후까지도 후계자를 섬기긴 싫었다.
그런 반항기가 남아서일까.
은서단은 이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려는데.
“저, 저어어!”
너무 놀라 말을 더듬었다.
왕방울만 하게 튀어나오는 눈은 물론이요, 비파를 뜯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너무 당황해서.
* * *
촤악-
“흣!”
지주가 회색 아지랑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런데 곧이어 등 뒤를 노리는 회색 아지랑이.
그녀는 숨 돌림 틈도 없이 허리를 숙여야 했다.
“인사 잘한다.”
언제 적 개그인지.
파랑이도 이준을 무시한 채 주머니 속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이번에는 아래다. 조심해.”
무극자를 흉내 내던 이준은 어느새 자신으로 돌아갔다.
그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무공은 무극기.
의지에 따라 공격과 방어가 가능한 무공이었다.
이준이 허공을 향해 손을 아래에서 위로 올리자.
회색 아지랑이가 위로 치솟았다.
지주의 가랑이를 찢으려는 듯 날카로웠다.
“헉!”
그녀는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1초라도 늦었다면 이준의 의도대로 가랑이가 찢어졌을 터.
그녀로선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 피하기만 할 거야? 이러면 재미없잖아.”
이준은 처음으로 무극기를 제대로 사용했다.
여태까지 무극기는 호신강기용 아니면 상대를 압박하는 데 써먹었다.
공격으로도 간간이 펼치기도 했으나.
진정으로 사용한 건 처음.
이 무극기가 지주에게 얼마나 잘 통할까 의문을 가졌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지주는 현재 무극기를 방어하는 데만 급급했다.
무극기는 기의 아지랑이.
검기도, 강기도 될 수 있는 기운이었다.
이준의 손에서 무극기가 뿜어지면 상대가 반응할 법도 하지만.
무극기는 자연의 기이기도 했다.
그가 허공에 손을 긋기만 해도 무극기가 반응해서 아지랑이를 만들어 냈다.
공기가 있는 공간은 무극기의 영역.
그 어떤 무기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무극기가 극성으로 펼쳐지면 숨을 쉬는 공기까지도 제어가 가능했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호흡까지도 조절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무극기.
고금제일인인 무극자가 무극기를 하늘의 무공이라 하는 이유기도 했다.
촤악!
“큭!”
지주의 신음이 들려왔다.
피하기만 하던 지주가 무극기를 막으려다가 하얀 피부가 베인 것.
상처 부위에선 붉은 피가 올라와 옷을 물들였다.
‘이건 파천멸기가 아니야! 그 노괴가 마지막으로 창안하려 했던 미친 무공이 분명해!’
사형제가 파천혈신을 배신한 이유기도 했다.
노괴는 충분히 강한데 그보다 더한 무공을 만들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젊어지기까지 했으니.
너무도 두려웠다.
자신들은 그의 그늘 아래에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한 시대를 풍미할 무공을 가지고도 절대자의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자신들을 짓눌렀다.
결국 그들은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배신했다.
만약 저 절대적인 무공이 완성되면 전 무림이.
아니, 황궁까지 동원한다 해도 그를 죽이지 못할 테니까.
그 전에 파천혈신을 죽여야 했다.
‘결국 완성시켰어. 내가 우려했던 게 바로 이거야.’
그녀의 경지는 현경 끝자락.
그럼에도 이준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풍뢰공이란 지고무상한 무공을 지녔고, 가로막고 있는 벽만 무너트리면 이제 생사경에 오를 자신이!
괴물 같은 무공으로 인해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행인 건 무극기를 사용할 때마다 저놈의 내공도 급속도로 빠지고 있다는 거다.’
지주가 상처를 봉합하고 땅을 박찼다.
무극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기 때문.
그러면서도 이준을 눈여겨보는 건 빼놓지 않았다.
그 결과 알아낸 게 있었다.
‘저놈은 파천혈신이 아니다. 얼핏 보면 무공을 펼치는 게 완벽하게 보이지만 어설퍼. 노괴라면 절대 저런 실수는 하지 않아. 무엇보다 그는 내공이 무한이야. 100만의 황군과 신마회의 무인들을 도륙하고도 숨 한 점 흐트러짐이 없던 사람이 힘겨워 한다고? 흥. 내 눈은 못 속여.’
지주는 이준이 거짓말을 친다고 확신했다.
파천혈신의 언행은 저리 가볍지 않았으니까.
‘노괴가 아니면 내게도 승산은 있어.’
그녀가 밀리면서 생각해 낸 결론이었다.
처음에는 무극기에 당황했지만, 이성을 되찾았다.
상대가 파천혈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감이 생겼다.
적어도 당사자만 아니면 됐으니까.
‘네가 어떻게 그 미친 무공을 얻고 노괴에 대해서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수했어. 내 역할은 널 이기는 게 아니다.’
소극적이던 지주의 행동이 적극적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 *
이준은 지주의 변화를 감지했다.
촤악-
지주는 여전히 무극기에 살갗이 베어졌지만, 이전처럼 겁먹은 표정은 짓지 않았다.
[작은 주인의 정체를 간파한 모양이다.]
‘그런 것 같네.’
[흥분하는 바람에 역할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아니거든.’
[큰 주인은 작은 주인처럼 가볍지 않아.]
‘무슨 소리! 사부 겁나 가볍거든? 나보다 더한 tmi토커야.’
[tmi토커가 뭐지?]
‘쉽게 말해서 말 많은 사람이라고 보면 돼.’
[흐음… 큰 주인이 tmi토커라…. 틀린 말도 아니다. 쟤들이 모를 뿐이지.]
무극자는 오로지 이준과 흑염마조 황금이한테만 말을 많이 했다.
인주나 지주 같은 이들에게는 과묵하고 어려운 존재였다.
“어?”
[이상한 짓거리를 하려는 것 같다.]
“그렇게 상처를 입혔는데 귀기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네. 강령파쇄음으로 내기도 많이 흔들릴 건데.”
이준이 지주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극기만이 아니었다.
은서단의 비파음이 지주에게도 데미지를 줬기 때문.
지주 또한 강시의 몸을 지녔다.
그녀라고 강령파쇄음을 무시할 순 없었다.
“날 농락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줄 것이다.”
귀기를 뿜어내는 지주가 종을 흔들었다.
딸랑!
“끄으윽!”
“캬악!”
종소리를 들은 사혈림 무인, 몬스터, 암사회의 각성자까지.
귀기와 마기가 폭발했다.
곧 그들의 눈이 붉게 빛났다.
“크르르.”
짐승 소리가 들렸다.
자폭무공임과 동시에 잠력을 폭발시키는 무공인 폭멸공이었다.
지주는 이 무공을 강시들에게 최적화시켰다.
이름하여 혼백폭귀공.
폭멸공이 잠력을 다 쓰면 시전자를 죽게 만드는 무공이라면 혼백폭귀공은 이를 보완한 무공이었다.
혼력이 강할수록 잠력 상승은 배가 된다.
강시의 생명은 귀기.
애초에 강시는 선천지기가 전무하기에 도중에 죽을 일이 없었다.
몬스터와 각성자의 강시화.
시체까지 일어나 귀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주의 종소리가 죽은 자를 소생시키고 강시를 강화시켰다.
“가거라. 나의 종복들이여!”
딸랑!
종에서 울려 퍼진 소리와 기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강령파쇄음을 상쇄시키는 종소리.
음공과 음공의 대결에서 우위를 선 사람은 지주였다.
“혼주의 명에 따라 목숨을 내놓거라.”
“꺄아악!”
“크크크크.”
“우워어어!”
지주의 명에 사혈림 강시와 몬스터, 암사회 각성자 모두가 움직였다.
그들은 이준과 은서단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미친, 은서단 막아!”
이준이 은서단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도 은서단은 가만히 있었다.
뭘 막으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모양.
이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게이트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라고!”
지주 측 인원들의 목표는 바로 게이트였다.
마기와 귀기가 가장 강한 게이트는 도쿄 타워 아래에 펼쳐진 균열.
그들은 그곳을 향해 자폭하려는 것이다.
“저 또라이들.”
이준은 무극기를 발에 둘렀다.
쿵!
무극군림보를 사용해 도쿄 타워 게이트로 들어가는 녀석들을 막았다.
그런데.
쾅!
콰과광!
도쿄 타워 게이트가 아닌 다른 쪽 게이트에서 굉음이 일어났다.
“저거 터지면 일본 절반이 지워질 텐데. 돌아 버리겠네.”
정말 다행인 건 도쿄 타워를 향해 달려들던 놈들은 모두 처리했다.
그런데도 숫자가 워낙 많으니까 다시 몰려들고 있었다.
이준이 땅을 박차 도쿄 타워 게이트 앞으로 떨어졌다.
어떻게든 이 게이트만은 지켜야 했다.
아니면 큰 재앙이 일어날 테니까.
“파랑아. 네가 도와줘야겠다.”
“뀨우!”
“흑염마조도.”
[이미 다른 구역을 청소하고 있어.]
“그쪽 상황은?”
[게이트를 터트릴 생각인 것 같다. 목숨을 버리고 달려들고 있어.]
“최대한 막아 줘. 여길 빨리 처리하고 갈게.”
[최선을 다해 보지.]
파랑이가 본래의 크기로 커졌다.
열 개의 꼬리를 펼치며 적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이준도 대량 살상을 위해 다리에 혼원신공의 내기를 집중시켰다.
“누가 이기나 보자.”
살아 있는 생명을 모두 없앤다 하여 지어진 이름.
무극군림보의 사보, 멸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