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사혈림의 무인들은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하나 마음처럼 움직이는 건 불가했다.
무언가의 힘에 의해 몸이 짓눌려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추령존자 언제 온대?”
“내가… 말해 줄 것 같으냐!”
“마기를 지닌 사람은 무극기 앞에서 고개를 못 든다고 했는데 사부님이 구라쳤구만.”
이준이 앞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극기는 마기의 정점.
마기를 지닌 마인들은 무극기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떤가.
아직도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내가 무극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너무 얕보여서?”
이준이 차가운 미소를 보이자 무극기가 반응했다.
몸에서 스멀스멀 나온 무극기가 일렁였다.
“헉!”
“파, 파천멸기!”
“창제가 어떻게 파천멸기를 지니고 있는 거야!?”
사혈림의 무인들이 기겁했다.
파천멸기는 천외천이 가진 기운.
다른 사람이 지녀서는 안 되는 마기였다.
“파천멸기가… 너무 선명해….”
“저런 기운을 가진 사람은 한 명뿐이잖아!”
“지주께서도 저 정도의 짙은 파천멸기는 가지지 못하셨어….”
그들의 몸이 떨려 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제를 상대할 수 있다 여겼다.
한데 이 기운은 뭐란 말인가.
천주이자 마주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기운이 창제란 각성자에게서 느껴졌다.
“창제는 S급이라 하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인주께서는 제 힘을 다 꺼내지 못해서 당한 거라고 했어…”
“어, 어떤 게 진실인 거야.”
그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무림인들은 지구로 넘어오면서 힘이 하락한다.
몇백 년 있던 내공도 반토막이 나 버리는 이 세계.
그 때문에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인주 또한 힘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창제와 싸운 것.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창제에게 졌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인주라도 힘을 잃은 상태에서는 충분히 각성자에게 질 수 있었다.
“우리끼린… 이기기 힘들어.”
“추, 추령존자께서 오셔야 해.”
“설마… 존자들처럼 현경에 있는 거 아니야?”
십이존자 중 제일 약한 게 사령과 화혼존자였다.
두 존자만 빼면 전부 현경.
현대 등급으로는 SS급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창제가 바로 그런 자들과 비교됐다.
“끄으윽…!”
“컥!”
“으어어….”
파천멸기 파편의 기운이 약한 이들은 이준의 기세에 밀려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털썩.
몇몇은 가슴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지만.
“커어억!”
그럴수록 뇌와 심장을 조여 오는 힘이 강해졌다.
고통스러워하는 건 사혈림 무인뿐만이 아니었다.
“끼이이익!”
“케에엑-”
“캬악.”
블랙급 몬스터인 그린 하피도 울부짖었다.
사혈림 무인만큼 고통에 시달리지는 않았으나.
그린 하피도 마기를 지닌 몬스터.
무극기 앞에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무극기는 마기를 지닌 자라면 사람이든 몬스터든 모두에게 평등하게 대했으니까.
“보기 좋네. 진작부터 무극기를 운용할 걸 그랬어.”
이준의 앞에 나뒹구는 사혈림의 무인들이었다.
그는 거품을 물고 기절하거나 내상을 입어 피를 토하거나, 괴로움에 스스로 자해하는 이들을 보며 팔짱을 꼈다.
“추령존자가 올 때까지 버텨 봐. 이제 기절은 못 할 거야.”
이준의 말은 청천벽력같았다.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추령존자가 올 때까지 견뎌 보라니.
그 전에 내장이 터지고 미쳐 죽을 것이다.
얼굴과 몸의 핏줄이 다 터져서 혈인이 된 자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추, 추령존자는….”
하나 다음 말은 차마 이을 수 없었다.
“됐어. 그냥 기다릴래. 나 인내심 좋아.”
이준이 혈인의 입을 막아 버렸다.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는 이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멀리에 떨어져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 * *
후쿠오카에서의 일을 끝낸 추령존자와 백수존자.
두 사람은 경공을 펼쳐서 오사카에 도착했다.
“……!”
“추령. 너도 느꼈지?”
“어. 굉장한 마기야.”
“요시오가 블랙존 카오스 게이트를 소환한 건가?”
“오사카에 블랙존 카오스 게이트가 있었어?”
“요시오가 찾아본다고 했다.”
“블랙존 카오스 게이트면 고리가 빨리 폭발하겠는데?”
“우선 가 보자.”
두 사람은 경공을 펼쳐 앞으로 나아갔다.
무너진 건물을 밟으며 나아가는데 추령존자가 갑자기 우뚝 섰다.
“백수! 멈춰!”
“왜?”
“균열이 아닌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신중하게 기운을 느껴 봐.”
추령존자는 백수존자를 세워 저 멀리서 느껴지는 마기를 읽게 했다.
“뭐…지?”
“균열에서 나온 마기와는 질이 달라.”
“조금 더 앞으로 가 봐야 어떤 기운인지 알 것 같다.”
“조심해서 움직이자.”
두 사람은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이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기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두 사람의 표정은 굳어만 갔다.
“추령.”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냐?”
“파천멸기의 기운이다.”
“지주께서 직접 왕림하신 건가?”
“지주께서도 이만한 파천멸기는 가지지 않으셨어.”
“누군지 알아봐야겠지?”
“가자.”
“우리가 모르는 파천멸기의 기운이라… 생각나는 사람 있어?”
“한 명 있다.”
“누구?”
“창제.”
“아, 인주께서 창제도 파천멸기를 지녔다 하셨지?”
창제가 파천멸기를 가진 건 존자들 이외에는 모른다.
파천멸기의 파편도 아닌, 진짜 기운.
그걸 각성자 따위가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봐라.
천지인의 위엄에 흠이 가는 건 당연지사.
천외천의 무인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었다.
“만약 창제가 맞다면… 큰일 났는데.”
사혈림 무인들은 창제가 S급에 있다고 생각할 터.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 게 뻔했다.
사혈림의 콧대는 하늘같이 높았으니까.
“오사카에 있는 애들은 사혈림 소속 중에 제일 약하니까 죽어도 상관없어. 고리의 게이트만 모르고 있으면 돼.”
“그래도 네 밑에 있는 애들인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화경에도 못 든 놈들이다. 초절정은 수라 강시도 못 이겨.”
“그건 맞는 말이지.”
두 사람은 대화하면서 강력한 마기가 뿜어지는 근처까지 왔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창제다.”
“하필 고리에 연결된 게이트 밑에 있잖아?”
“미치겠군.”
“네 수하들은 이미 죽어 나가고 있군.”
“그게 문제가 아니다… 창제가 생각보다 더 강해.”
“인주를 죽였으니 당연히 현경 완숙은 되겠지.”
“아무래도 철수를… 헉!”
추령존자가 헛바람을 삼켰다.
저 멀리서 이준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릴 봤다.”
“어떻게 할 거야. 빨리 정해.”
백수존자가 추령존자를 재촉했다.
머리를 굴리는 건 추령존자의 일.
백수존자는 생각하는 걸 질색했다.
“도망쳐야지. 저놈은 인주를 이긴 놈이야.”
“우리가 도망치는 상황이 생기다니. 빌어먹을!”
두 사람은 현경 초입에 있었다.
SS급 초입.
천지인의 주인 말고는 먼저 몸을 돌리지 않아도 될 수준.
그런데 무림인도 아닌 고작 각성자에게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물론 상대가 평범한 무공을 익힌 각성자가 아닌 걸 안다.
그럼에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창제가 일본에 나타났다고 지주께 알리자.”
“알았어.”
두 사람이 이곳에서 벗어나려는데.
“……!?”
“몸이… 안 움직여!”
쇠사슬로 몸이 칭칭 감긴 것처럼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내공을 돌려 보고, 몸을 힘껏 움직여도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젠장!”
“어떻게 된 일이야?”
두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저항하는 사이.
“개이득. 백수까지 이곳으로 왔네?”
이준은 남자의 의상을 보고 알았다.
백수존자의 인상착의.
백수는 몸에 호랑이 무늬 옷을 즐겨 입었다.
거기에 후드티같이 호랑이 대가리를 모자처럼 달고 다녔다.
그 때문에 추령존자 옆에 있는 사람이 백수존자인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창…제….”
“어느새 여기까지?”
“설마 수하들 놔두고 도망치려고 한 건 아니겠지? 명색에 사혈림의 존자들인데.”
“우리가 사혈림 소속인 건 어떻게 알았느냐!”
“백수! 저놈에게 말리지 마.”
“얼마나 말했다고 말리지 말라고 해.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네놈이 우릴… 옭아맨 것이냐?”
추령이 이준을 향해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다.
마기를 지닌 자는 상위 마기를 지닌 자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파천멸기는 마기이자, 사기.
파천멸기의 상위 호환인 무극기를 지닌 이준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강한 무인일수록 공포는 더 컸다.
“그렇다고 볼 수 있어.”
‘가까이서 보니까 더한 괴물이잖아…!’
‘이런 놈이 어떻게 각성자지?’
‘여기서 벗어나야 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두 사람의 생각은 똑같았다.
이준은 위험한 인물.
여기서 그와 싸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에이. 도망치게? 나한테 이게 있는데 도망친다고?”
이준이 파멸겁을 내보였다.
붉은색 창신이 일자로 쫙 뻗어 있었다.
1단계의 모습.
인주가 봤다면 환장할 무기였다.
“마겁!”
“천주도 풀지 못한 걸 네가 풀다니!”
추령과 백수존자의 눈이 돌아갔다.
파멸겁은 파천혈신의 신물.
하나만 있어도 절대자가 된다는 보물이었다.
그런 신물이 눈앞에 있으니, 탐욕이 이는 건 당연했다.
또한 현재 이준의 파천멸기에 그들의 이성은 이미 마비가 된 상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내놔라!”
추령존자가 이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던 그였는데 어쩐 일인지 몸이 자유로웠다.
백수존자도 마찬가지.
자유를 얻은 두 사람은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두 존자를 피해 뒤로 몸을 뺐다.
‘천외천을 유혹하는데 사대기보만 한 건 없지.’
이준은 두 존자를 끌고 하루카스 전망대 쪽으로 왔다.
추령과 백수존자의 경지는 현경 초입.
하늘에 열린 블랙존 게이트를 무너트리기엔 충분한 힘을 가졌다.
“내 몸에 생채기라도 만들 수 있다면 이 파멸겁 줄게.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혹시 알아? 내가 진짜 줄지?”
“오냐. 네 자신만만한 모습을 박살 내 주마.”
“파천멸기를 가졌다고 오만하지 마라!”
두 존자는 각자 자랑하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추령은 실과 방울을, 백수는 게이트에서 동물들을 각각 소환했다.
방울이 달린 실을 주변으로 날린 추령존자.
무너진 건물 사이에 걸린 실들이 교차했다.
딸랑!
추령존자가 실을 건드리자 방울이 울렸다.
“끄윽…”
“크아아악!”
사혈림 무인들의 눈이 붉게 빛나며 괴성을 질렀다.
몸에서는 기운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준에 대한 공포는 잊었는지 짐승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추령존자의 금혼술
사혈림 무인이 몬스터에게 사용한 금혼술과는 격이 달랐다.
폭멸공이 사용되는 건 기본.
추령존자가 방울 소리를 울릴 때마다 수십 년은 합을 맞춘 것 같이.
사혈림의 무인들이 한 몸으로 움직였다.
깡!
이준의 창이 달려드는 사혈림 무인의 팔과 부딪혔다.
창두에 불꽃이 튀었다.
파멸겁으로 자르지 못한 무인의 팔.
‘강시야.’
강시의 몸은 금강불괴였다.
어떤 무기로도 자를 수 없는 신체.
상처를 낼 수 있는 건 신물뿐이었다.
파멸겁은 무기 중에 단연 으뜸.
못 뚫는 게 없는데 막힌 것이다.
그럼에도 이준은 놀라지 않았다.
‘사혈림의 무인은 신체 일부를 강시화했다더니 정말이네.’
사혈림의 무서운 점이었다.
인주의 무림맹보다 한 차원 강하다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까강!
이준은 확인을 더 했다.
파멸겁 1단계에서도 잘리지 않은 신체라면.
강시화한 신체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나한테는 똑같아.’
확인을 끝낸 이준이 파멸겁을 다음 단계로 변형시켰다.
일자인 창두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파멸겁 2단계.
창두에서는 전보다 내기가 강력하게 흘러나왔다.
2단계로 변한 파멸겁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사선의 빛이 반짝이더니.
푸확!
곳곳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이제야 먹히네. 너희는 2단계부터 사용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