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외전-
퍼벅!
“크윽….”
“컥!”
“악.”
무림맹 입구에는 많은 무인이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기겁했다.
“어찌!”
“사신단들이 저항도 못 해 보고 쓰러졌어….”
“허, 내가 헛것을 본 건가?”
“저 젊은이가 대체 누구길래!”
무림맹은 여러 조직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청룡, 주작, 현무, 백호.
이 네 개의 단은 정파의 후기지수들로만 이루어진 엘리트 집단이었다.
내로라하는 자제들이 속해 있는데 이립(30세)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설극이 혼자 사신단 전원을 쓰러트리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도 되겠소?”
“으으….”
“허락한 걸로 알겠소.”
설극이 사신단을 지나려 하자 안쪽에서 더 강한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보자 표정이 굳어진 그였다.
“경아의 집이라 조용히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저들의 옷에는 매화가 그려져 있는 것.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하필 화산파인가.’
비무행을 다녔을 때 화산파에 들린 적이 있었다.
장문인과의 비무에서 자신이 이기자 때로 덤벼드는 이들.
싸울 의사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전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태도는 오만했고, 성격은 편협했다.
자신을 적으로 생각해 추격대까지 편성한 문파.
앞으로 다신 화산파의 문도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들이 눈앞에 있었다.
“무림맹 앞에서 소란을 피운 자가 네놈인가?”
다행인 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비무행을 할 때면 늦은 저녁에 방문했으며 얼굴에 가면을 썼으니까.
“여전히 말끝마다 반말이군.”
“악적에게 예의를 차릴 정도로 우리의 비위가 좋지 못하다.”
“하, 경아만 아니면 그냥 돌아가고 싶어.”
“경아?”
“여기에 주경아가 있다고 들었소. 그녀를 만나게 해 주시오.”
“주경아라면…?”
“마중화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화산파의 문도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중년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주경아는 왜 찾는단 말이냐.”
“내가 사랑하는 여자요.”
설극의 대답에 중년인이 갑작스레 공격해 왔다.
“감히!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인단 말이냐!”
중년 남자의 검에서 매화꽃이 피어났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다!”
“오오, 내가 매화검수의 검기를 직접 눈으로 보다니.”
“매화검법이라면 저 청년이 쓰러질지 몰라.”
하나 구경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일직선으로 뻗은 창이 매화를 뚫고 중년인에게 접근했다.
중년인은 당황하며 퇴로를 밟았지만.
“큭!”
창은 그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며 무게를 실었다.
중년인의 어깨를 설극의 창이 찍어 눌렀다.
중년인의 무릎의 점점 굽혀지면서 종래엔 바닥에 닿고 말았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설극을 봤다.
“네가 어떻게 이 창법을….”
“…….”
설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중년인의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설마 네가 그때의…?”
그때였다.
맹 안에서 누군가가 나와 중년인의 말이 끊겼다.
“무, 무림맹주?”
“맹주님을 뵙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두가 한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름은 백무생.
화산파 장문인의 사제이자, 천하제일검.
현재는 무림맹의 맹주 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무림맹에 온 걸 환영하외다.”
“절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 명성이 자자한 무신이 그대 아니오?”
백무생의 말은 그야말로 충격에 가까웠다.
“무, 무신이라니?”
“고작 1년 만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문인과 가주를 쓰러트렸다는 그 무신?”
“저, 저렇게 젊은 사람이었어?”
“믿기지가… 않아….”
주변인들은 입을 쉬이 다물지 못했다.
근래에 제일 유명한 무림인이 누구냐고 하면 하나같이 무신이라 말한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인물.
그가 젊은지 늙은지, 아는 사람이 전무한 신비인.
무림에 나타난 기간은 단 1년.
그 안에 가장 뇌리에 또렷이 박힌 이명을 얻은 건 무신 한 명뿐이라고 모두 치켜세웠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람인데 눈앞의 설극이 무신이라고 말하자 얼이 빠진 것이다.
“무신이란 이명은 모르겠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주경아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그녀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설극의 눈은 굉장히 간절했다.
* * *
벌컥!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안으로 문사풍의 남자가 빠르게 들어와 탁자에 앉았다.
“맹주님, 무신이라니요!”
문사풍의 남자는 무림맹의 군사를 맡은 제갈영이었다.
제갈세가의 귀재.
그가 있어서 마교의 침공을 막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갈영의 앞에서 찻잔을 만지고 있는 백무생이 대답했다.
“자네의 귀까지 들어갔는가.”
“무신이 맹 앞에 나타나 난리쳤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접객당에 있다네.”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뭡니까?”
“주경아를 찾아왔다고 하더군.”
“마중화를 말입니까?”
“그렇네. 서로 사모하는 사이라고 하는데 참….”
주경아를 말하는 백무생의 눈빛이 좀 묘했다.
욕정이랄까.
음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 눈빛을 알아본 제갈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애써 모른 척했다.
“마중화만 보면 사람들이 미치나 봅니다. 맹주님의 아들인 군룡검도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고, 맹주님 또한….”
“그만하게나.”
“실언했습니다. 여하튼간에 무신도 그녀에게 빠진 걸 보면 마중화가 중원에서 제일가는 미녀라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남자들이 주경아의 얼굴만 보면 정신 못 차린다는 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마교 교주의 오른팔이자, 충직한 호위사자가 주경아를 보고 이성을 잃었다는 이야기.
호위사자는 주경아의 침실에 잠입해 겁탈하려다 걸렸고 마교 교주로 인해 죽고 말았다.
그로 인해 주경아는 마녀로 불려야 했다.
신교를 재앙에 빠뜨릴 여자라 하며.
이후로 교주는 그녀를 별원에만 가둬 두고 키웠다.
“예쁜 것도 예쁜데 마중화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네.”
백무생은 무언가에 홀리듯 중얼거렸다.
“힘없는 자에게 시집가면 박복한 인생을 살게 될 팔자입니다.”
“자네 점도 볼 수 있는 겐가.”
“사실… 군룡검이 마중화를 부인으로 맞는 건 화를 부르는 꼴입니다.”
“그녀가 화를 부른다….”
“아직 군룡검은 후기지수에서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작 일류일 뿐이지요.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마중화란 별명을 가진 여자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주제에도 맞지 않은 보물은 화를 부르게 될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무신에게 마중화를 넘겨주고 정파의 편에서….”
쾅!
백무생이 손으로 탁자를 내려치자 두 조각으로 나눠졌다.
“그렇게는 아니 되네.”
“맹주님! 그녀는 마교 교주의 딸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니 될 말이야. 그녀를 주면 무신이 마교의 편에 설게 아닌가.”
“무신을 통해 얻을 걸 생각하면 됩니다.”
“무신은 날 마중화의 아버지로 착각하고 있더군. 이 점을 이용하는 게 좋겠어.”
골칫거리인 마교와 무신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
그렇게만 된다면 마중화는 자신의 것이 될 거라 여기는 백무생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내게서 뺏을 수 없지. 내 아들이라도 말이야. 난 정파의 기둥인 무림맹주니까 모든 걸 가질 수 있어. 크크.’
백무생이 음흉한 속내를 내비쳤다.
* * *
접객당으로 백무생과 제갈영이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설극이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백무생이 탁자로 가서 앉았다.
“앉게나.”
그의 손짓에 설극이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아직도 백무생을 주경아의 아버지로 착각하고 있었다.
“경아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잘 못 지내고 있다네.”
“무엇… 때문입니까? 혹시 저 때문에?”
백무생이 제갈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그렇다네. 자네를 많이 그리워하더군.”
“아.”
설극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자네와 내 딸아이가 서로 연모하고 있다는 걸 아네만 우리에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네.”
“그 사정이라는 걸 제게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네가 알아봤자 좋을 게 없네.”
“제발 말해 주십시오.”
설극의 눈은 간절했다.
백무생은 한숨을 푹 쉬며 그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마교와 정파의 관계 개선 명목으로 딸을 마교에 보낸다는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난 정파의 맹주라네. 대가를 바쳐서라도 무림에 평화가 온다면 그 어떤 것도 바칠 수 있어. 내 딸이라도 말이야.”
백무생의 눈은 슬픔이 가득했다.
마치 진짜 딸을 적에게 보내는 것인 양 연기가 감쪽같았다.
“마교가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말인가?”
“제가 교주와 단판을 짓겠습니다.”
‘단순하고 멍청해서 다행이군. 이런 놈이 무신이란 이명을 가졌다니, 하늘이 내게 주경아를 가지라고 하는구나.’
백무생은 속마음과는 달리, 설극을 걱정하는 듯이 말했다.
“자네라도 무리네. 상대는 마교의 교주야!”
“마교의 교주라도 경아를 노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설극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 눈빛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낀 백무생이었다.
마교 교주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설극에게서 느꼈다.
‘위험한 놈이야.’
백무생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설극은 마교 교주보다 더한 장애물이라는 것을.
꼭 죽여야 하는 인물로 이름이 오른 순간이었다.
“지금 당장 마교로 가겠습니다.”
“이미 해가 졌네. 천천히 가도 늦지 않아.”
“아닙니다. 하루 빨리 교주를 처리하고 경아를 보고 싶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네.”
설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제가 오기 전까지 절대 경아를 마교로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스무날 가량의 기간을 주겠네. 그때 동안 소식이 없으면 내 딸을 마교로 출발시킬게야.”
“충분합니다.”
“길 안내자를 동행시키겠네. 그들의 안내를 받아 가게나.”
“감사합니다.”
설극이 창을 들고 접객당을 나섰다.
안에 남은 두 사람.
백무생이 제갈영에게 전음을 했다.
[어떤가. 내 계책이?]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잘못하다간 무신의 분노가 저희들에게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네. 안내자로 보낸 이들이 무신의 눈을 가릴게야.]
백무생의 말에 제갈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마중화에 빠져 이성을 잃은 사람은 군룡검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림맹주라는 자기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에게 홀린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만에 하나라도 거짓말이 탄로 난다면 무림맹이 피로 물들 것이거늘….’
제갈영은 출세할 때부터 세 명의 맹주를 모셨다.
마교 교주나 세외 고수들까지.
절대자는 거의 모두 본 그였지만 설극 같은 자는 보지 못했다.
구름 속에 가려진 그림자.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마교 교주도 속에 감춰진 흉포한 내면을 볼 수 있었는데 무신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느낌이 맞다면….
‘무림맹뿐만 아니라 무림이 피로 물들을 수도 있어. 그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오직 마중화뿐이야.’
제갈영은 백무생의 여성 편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녀자를 겁탈하고, 처녀를 몰래 보쌈해 와도 군사 된 입장에서 뒤처리를 해줬다.
허나 이젠 한계에 봉착했다.
이번 일은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그래도 대비는 해야겠지….’
그동안 터지지 못하고 부풀어 오른 게 한꺼번에 쏟아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 모든 게 내가 맹주의 치부를 눈감은 순간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
처음 맹주의 치부를 알았을 때 자리에서 끄집어 내렸어야 했건만.
그러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