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1화
도쿄 암사회 최상층.
탈령존자를 비롯한 비명, 귀모, 만변, 환일존자가 어두운 표정으로 탁자에 앉아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추령과 백수의 기운이 사라졌습니다.”
“지주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존자들의 말에 탈령존자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 되네. 진혈천마강시가 목전이야. 지주의 성격 잘 알지 않나. 중요한 시점에서 신경을 거슬리게 해선 아니 되네.”
“허면 이대로 모른 척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주께서 뒤늦게 아시면 그것대로 화를 내시지 않을까요.”
“나도 탈령의 말씀에 동의하오. 이번 진혈천마강시에 우리 사혈림의 운명이 달려 있소. 만약 지주께서 진혈천마강시를 만든다면 앞으로 백마존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될 것이오.”
백마존은 천주의 측근.
신마회의 원로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콧대 높은 사혈림이라지만 백마존에게는 언제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천하제일 고수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했으니까.
무림의 암흑기이자 황금기였을 때 태어난 이들.
시대가 달랐다면 천하제일이란 수식어를 땄을 테지만 하늘은 허락하지 않았다.
동시대에 100명의 천재를 모두 내려보낸 것.
화경의 고수만 돼도 후세에 이름이 알려지는데.
그들은 현경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물론 그 정점에 있는 천주가 파천멸기란 희대의 기운을 하사해서 경지가 높아진 것이지만.
200년은 훌쩍 넘게 산 것도 한몫했다.
그런 괴물들이 도사리는 게 바로 신마회.
현시대의 등급으로 SS급 완숙, 무림의 경지로 현경 완숙에 있는 존자들도 백마존이란 이들을 무서워했다.
지주가 만드는 진혈천마강시는 그 백마존을 이기는 방법이었다.
“그리된다면야 좋겠지만.”
“어찌하면 좋을꼬.”
존자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문을 열고 한 청년이 들어왔다.
“인주를 뵙습니다.”
“인주를….”
“됐어. 앉아.”
인주는 존자들의 얼굴을 쓱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고민에 빠진 표정들하고는. 뭔데 나한테 말해 봐.”
“음.”
“그게….”
존자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인주는 사혈림의 식구가 아니었다.
지주와 사형제였으나 옛날부터 경쟁 관계에 있던 단체의 수장.
현재는 사혈림과 같이 있지만 외부인에게 존자의 죽음을 말해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그런데 탈령존자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추령과 백수존자가 죽은 듯합니다.”
“어쩌다가?”
“정보에 의하면 창제가 일본을 도와주러 온 것 같습니다.”
쾅!
인주가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얼마나 격한 분노가 담겼는지 탁자가 가루로 변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그는 창제란 이명만 들어도 이가 갈렸다.
그에게 당한 수모가 아직도 머리에서 맴돌았다.
“창제가 진짜 일본으로 올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혼자 이동해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에는 창제가 일본을 도우러 간다고만 할 뿐.
언제 출발한다고는 일절 나와 있지 않았다.
한국 측에서 이준의 움직임을 전부 차단해서 소식이 늦었다.
한국에는 천외천의 식구가 없었으니까 이런 사달이 일어났다.
“이준이 나타났다고 사형께 당장 말해야겠어.”
“사저이십니다.”
탈령존자가 인주의 말을 정정했다.
인주도 아차 싶어서 잘못을 바로잡았다.
“습관이 돼서 실수했군.”
“지주 앞에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아 나도. 사저 성격이 보통이어야 말이지.”
“인주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난 계획대로 움직여야지. 이준이 이곳에 있다는 건 한국이 비었다는 소리 아닌가?”
“사혈림의 무인을 내어 드릴까요?”
“됐어. 너희나 조심해.”
인주가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려 하다 입을 열었다.
“외부로 나가 있는 애들보고 조심하라고 해. 안 그러면 그 새끼한테 다 쓸린다?”
“알겠습니다.”
“내 말 흘려듣지 마. 나도 그러다가 당한 거니까.”
“명심하지요.”
인주가 손을 흔들고는 방을 나갔다.
“나가 있는 존자를 부를까요?”
“됐네.”
“이준이 존자들을 찾지 않겠습니까?”
“지금 고리로 연결된 게이트가 어디 어디인가?”
“저희가 선택한 곳은 거의 다 연결됐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아직 추령의 오사카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쪽만 실패한 것 같습니다.”
“나머지만 고리를 활성화시키게.”
탈령존자의 결정으로 일본의 운명이 정해졌다.
고리의 게이트가 발동하면 일본 전역은 그야말로 황폐화가 될 것이다.
* * *
[샤크로아 군단이 레드존 카오스 게이트인 ‘폐성터’를 함락시켰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150,000,000p가 지급됩니다.]
……
……
[페어리 군단이 블랙존 게이트인 ‘사우린 신전’을 함락시켰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75,000,000p가 지급됩니다.]
……
……
[스케먼 군단이 블랙존 게이트 ‘까마귀 무덤’을 함락시켰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70,000,000p가 지급됩니다.]
나고야에 도착하자마자 뜬 메시지였다.
모두가 임무를 잘 완수했다.
부상자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적에게 사망한 몬스터는 별로 없었으니까.
블랙존 게이트를 쳐들어간 것치고는 극히 적은 희생이었다.
[주군. 일을 끝냈습니다.]
[저두요.]
[두 분 저보다 늦었습니다요. 전 진작부터 끝내고 기다렸지 말입니다요.]
‘잘했어. 돈 되는 거 다 챙겼지?’
[게라간의 사체를 분해해서 포대 자루에 넣었습니다.]
[저희 페어리는 로드 뱀파이어의 이빨이랑 손톱을 잘랐고요. 피도 몽땅 뽑아서 단지에 담았어요. 테구르는요?]
[…….]
[전투만 끝내 놓고 쉰 건 아니겠죠?]
[로티틸! 테구르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웬일로 샥쿠가 테구르의 편을 들었다.
같이 오래 지내서인지 같은 군단장으로서 테구르를 챙긴 거다.
하지만 테구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로티틸.
[설마… 전리품을 안 챙긴 건 아니죠?]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다, 다 챙겼습니다요. 하, 하.]
테구르의 웃음이 어색하게 들렸다.
‘싸움만 끝내고 쉬고 있었지? 테구르.”
[아, 아닌뎁쇼.]
‘돈 되는 것 전부 회수해서 집으로 귀환해. 실시!’
[시, 실시!]
테구르가 스케먼을 갈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뺨 맞고 애먼 곳에서 풀고 있었다.
‘샥쿠와 로티틸은 귀환해서 좀 쉬어.’
[예.]
[넵!]
[제1 군단 샤크로아가 4대 성지의 금역으로 귀환합니다.]
[제2 군단 페어리가 4대 성지의 금역으로 귀환합니다.]
이준이 혼자 웃자 옆에 있는 미야와키 칸나가 눈을 깜빡였다.
“저… 준 사마.”
칸나가 수줍게 묻자 이준이 대답했다.
“네? 부르셨어요?”
“왜 혼자 웃고 계세요? 재밌는 거라도 생각하셨나요?”
“아니에요. 그냥 가끔 이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준과 칸나는 오사카에서 나고야로 왔다.
칸나의 안내로 길을 잃지 않고 잘 도착했다.
“그보다 나고야는 오사카보다 더 심각하네요.”
오사카에는 그나마 여러 가문이 있었으나 나고야는 무법 지대.
게이트를 관리하는 뛰어난 가문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균열로 뒤덮인 곳이 꽤 많아 보였다.
부산같이 아예 균열로 가득하진 않아 다행이었다.
아직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
하나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나고야도 부산과 같이 몬스터의 지역이 될 것이다.
“우선 숙소부터 잡아야겠죠?”
오사카에서 일을 마치고 곧장 출발하니, 밤늦게 도착했다.
잠도 자 가면서 싸워야 일의 효율도 늘어날 터.
이준은 숙소부터 찾았다.
“수, 숙소요!?”
칸나가 화들짝 놀랐다.
숙소라는 말에 혼자 이상한 상상을 했다.
‘어, 어쩌지? 준 사마와 같이 하룻밤을 지내다니.’
칸나와 몸을 나눠 쓰는 은서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준은 칸나에게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칸나 혼자만 착각 속에 빠져 있으니, 안쓰러웠다.
“아는 숙소 없어요?”
이준의 질문에 칸나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이, 있어요!”
“그럼 안내해 줄래요?”
“네, 넷!”
그녀는 홍당무가 된 얼굴로 먼저 앞질러 갔다.
“어? 같이 가요.”
은서단의 경공인 독행신이었다.
칸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른 이준은 그녀가 펼친 경공만을 생각했다.
그녀를 따라가면서 움직임을 살폈다.
‘저게 어딜 봐서 이제 갓 내공을 얻은 각성자라 생각할까.’
펼칠수록 몸놀림이 완벽해진다?
아니었다.
칸나는 은서단과 거래하고 나서부터 몸놀림이 완벽해졌다.
지금도 봐라.
내공을 허투루 쓰지 않고 오직 경공을 펼치는 데만 사용하지 않았는가.
최소한의 내공으로 최고의 효율을 뽑고 있었다.
웬만한 각성자가 아니면 힘든 내공 분배였다.
‘정신 분열이 안 일어나는 게 참 신기해.’
한 사람의 몸에 두 사람의 영혼이 들어 있었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상황.
무극자 사부는 옆에서 조언만 해줬지만, 은서단은 몸을 공유했으니.
자아가 분열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옆에서 계속 지켜봐야지. 언제 은서단이 돌변할지 모르니까.’
* * *
나고야 호텔 앞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는 안전하겠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왔지.”
“제발 문 좀 열어 줬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간절하게 호텔 정문을 바라보았다.
소식이 없는 호텔 안.
참다못한 한 시민이 호텔 문을 쾅쾅 두드렸다.
“이봐! 여기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 나와서 이유라도 말해 줘야 할 것 아니야?”
“옳소. 빈방도 많고 돈도 내겠다는데 밖에 세워 두는 이유가 뭡니까.”
“지배인이라도 불러와!”
한 시민의 분노에 시민들이 따라 소리쳤다.
호텔 문이 부서질 듯 세게 흔들렸다.
시민들은 당장이라도 문을 부술 것처럼 행동했다.
하나 호텔 문은 마정석으로 만들어졌다.
각성자가 아니면 부수지 못하는 강도.
일반인이 떼로 달려든다 하더라도 호텔 문은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이준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본 전역이 몬스터로 몸살을 앓을 때 호텔들이 짜기라도 하듯 입구를 봉쇄했었지.’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호텔 지배인으로 보이는 자가 안쪽에서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호텔 사정으로 인해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됐습니다. 다른 호텔로 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쿵쿵쿵!
“이 밤에 어딜 가란 말이야!”
“몬스터에게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
“난 여기에서 묵을 테니까 어서 문 열어!”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났다.
언제 몬스터의 습격이 시작될지 몰랐다.
안전을 찾은 곳이 바로 나고야 호텔.
한데 호텔은 사정이 있다고만 하고 문을 안 열어 줬다.
그러니 사람들이 폭발한 거지.
밖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상황.
언제 튀어나와 사람들을 잡아 먹을지 모르는데 밖에 대기하고 있으니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전쟁 속에서 제 이득만을 챙기는 아귀 같은 놈들.’
몬스터로 주변이 박살 나면 주가가 급상승하는 곳이 바로 호텔이었다.
일본의 호텔은 쉘터와 같은 역할을 했으니까.
쉘터가 무료라면 호텔은 유료 쉘터.
몬스터의 공격도 거뜬히 버틸 수 있을 만큼 견고했다.
이를 바탕으로 호텔 사장들끼리 담합을 한 것.
천외천에게 영혼을 판 게 아닌, 제 잇속을 챙기는 것뿐이었다.
“벌써부터 장난질을 시작한 건가?”
“장난질이요?”
“네. 일본 호텔은 쉘터 역할도 하잖아요. 사장들끼리 미리 말을 맞췄을 겁니다. SNS 좀 뒤져봐 주시겠어요?”
“그럴게요.”
칸나가 이준의 말에 일본 대표 SNS를 뒤져봤는데.
“다 이곳과 같은 상황이에요.”
나고야 호텔과 똑같이 문을 봉쇄했다는 말이 SNS에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칸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즈키 아저씨는 그럴 분이 아니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