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8화
“내가 먼저 할게.”
키 작은 여자아이가 두 주먹을 맞대곤 이준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화아악!
여자아이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나왔다.
“먼저 하세요.”
“난 상관없다.”
“저 녀석의 실력을 미리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군.”
한복 여성과 노인, 중년 남성이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이준은 안심했다.
“한 명씩이면 가뿐하지.”
현경에 있던 인주도 가뿐히 이겼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신수의 환영.
지는 게 더 이상했다.
이준의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에 여자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땅을 박찼다.
“그럴까?”
쾅!
일직선이 아닌, 지그재그로 달리는 아이.
이준은 제자리를 지킨 채 전방을 응시했다.
‘보법은 호랑이 걸음이야. 그렇다는 건 저 여자아이가 백호의 환영이라는 건데.’
지그재그로 달려오던 여자아이가 도약 후 뒤꿈치를 들어 올려 그대로 내리쳐 왔다.
쿵-
여자아이의 몸에서 나온 힘이라곤 믿기지 않은 힘이었다.
호랑이 걸음으로 접근한 뒤 박투술인 호조격으로 공격한 것이다.
고작 한 번의 공격.
그런데 이준의 몸과 그가 서 있던 바닥엔 날카로운 손톱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크으….”
이준이 신음을 내었다.
무적의 방어를 자랑하던 무극기가 뚫렸다.
천무 중 백호 계열의 무공에 말이다.
여자아이는 땅으로 내려오자 곧바로 오른발을 휘둘렀다.
발이 번쩍이자 땅을 가르고 이준을 향해 날아가는 세 줄기의 빛.
각법으로 만들어 낸 기운인, 각기였다.
현경 초입이 펼친 각기는 그 어떤 공격보다 무서웠다.
어정쩡하게 펼친 검강보다 더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상당히 묵직하네.”
이준이 파멸겁을 뽑아 들었다.
파멸겁에 무극기를 두르자 창날에 섬뜩한 예기가 맺혔다.
그는 파멸겁을 든 채 여자아이를 향해 쇄도했다.
여자아이 또한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들려오는 충돌음.
여자아이는 이준의 파멸겁을 맨손으로 받아쳤다.
“무극기를 두른 파멸겁인데?”
“네 무극기는 그 괴물에 비하면 어린 애에 불과하거든.”
이준의 빈틈을 발견한 여자아이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호아연환격.”
여자아이의 중얼거림이 들린 순간!
이준의 몸에서 연속된 타격음이 들려왔다.
“커헉!”
실 끊긴 연처럼 뒤로 날아가 바닥에 구른 이준이었다.
“애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다. 여태까지 자기 능력에 의존만 했나?”
여자아이가 세 명을 향해 말했다.
“우리와의 약조는 무리인가?”
“그분이 점찍은 전인이에요. 더 지켜볼 필요가 있어요.”
“백호의 연환격조차 막아내지 못하는데 우릴 상대할 수 있을까? 상성도 일 대 일이지 않나?”
노인과 중년인은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한복 여자만 끝까지 중립을 지켰다.
“백호 선에서 끝나겠어.”
“아직 안 끝났어요.”
한복 여자가 가리킨 곳에선 이준이 파멸겁을 지지대 삼아 일어서고 있었다.
이준은 백호의 호아연환격을 정통으로 맞았다.
스쳐도 뼈가 아작 나는 위력을 지녔는데 정통으로 맞고도 일어났다.
“정신력은 그럭저럭이군.”
비무에 신경을 끄려던 중년인과 노인이 팔짱을 낀 채 이준을 보았다.
조금 더 지켜볼 심산이었다.
한편 이준은 몸이 욱신거렸다.
‘으으… 무극기가 제때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어.’
무방비 상태였는데 천만다행으로 무극기가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감쌌다.
무극기가 없었다면 몸이 가루가 됐을 터.
십년감수했다.
‘무극기가 몸을 보호해 줬는데도 이 정도의 타격이라니. 상상했던 것보다 천무가 엄청나구나.’
이준은 혼원신공으로 꼬인 기혈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여자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시 덤비려고? 이번엔 그걸로 안 끝날 거야.”
“널 상대하지 못하면 저 세 명은 아예 넘을 수 없지 않아?”
“자존심 상하지만 맞는 이야기야.”
“그렇담 계속 해 봐야지.”
이준이 파멸겁을 고쳐 잡았다.
혼원신공을 통해 무극기를 파멸겁에 다시 둘렀다.
하지만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검은 불꽃이 파멸겁에서 타올랐다.
“2차전은 좀 달랐으면 좋겠어.”
쾅 소리와 함께 여자아이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 * *
이준은 천무 중 주작 계열의 무공인 주익창법을 펼쳤다.
파멸겁과는 엄청난 시너지를 했다.
그의 주위에 검은 불꽃이 휘몰아쳤다.
파멸겁이 허공을 찌를 때마다 화염이 같이 움직였다.
치이익-
이준의 공격은 공기마저 태워 버렸다.
빠른 찌르기가 반복되자 창영이 창기처럼 쏘아져 나갔다.
불의 가시가 하늘을 수 놓자 별빛이 됐다.
마치 유성이라도 된 듯, 바닥을 향해 내려앉았다.
콰광쾅쾅!
여자아이는 불의 비를 일일이 손으로 쳐냈다.
불의 가시가 몸에 꽂히기도 했으나 데미지를 입지 않은 듯 보였다.
오히려 기분 좋은 듯 여자아이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허나 여자아이는 불의 가시로 인해 섬전 같이 날아오는 기척을 놓치고 말았다.
파직 소리가 들리면서 공기를 가르는 뇌전.
검은 뇌전은 여자아이의 몸을 노리며 날아갔다.
“앗!”
검은 뇌전이 지척에 다다라서야 알아차렸다.
퍽!
파멸겁이 여자아이의 복부에 꽂혔다.
아니, 창끝이 아주 살짝 복부에 닿았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여자아이가 손을 움직여 막은 것이다.
“와, 이걸 막네?”
방금 전 펼쳤던 기술은 주익창법의 네번 째 창인 화우.
불의 비를 연상케하는 무공이었다.
거기에 대지나 자연 속성의 카운터인 뇌속성 무공을 따로 펼쳤는데 이걸 막았다.
무슨 환영이 이리 뛰어난지.
이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여자아이는 파멸겁의 창두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이준도 파멸겁을 회수하곤 뒤로 빠졌다.
인주를 상대할 때도 많은 긴장은 됐지만 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옆에 사부도 있었고 각성자 시스템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하나도 없었다.
각성자 시스템도 메시지만 나올 뿐.
그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능력치를 올리는 테크트리 포인트도 쓰지 못한다.
오직 능력만으로 싸워 저 네 사람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길 수 있단 확신은 없는데… 뭔가 짜릿해.’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여태 살려고 싸웠으며 복수하려고 강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사신수의 환영을 이기지 못하면 이곳에서 죽는다는 생각보다 조금 더 손을 나누고 싶었다.
“3차전 바로 시작할까?”
“나야 좋지.”
이준과 여자아이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창과 주먹이 교차했다.
쿵!
충격으로 인해 대기가 아우성쳤다.
창이 번쩍이자 여자아이의 살이 찢겼다.
주먹이 이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주먹의 경력으로 인해 이준의 광대가 칼날에 베인 듯 찢겼다.
순식간에 100합이 넘어선 두 사람.
누구 하나 물러섬이 없었다.
“주익창법으로는 날 절대 쓰러트리지 못할 거야. 그냥 아까처럼 풍신검결을 사용하는 게 어때?”
“봐서.”
“나야 재밌어서 좋지만, 시험의 내용을 잘 생각해 봐.”
“생각해 볼게.”
이준은 파멸겁을 멈추지 않고 휘둘렀다.
그도 안다.
여자아이를 맞설 때는 주익창법보다 청룡계 무공인 풍신검결이 더 좋다는 사실을.
하지만 계속 주익창법을 고집했다.
여자아이와 손을 겨루면서 자신의 창법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발전하다가 말면 주익창법을 멈추겠으나, 휘두를수록 경험치가 쌓여만 가는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창을 휘둘러야 더 효율적인지 보인다. 이 길이 안 보일 때까지만 주익창법으로 공격하자.’
이준과 여자아이는 서로 똑같은 표정을 한 채 비무를 계속 이어 갔다.
* * *
“지금 몇 합이나 지났지?”
“5,000합부터는 세지 않았어요.”
“체력 하나는 좋군.”
세 사람은 한참 전부터 이준과 백호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1만 합을 넘은 것.
온종일 싸웠으면서 여전히 쌩쌩했다.
그때 한복 여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꺼냈다.
“공자님 있죠….”
“성장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겠지?”
“네. 처음보다 주익창법의 성취가 높아졌어요.”
“그뿐만이 아니다. 내 걸음걸이의 숙련도도 늘어나고 있어.”
대게 발전하면 미미한 수준이기 마련.
특히 천무의 무공은 난이도가 극상이었다.
사신수가 한 나라에 무공을 전부 뿌렸는데 익힌 사람은 단 한 명뿐일 정도였다.
그 많은 인간이 신의 무공을 보고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선 이유기도 했다.
“각성자 시스템이 없으면 난이도가 보정이 되겠지만….”
“현재는 네가 봉인해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지.”
“그분이 공자님을 왜 혼원문에 들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천재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말이야.”
“시간이 더 흐르면 백호가 지겠어.”
“내가 나가지.”
중년인이 팔짱을 풀며 검을 꺼내 들었다.
“언제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기대가 되는군.”
팟!
그가 이준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한복 여자는 이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적과는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거죠?”
“그렇지. 원래라면 속성의 상성으로 우릴 이겨야 하지만 성장으로 상성을 무마하고 있어.”
“이대로 성장하는 것도 좋겠어요.”
“금상첨화지. 혼원신공을 12성 대성하면 그와 우리의 뜻을 이룰지 몰라.”
“전 12성까진 기대 안 해요. 이곳에서 혼원신공 10성을 달성하고 천살성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사신전이 있는 목적이었다.
혼원신공을 익힌 전인이 천살성을 띠고 있다면 제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완성된 혼원신공과 천살성의 완벽한 제어는 무극자와 사신수가 원하는 일이었다.
그래야지만 자신들이 생각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으니까.
아니,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었다.
아니면 그냥 이곳에서 죽는 게 차라리 나았다.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 할 시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울 테니까.
어쩌면 나중에 자신들을 원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이 모든 게 무극자가 원한 것인데.
그 누구도 아닌, 그가 고른 최고의 제자였다.
그들이 생각한 계획은 혼원신공을 익힌 제자여야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말이다.
“저걸 보면 가능성은 생겼어.”
“아까 전과는 태도가 다르네요.”
“저 성장력을 보고도 회의적으로 생각하면 멍청한 거지.”
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에도 이준은 성장하고 있었다.
백호 혼자 싸우는 게 아닌, 청룡의 환영까지 가세했다.
밀리고는 있지만 전처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수세에 밀리면서도 악착같이 버티는 이준.
자기가 불리 하자 뒤늦게 상성이 반대인 무공으로 공격했다.
“아집도 없군.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 텐데 상황이 불리해지자 상성을 이용해 반격하고 있어.”
“저희도 비무에 난입하면 어떻게 대응할까요?”
“지금만 봐서는 더욱 상성을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조금 더 기다려 보도록 하지.”
한복 여자도 이에 동의했다.
성장력이 정신 나갈 수준이라지만 네 명이 한꺼번에 공격한다 해도 네 배로 성장하진 않았다.
차근차근 성장하게 하고 이에 맞게 비무에 가세하면 됐다.
청룡의 환영이 끼어든 지 하루가 지났을 때는 실력이 비등비등해졌다.
이틀이 흐르자 이준이 우세해지기 시작했고 삼 일이 흘렀을 때는.
“이제 내가 나가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라요.”
“너는 이보다 늦을 거니 쉬고 있어라.”
주작의 환영인 노인이 창을 쥔 채 비무에 합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