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부산 해운대 근처 바다에는 배 한 척이 멈춰 있었다.
배 난간에 있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숨을 마셨다.
“스읍! 하아. 오랜만에 맡아 본 한국의 냄새. 난 왜 한국이 좋은 거지?”
“한국을 거점으로 삼지 못한 아쉬움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일본보다 한국이 내 취향이긴 해.”
남자의 눈이 반달이 되었다.
얼굴은 꽤 호감형.
웃는 모습은 동네 착한 형을 연상케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을 차근차근 점령해 나가시면 사령존자께서 이곳을 다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지주의 측근인 사령존자 여휘였다.
일본 이름은 야마시타 쿄스케.
그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리될 겁니다. 그동안 많이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창제란 놈만 없었으면 계획대로 됐을 터인데 웬 이상한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내 일을 방해하고 있으니 그게 마음에 안 들어.”
“지주께서 창제는 무시하라고 했습니다. 사령존자께서도 괘념치 마십시오.”
“그러고 싶은데 쉽지가 않아.”
팟!
사령존자가 배 난간을 밟고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그 뒤로 배에 있던 사람들이 따라나섰다.
바닷물을 밟으며 나아가는 사람들.
수상비란 것으로, 바다를 평지처럼 달리는 경공이었다.
“정말 균열이 사라졌군.”
모래사장을 밟은 사령존자가 주변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화를 했나 봅니다.”
“정화로 균열 오염이 이렇게 깔끔하게 없어진다고 생각하나?”
“아닙니까?”
“인간은 불가능해. 몬스터가 회수해 가는 거면 몰라도.”
“그러면 이 지역은 어떻게 된 겁니까?”
“창제가 데리고 다니는 몬스터의 등급이 꽤 높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군.”
“창제의 몬스터가 이곳을 정화했다는 소리입니까?”
“그럴 수도.”
사령존자는 인주에게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준에겐 두 마리의 천상계 몬스터가 있다는 사실.
한 마리는 사신수 중 하나인 주작.
또 다른 한 마리는 지배자 몬스터 중 하나였다.
인주도 주작인 흑염 마조만 봤지, 파랑이의 정체는 잘 알지 못했다.
주작이 한국에 나타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나, 이준의 몬스터라는 건 모른다.
인주는 이 사실을 지주에게만 말했으니.
사령존자가 주작의 존재를 이준과 엮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사령. 빙악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더냐.”
“오늘 바로 계획을 실행할 테니 지원군을 수원 월드컵 경기장으로 보내 달라 합니다.”
“수하들을 끌고 가라.”
“존명!”
보고한 남자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딸랑!
그가 손에 쥔 종을 한 번 흔들었다.
경쾌한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이에 목석같이 있던 이들이 종을 쥔 남자의 명에 의해 움직였다.
“곧 뵙겠습니다.”
“연기를 잘해야 할 것이야.”
“염려 마십시오.”
고개를 숙인 남자가 경공을 펼쳤다.
목석같은 이들도 사령존자에게 인사를 한 후 남자를 따라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사령존자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를 포함해 열도 되지 않았다.
“불쌍한 것들.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쯧쯧.”
사령존자가 혀를 찼다.
그가 뒷짐을 쥔 채 걸어가며 말했다.
“우리의 신분은 준비했지?”
“중국,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활동하는 소규모 용병단입니다. 이름은 소울디펜스입니다.”
“느낌 좋군. 후후.”
사령존자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움직이시겠습니까?”
“가지.”
그는 선발대와 다르게 아주 느긋하게 움직였다.
* * *
특별 1반 학생들은 내공 회복과 상처 치료에 집중했다.
몬스터와 싸워도 최상의 컨디션으로 싸워야지 어정쩡한 상태에서 싸우면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회복력이 굉장히 빠른 허수가 정찰을 다녀왔다.
“한동안은 몬스터 웨이브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잠잠하니까 더 불안하다.”
“인정.”
“꼭 폭풍전야 같지 않냐?”
진경수의 말에 정예나가 맞장구를 쳤다.
게이트는 지금처럼 고요할 때가 제일 위험했다.
경고도 안 주고 갑자기 일을 터트릴 때가 많았으니까.
그들의 우려에 한지유가 말했다.
“중간 보스 몬스터를 넘기면 최종 보스 몬스터가 나올 때까지는 괜찮다고 했어요.”
“선생님의 말씀이야?”
“네.”
“이제야 안심이 된다.”
진경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에게 이준은 신적인 존재.
이준의 말은 틀린 게 없다고 생각하는 진경수였다.
한지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홍원찬이 앞으로 나섰다.
“식사는 제가 준비할 테니 계속 심법을 돌리셔도 돼요.”
이번에도 눈치 빠른 홍원찬이 먼저 움직였다.
여태껏 허수와 이지안이 음식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모두가 지쳐 있었다.
한지유는 두 사람에게 또 당번을 맡길 순 없어, 본인이 움직이려 했으나 홍원찬에게 막힌 것이다.
“밥 만들어 본 적 있어?”
“어머니한테 한두 가지 배웠어요. 허수 선배님처럼 많은 음식은 준비 못 하지만 요번에는 제가 할게요.”
“…….”
한지유가 아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내공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
조금이라도 내공을 회복해야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그래 줄래?”
“맡겨 주세요!”
“그러면 쟤들하고 같이 부탁해.”
“넵!”
홍원찬이 대답을 한 후, 류가을과 조용석에게 갔다.
“누나, 형. 식사 준비하러 가요.”
“그러자. 밥이라도 해야지.”
류가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걷어붙였지만, 조용석은 당황해했다.
“우, 우리가?”
“놀고 있는 사람은 저희뿐이잖아요.”
“아, 아니 그래도 밥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요리는 제가 할 테니 옆에서 식재료나 다듬어 주세요. 가을 누나는 할 줄 아는 거 있어요?”
“…아니….”
“밥은요?”
“밥도 못… 해….”
“그럴 줄 알았어요. 총련주님께서 누님을 아끼시니 손에 물 한 방울이라도 묻게 하지 않으셨겠죠.”
홍원찬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놀라워하지 않았다.
귀한 집 자식들은 원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혔으니까.
집사나 유모가 다 해 주는데 굳이 직접 요리를 할 필요가 있나.
무공을 익힐 시간도 아까워하는 게 각성자들이었다.
“용석이 형은 모닥불 피워 주시고, 누나는 냄비에 물 받아 주세요.”
“응.”
류가을은 곧장 잘 대답했다.
조용석은 멍을 때리다가 홍원찬의 큰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형. 아무것도 안 하고 선배님들한테 민폐 끼칠 거예요? 살악께서 아신다면 혼꾸멍이 나실 겁니다.”
“그, 그럴 순 없지.”
반에서 순위권을 다퉈도 모자랄 판국에 민폐로 전락했다?
이 사실이 그의 아버지인 살악에게 전해지면 크게 혼날 것이다.
사마련이야말로 강자존에 가장 적합한 곳.
약하면 등에 칼이 꽂히는 게 바로 사마련이었다.
살악은 자신의 아들이 약한 걸 용서하지 않는 위인.
전학 간 무사고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기존 특별 1반 학생들이 강하다면 따라잡아야 한다는 게 살악의 지론.
특별 1반 학생들은 강하니, 곧바로 따라잡는 건 힘들어도 훈련에 있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건 살악의 아들로서 수치.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조용석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했다.
홍원찬의 지휘로 밥은 빨리 만들어졌다.
음식의 개수는 네 가지.
흰 쌀밥, 계란프라이, 된장찌개, 김치가 다였다.
“선배님들 식사 다됐습니다. 와서 드세요.”
홍원찬의 부름에 심법을 멈춘 아이들이 모닥불이 피어진 곳으로 모여들었다.
“잘 먹을게.”
“단출해요. 다음에는 요리를 배워서 맛있을 걸 해 드릴게요.”
“이걸로 충분해.”
“게이트에선 된장찌개가 최고지.”
“다음에는 리자도 알로 프라이 부탁할게.”
“네에!? 리자도 알로요?”
“안 먹어 봤니?”
정예나가 짐짓 놀라는 척했다.
대부분의 공략대는 게이트에서 마정석이나 가져가지 식재료는 뒷전이었다.
무엇보다 몬스터의 알을 먹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정의 꿀은 달달하고 맛있으니 인기가 많았지만 리자도의 알은 달랐다.
머리통만 한 알에서 풍기는 냄새는 비리기까지 했다.
“네…. 먹어 볼 기회가 없었어요.”
“리자도 알 엄청 맛있는데. 그렇지 애들아?”
“처음에는 비려서 못 먹을 줄 알았는데 계란프라이는 비교 불가예요.”
박은비가 눈을 반짝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취미를 가진 그녀.
리자도의 알로 만든 프라이는 미슐랭급 맛이었다.
“선배님들은 안 해 본 게 없으시군요.”
“선생님과 함께하면 별의별 일을 다 겪거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게 말이다….”
진경수가 입을 열려는데 한지유가 딱 끊었다.
“식사하세요. 먹고 개인 정비하셔야 해요.”
“끄응. 알았어.”
그도 한지유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허수에게 듣기로 한지유와 이준은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학생들은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밥을 먹어 치웠다.
식사가 끝났다.
“뒷일도 저희가 할게요.”
“A급이 후배로 있으면 편하다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학생들은 홍원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개인 정비를 했다.
모두가 심법에 몰입하고 있을 때.
번쩍!
한지유의 눈동자가 떠졌다.
기감이 유독 예민한 이지안도 마찬가지였다.
한지유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너도 느꼈니?”
“네. 꽤 많은 숫자예요.”
“몬스터는 아닌 것 같지?”
“사람의 기예요.”
“어떻게 게이트에 들어왔지?”
한지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생명의 샘 게이트는 공동 사냥터가 아니었다.
공략대가 들어가면 문이 닫히는 곳.
현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문이 열린 것 같았다.
* * *
“공략하고 있는 게이트가 열리다니.”
“암사회는 이런 아티팩트를 어디서 구한 걸까.”
“엄청난 아티팩트를 여태까지 숨기고 있었어.”
빙악과 음악, 검악이 게이트로 들어오자마자 놀라 했다.
빙악의 손에 있는 하나의 돌 때문이었다.
개방의 돌이란 아티팩트.
닫혀 있던 생명의 샘 게이트에 가져다 대니, 문을 칭칭 감고 있던 쇠사슬이 풀리며 게이트가 열린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아티팩트가 일본에는 널렸다더군.”
“전력을 숨기고 있었나?”
“일본으로 노선을 바꾼 걸 잘한 것 같다.”
“우리가 하는 거에 따라 대우를 잘해 준다고 하니까 후딱 끝내고 넘어가자.”
빙악을 필두로 음악과 검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이 아닌, 일본을 선택한 삼악.
일본으로 가기 전, 선물만 잘 챙겨 가면 됐다.
“암사회에서 파견해 준다는 지원군은?”
“곧 도착한대.”
지잉-
게이트 입구가 반짝이며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침 왔군. 어서 오시오.”
빙악의 인사에 종을 들고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빙악이오?”
“그렇소이다.”
“사령존자께서 당신을 도우라 먼저 보내셨소.”
“사령존자는 어디 있소?”
“여기로 오시고 계시오. 난 그 전에 일을 끝낼 생각이오.”
“자신감이 넘치는군.”
“애송이들 하나 상대하지 못하면 암사회에 있을 자격이 없지.”
남자가 고갯짓하자 목석같은 이들이 빙악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검은 옷을 건넸다.
“우리 암사회에서 만든 특수복이요. AA급 아티팩트이니 입으시오.”
“AA급!”
“이 귀한 걸 우리 말고 수하들에게도 준다는 말이오?”
“암사회와 손을 잡은 기념이라 생각하시오.”
빙악과 음악, 검악은 희열로 가득 찼다.
자신들의 수하까지 모두 AA급 아티팩트로 무장한다면 세력이 한층 강해질 터.
혈마련이 몰려와도 무섭지 않았다.
“고맙소. 잘 입겠소.”
삼악을 포함한 모두가 검은 무복을 입었다.
그들을 본 남자의 입에선 옅은 미소가 생겼다.
‘멍청한 놈들. 너희를 잘 이용해 주마.’
살악은 모를 것이다.
남자가 준 물건은 절대 입으면 안 될 아티팩트.
옷에는 착용자의 영혼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힘이 담겨 있었다.
“모두 입은 것 같소.”
“갑시다.”
“빨리 해치우고 일본으로 넘어가자고.”
삼악과 남자는 학생들이 있는 게이트 중앙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