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9화
이준과 사신수 환영의 비무는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모른다.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채 서로 손을 나누고 있었다.
“…허어억… 허억….”
주작의 환영인 노인이 합류하고부터 지금까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준.
이미 체력의 한계에 부딪혔지만 어쩐 일인지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현무의 환영인 한복 여자가 가세해도 똑같은 상황.
곧 쓰러질 듯한 몸을 가지고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청룡의 환영인 중년인이 신음을 토했다.
“으음… 괴물 같은 정신력이군….”
“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이 아득할 텐데.”
“허, 입이 안 다물어져.”
“모두 힘을 더 내야 할 것 같아요.”
중립을 지켜 오던 한복 여자가 환영들을 재촉했다.
이준에게서 희망이 보이니 더욱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준을 향해 쇄도했다.
중년인의 검에선 뇌전이.
노인의 창에선 화염이.
여자아이의 주먹에선 자연의 힘이.
그리고 한복 여자의 손에선 한기가 가득 뿜어져 나왔다.
각양각색의 힘.
하나의 공격이라도 맞았다간 저승 구경을 할지 몰랐다.
이준은 비틀거리면서도 정면을 응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죽을 것 허억… 같아….’
체력의 한계를 넘어선 지는 오래전이었다.
내공도 이젠 동난 상태.
단전에는 한 줌의 내공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준이 기절하지 않은 건 오직 정신력 덕분이었다.
하나 그마저도 소용없게 됐다.
내공이 없으니 환영에게 대항할 수단이 사라졌다.
‘이대로 저항도 못 하고 지면 사부님이 호통을 치실 거야.’
꼴사납게 졌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저 네 명을 상대로 많이 버텼어.’
파멸겁을 놓아두고 네 명을 향해 달려갔다.
파멸겁을 들 힘을 아껴 맨손으로 환영을 상대하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였다.
“드디어 포기했구나.”
노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충돌.
가물거리는 이성을 붙잡은 채 정신을 집중시켰다.
텅 비어 있는 단전.
전신 혈맥에 흩어져 있는 모든 기운을 싹싹 끌어모았다.
그래 봤자 얼마 되지도 않은 내공이었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아예 없는 것보다 나았다.
‘큭!’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자 단전이 비명을 질렀다.
바늘로 콕콕 쑤시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공격을 감행했다.
서로 지척에 다다른 상황.
이준의 주먹이 앞에 있는 중년인의 가슴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나 그의 주먹은 중년인의 가슴에 닿지 않았다.
네 환영의 공격이 더 빨랐다.
서걱!
푹!
검과 창이 이준의 가슴을 베고 찔렀다.
퍽퍽!
뒤이어 주먹과 장력이 이준을 강타했다.
하나만 맞아도 죽을 텐데 무려 네 공격을 전부 허용한 것이다.
환영들은 공격하면서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훌륭하다.”
“환영이라지만 우린 사신수. 네가 지는 건 당연했어.”
“재밌었는데 아쉬워.”
“그분이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 알았어요.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털썩.
이준이 무릎을 꿇었다.
정신을 잃은 듯 푹 숙어진 고개.
그에게서 그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이 창을 회수하고 말했다.
“관문은 통과하지 못했다. 시험을 종료하지.”
“쩝, 아쉽네.”
“이 관문을 깨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예요.”
무려 현경 초입인 네 명을 상대해야 한다.
현대 등급으로 치면 SS급 초입이 네 명.
지구상에 그 어떤 각성자도 한꺼번에 이들을 상대할 순 없었다.
아니, 애초에 SS급 각성자는 현재까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그들이 몸을 돌려 흩어지려는 순간!
파직-
이준의 몸에서 뇌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미약한 힘이었는데 점점 커졌다.
환영들이 몸을 돌려 이준을 보았다.
“뇌기?”
“청룡, 어떻게 된 거냐?”
“당신의 힘이 왜 공자의 심장에 있는 거죠?”
“나도… 모른다.”
“혹, 주작처럼 그분에게 따로 힘을 남긴 거 아니에요?”
“난 그 괴물에게 내 힘을 남기지 않았어.”
“저 힘은 어떻게…?”
중년인의 시선은 이준의 심장에 꽂혀 있었다.
심장에는 그만이 아는 힘이 존재했다.
바로 뇌령석의 힘.
예전에 잃어버린 정수의 힘이 이준의 심장에 있었다.
* * *
‘아파 뒤지겠네.’
이준이 눈을 떴다.
그의 앞에 있는 건 어둠뿐.
공허한 공간이었다.
‘나 죽은 거야?’
어이가 없었다.
허탈하기도 했다.
몬스터나 천외천에게 죽은 것도 아니고, 살다 살다 수련하다가 죽은 거다.
‘사부님이 왜 정신 바짝 차리라고 했는지 알겠네.’
괜히 관문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다.
설마 자신이 시험에 들다가 죽을 줄 알았겠는가.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죽음.
창에 찔리고 검에 베였다.
주먹과 장력에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
‘죽으면 파노라마를 본다는데 아닌가 보네.’
그때였다.
[못난지고.]
이준이 귀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신조차 죽일 수 있는 무공을 가지고도 고작 환영에 진단 말이냐!]
무극자 사부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뇌를 흔드는 기세.
날이 갈수록 호통이 세지는 것 같았다.
‘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쯧! 시간이 없다. 중단전에 잠든 힘을 꺼내거라.]
‘시간이 없다니요? 중단전의 힘은 또 뭐고요?’
[생명이 꺼져 가고 있느니라. 내가 개입할 시간도 얼마 없고, 못난 제자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저 안 죽었어요?’
[죽긴 누가 죽었단 말이냐. 죽었으면 나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잔말 말고 중단전에 잠든 네 힘을 찾거라.]
무극자 사부의 말에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게 바로 원 코인.
게임으로 치면 ‘목숨 하나 더’였다.
‘중단전에 잠든 힘을 찾으라는 말이죠?’
이준은 눈을 감고 가슴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두근.
중단전 옆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심장 소리.
언제 꺼질지 모를 만큼 천천히 그리고 약하게 뛰고 있었다.
심장 소리를 뒤로 하고 중단전에 숨은 힘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숨은 힘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약해지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심박수가 낮아졌다.
이러다 정말 죽을 판.
급해졌다.
그러던 그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아, 뇌령석의 힘!’
청룡의 정수가 생각났다.
박혁진에게 흡수한 힘이 심장에 있었다.
하나, 이건 예전에 이미 녹였다.
‘제대로 살펴봐야겠어.’
이준은 중단전인 가슴에서 심장으로 집중력을 옮겼다.
그러자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두근!
두근!
심장을 유심히 관찰하는데.
‘설마 이걸 말씀하신 건가요?’
심장 위에 박힌 번개 표식이 뇌리에 들어왔다.
무극자 사부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간이 없다고 하시더니 소통이 끊어졌나 보다.
‘그래. 이 번개 표식이 새겨진 곳을 자극해 보는 거야.’
혼원신공을 운용하여 심장을 연신 자극했다.
미약하게 뛰던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심장을 나간 혈액은 혈관을 타고 몸 전체를 돌았다.
파직!
한 바퀴, 두 바퀴, 다섯 바퀴.
심장을 타고 도는 피가 운동을 반복하자 심장에 새겨진 번개 표식이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옅게.
나중에는 짙게 빛이 났다.
파지직!
‘뇌기가… 동났던 하단전과 중단전을 채우고 있어!’
혼원신공은 원래부터 내공을 빠르게 채우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데 심장의 번개 표식이 도와주니 내공을 회복하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체감으로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내공을 완전히 회복한 상황.
번개 표식은 이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표식 옆자리에 세 개의 문양을 더 만들었다.
화염, 풀잎, 물방울 모양의 표식이 완전히 자리 잡았다.
‘속성? 번개 표식은 채워져 있는 걸 보니 사용할 수 있으려나?’
이준이 번개 표식을 다시 자극했다.
파지직-
그와 함께 번개 표식이 빛나며 뇌기를 토해 내는 게 느껴졌다.
‘이 힘이라면 환영을 이길 수 있겠어.’
가득한 내공과 함께 이준이 눈을 떴다.
* * *
휘이잉!
“바람?”
“아니야! 주변의 공기가 저놈에게 빨려 가고 있어!”
“이 공동에 있는 공기에서 힘을 얻고 있는 거야?”
그들 또한 자연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애당초 사신수는 하나의 속성에 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관장하는 속성에 관해서만 가능했다.
불이라면 주변에 불이 있어야 했고, 나무라면 나무가 있어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준처럼 인간이 공기, 바람에서 힘을 얻으려면 현경을 넘어서야 했다.
무림 역사상 단 한 명.
무극자만이 올랐던 자연경이어야 가능했다.
아니면 청룡처럼 바람 속성 권위자던가.
“다 틀렸다. 저놈이 공기 중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건 뇌령석의 힘을 얻어서다.”
“네가 잃어버린 정수 말이냐?”
“그래. 저놈의 심장에 박혀 있더군.”
“그걸 왜 지금 말하지?”
“뇌령석의 힘을 얻을지 몰랐다.”
그 말에 다른 환영들도 인정하는 눈치였다.
영물의 힘이 담긴 것도 아니고 무려 청룡의 힘이었다.
인간이 뇌령석을 깨운다 하더라도 절반도 채 흡수하지 못할 거다.
뇌령석 안에는 거대한 기운이 담겨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다시 싸워야겠다 그치?”
여자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때마침 이준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다시 싸울 수 있어?”
“물론. 전보다 빡셀 거야.”
“난 좋아. 제발 오래 버텨 줘.”
“미안하지만 많이는 못 놀아 줘.”
파직!
이준이 네 환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백호, 너다!”
노인이 소리쳤다.
이준이 어디로 움직였는지 뒤늦게 알아챈 거다.
“이미 늦었어.”
공간을 접은 이준이 백호의 앞에 있었다.
그의 손에 뭉친 회색 기운.
뇌기를 품은 무극기가 여자아이의 가슴을 후려쳤다.
쾅!
“악!”
여자아이가 뒤로 나가떨어지자 이준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한복 여자의 옆이었다.
한복 여자가 장력으로 이준의 주먹질을 막았지만.
“억!”
주먹은 장력을 뚫고 한복 여자의 어깨를 때렸다.
“주작! 다음은 너다.”
“알고 있다. 저 녀석이 우리의 속성을 흡수하고 있어.”
이준이 여자아이를 먼저 공격한 건 자기가 지닌 뇌속성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 것.
대지와 자연의 약점은 바람.
뇌속성을 품은 이준이 가장 상대하기 쉬운 환영이 바로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를 때려눕힌 후, 대지와 자연 속성을 가슴에 새겨진 표식에 담았다.
미약한 양이지만 지친 환영을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한복 여자의 장력을 흡수하고 곧바로 노인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어림없다!”
이준은 노인이 아닌 바닥을 때렸다.
흙과 돌이 하늘로 튀면서 벽을 만들었다.
얼핏 보면 대지 속성인 백호계 무공.
하나 이준이 사용한 건 현무계 무공인 현무의 벽이었다.
“크윽!”
노인은 현무의 벽을 향해 불의 창을 휘둘렀다.
찌르고 베고, 연신 창을 움직였으나 상성이 좋지 않았다.
“내가 도와주겠다!”
앞서 두 명이 당하자 중년인이 먼저 움직였다.
이마저도 이준은 꿰뚫고 있었다.
쌔애액!
중년인을 향해 날아오는 하나의 물체.
이준이 바닥에 놓아둔 파멸겁이었다.
쾅!
파멸겁은 주작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옵션을 사용하지 못한다지만 창 자체에 속성이 담겨 있었다.
중년인이 검으로 파멸겁을 흘렸다.
그 짧은 사이.
이준은 노인을 무너트렸다.
중년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뇌령석의 힘인가 봐?”
이준은 노인을 쓰러트린 그 자리에 서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사신수의 환영 중 순식간에 세 명이나 쓰러트렸다.
먼저 당한 여자아이와 한복 여자가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지만 무리였다.
이준을 상대하느라 힘을 많이 소비한 상태.
큰 충격을 받아 곧바로 회복하기란 어려웠다.
“이 시험 통과한 것 같지?”
이준이 중년인을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중년인 혼자 힘을 완전히 회복하고 뇌령석의 힘을 흡수한 이준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