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뭘 놀라고 그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가문 밖으로 나온 게냐?”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한국이 위험하다고 홍보를 하는데 집에만 박혀 있을 수가 있나. 이야기는 이따가 하자.”
정심호가 구부정한 허리로 걸어 나갔다.
쿵.
그가 진각을 밟았다.
땅이 갈라지진 않았으나 대지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의 진각에 나무 상자에 든 이화정이 공중으로 떴다.
“네놈은 이렇게까지 못하지? 끌끌.”
그것도 모자라 그가 준비한 물건들까지 전부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화정?”
“폭우이화정이라고 들어 봤을지 모르겠다.”
암독만가는 이화정의 제조법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것보다 상위 암기인 폭우이화정을 개발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
개발을 포기한 줄 알았는데 폭우이화정을 가지고 나타나 깜짝 놀란 이준과 검제였다.
“잘 봐라 춘식아. 이젠 우리 만독암가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문이다.”
쿵.
정심호가 다시 발을 굴렸다.
허공에 멈춰 있던 구슬들이 일제히 천외천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숫자는 무려 수천 개.
허공섭물의 극의에 달한 경지였다.
‘어마어마하네.’
[저딴 걸로 감탄은. 이 사부는 만 개도 거뜬히 하느니라.]
또 또!
이상한 경쟁심이 발휘된 무극자 사부였다.
가만히 계시면 알아서 존경심이 묻어날 텐데, 꼭 입을 여시니 생겼던 존경심도 싹 사라졌다.
마치 입을 열기 전엔 존잘인데 입을 열면 환상이 깨지는 사람이랄까.
무튼 못 말리는 사부였다.
‘S급 완숙. 검제 님보다 더 강하잖아?’
전생에 정심호는 만독암가와 함께 유명을 달리했다.
천외천에게 저항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죽은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등급은 S급 초입에 불과했는데, 7년 전에 해당하는 지금은 S급 완숙이었다.
‘과거가 바뀌니 미래도 바뀐 건가?’
이미 나비 효과는 무수히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정심호의 경지에 갭 차이가 커서 잠시 당황했다.
‘뭐 상관없겠지. 오히려 든든한 아군이 생겨서 좋아.’
특기가 독과 암기다.
대규모 전쟁에서 이만큼 좋은 특기를 가진 고수는 적에게 재앙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어디 너희들이 얼마나 강한지 보자꾸나.”
펑펑펑펑!
천외천 지근거리에서 구슬이 일제히 터졌다.
“어억.”
“검막을 펼쳐라!”
“방어진으로 피해를 최소화해!”
이준의 무극군림보와 무극장법도 막은 천외천이다.
폭우이화정을 못 막을 이들이 아니었다.
하나 그들이 간과한 하나의 사실.
정심호의 이명은 암독 하나뿐이 아니다.
괴개.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다 해서 붙여진 이명이다.
이 괴개란 이명이 붙게 된 계기는 바로 그의 손에 든 주먹만 한 폭탄에 있었다.
“이게 진짜다 이놈들아.”
정심호는 투포환을 하는 것처럼 폭탄을 마구 던져댔다.
“저, 저 미친놈이!”
뒤에서 지켜보던 검제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 폭탄의 이름은 바로 굉폭뢰.
한 발만 터져도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위력을 가진 금지 무기였다.
너무 위험해 국가에서 사용을 금지했다.
쾅!
하나가 터지자 이화폭우정이 조각나면서 더욱 많은 파편을 뿌려댔다.
그와 더불어 연달아 날아가 터지는 굉폭뢰.
“아악!”
“막아라!”
“구오오오.”
폭우이화정에 이어 굉폭뢰까지 천외천 측 진영을 혼란스럽게 했다.
호신강기가 깨졌다.
파편으로 인해 살점이 뜯고 목숨을 앗아갔다.
굉장한 위력.
두 가지 무기를 함께 사용하니 시너지가 엄청났다.
“오랜만에 손맛을 느끼니 짜릿하구먼. 끌끌.”
주변의 건물이 무너지건 말건.
정심호는 굉폭뢰를 마구잡이로 던져댔다.
고층 빌딩이 아래로 기울어지며 천외천을 덮쳤다.
“이놈들아. 어떠냐. 이래도 한국이 우스워 보이냐. 낄낄.”
혼자 굉폭뢰를 던지고 혼자 웃고 있으니 꼭 미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내 오늘 한국의 매운맛을 보여 줄 테다. 만천단도 공격에 합류하거라.”
“예! 태상가주.”
정심호의 호위단인 만천단까지 암기를 뿌렸다.
암기로 하늘이 가득했다.
천외천은 방어로 인해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 * *
그 시각.
검제의 지하동 수련실에는 하나의 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왜… 퀘스트가 여길 가리키는 거지?”
박혁진은 의문을 떠올렸다.
청룡이 다시 퀘스트를 부여했는데 홀로그램의 네비가 수련실의 게이트를 가리켰다.
“이곳이 확실해?”
“그렇다니까.”
“우리가 수십 번이나 들락날락거렸는데 그동안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잖아?”
“나야 모르지. 갑자기 퀘스트가 주어진 거야.”
“청룡이 퀘스트를 내려준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진짜라니까. 누나한테 말 안 하고 혼자 퀘스트를 깨고 싶은데 같이 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말한 거야.”
박혁진은 박정연에게 청룡이 퀘스트를 내려줬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하나 박정연은 믿지 않았다.
사신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데 이 사실을 어떻게 믿나.
아니 믿는다 쳐도 왜 박혁진에게 퀘스트를 부여한 걸까.
모든 게 의문이었다.
“눈 딱 감고 한번 가 보자. 밑져야 본전이잖아.”
“그렇긴 한데… 우리끼린 위험할 수도 있어.”
“준이한테 위화감을 느끼고 예전처럼 못 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위험한 게 나아.”
이준이란 이름이 나오자 박정연의 눈빛이 변했다.
“인정.”
“그러니까 가자. 청룡이 수련시켜준다잖아.”
“죽기야 더 하겠어?”
“말 바꾸기 없다?”
“알았어. 들어가기나 해.”
박정연이 말을 바꿀까 봐 박혁진은 곧장 게이트에 몸을 던졌다.
그녀도 박혁진을 따라 게이트로 들어갔다.
지하동에 둥실 떠 있던 게이트가 하얀색으로 바뀌며 쇠사슬이 걸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봉인한 모습.
이 사실을 모르는 두 남매는 게이트에서 눈을 떴다.
맑고 푸른 초원이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누나 분위기가 바뀐 것 같지 않아?”
“응. 보이던 몬스터도 사라졌어.”
지하 수련동 게이트는 각종 등급의 몬스터가 존재했다.
화이트부터 레드급 몬스터까지 있었는데 현재는 그 어떤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퀘스트 네비를 따라가 볼게.”
박혁진은 박정연과 함께 초원을 걸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
걸어간다면 한세월은 걸릴 것 같아 경공을 이용했다.
두 사람이 밟은 잎사귀가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앞으로 쭉 뻗어나가는 두 개의 신형.
남매가 도착한 곳은 절벽이었다.
“여기야?”
“어. 이 밑으로 내려가야 해.”
아래를 보자 뿌연 안개로 가득했다.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
하지만 뛰어내려야 했다.
스르릉-
박정연이 검을 뽑았다.
끝없이 추락할 걸 대비해 벽에 박아 넣어 속도를 늦추기 위해 꺼냈다.
“가자.”
“응.”
박정연과 박혁진이 밑으로 뛰어내렸다.
신형이 아래로 쭉 빨려 들어가는 듯.
하강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끝도 없이 떨어졌다.
“이쯤에서 속도를 줄여.”
박정연의 말에 박혁진이 천월을 벽에 박아 넣었다.
그그그극-
벽에 검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후우우. 누나 괜찮아?”
“응. 괜찮아. 그런데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하는 거야?”
“설마 왔던 것보다 더 내려가겠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두 사람은 왔던 것보다 조금 더 내려가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아.”
“정말… 있었어. 청룡이.”
박혁진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곤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박정연도 똑같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마리의 용.
몸 전체가 뱀의 비늘을 두르고 있으며 사자의 발톱을 지니고 있는 게 보였다.
푸른 뇌전이 흐르는 용이 두 사람을 향해 음성을 토해냈다.
[잘 찾아왔다. 뇌전검왕의 후예들이여.]
* * *
정심호와 만천단이 암기를 마구 뿌리고 있을 때였다.
퍽 소리와 함께 만천단 인원의 어깨가 뻥 뚫렸다.
“위험해요!”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인원의 머리가 터졌다.
연이어 죽은 만천단의 인원들.
이렇게 쉽게 죽을 각성자가 아닌데 말 그대로 즉사했다.
“뭐, 뭐야?”
정심호가 폭약 던지는 걸 멈추곤 당황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수하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사이 은밀하고 파괴적인 경력이 다가오는 게 이준에게 느껴졌다.
“쳇.”
이준이 움직였다.
만천단의 앞에 나타난 그가 파멸겁을 꺼내 창막을 펼쳤다.
펑!
창막 앞에서 경기가 터졌다.
“소림의 백보신권이에요.”
백 보 밖에서도 상대를 맞출 수 있는 소림의 절예였다.
격공류라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게 가능했다.
퍼벙펑펑!
이준이 허공에 연달아 창을 휘두르자 공기가 터져 나갔다.
말하는 와중에도 적들은 공격을 해 오고 있었다.
“1차 저지선의 함정을 발동하고 저희는 2차로 빠지죠.”
“공격을 안 하고?”
이준의 판단에 정심호가 의아해했다.
정심호는 천외천과 꽤 해 볼 만 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선과 이선, 그리고 그들이 아끼는 제자가 없을 때의 이야기.
아군의 피해가 심각하게 발생할지 모른다.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뒤로 빠지는 거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천외천만 있는 게 아니다.
레드급과 블랙급 몬스터가 있었다.
적들이 차륜전으로 나온다면 피해를 보는 건 자신들뿐.
처음부터 많은 힘을 소비할 순 없었다.
길게 싸움을 봐야 했다.
“시간을 끌면서 적들의 힘을 빼놓는 게 저희의 전략이에요.”
가문에만 박혀 있는 정심호긴 하나 세상이 돌아가는 걸 등진 건 아니다.
이준이 창제라는 사실을 그도 알았기에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곳의 지휘관은 자네 같으니 따르겠네.”
“서울까지만 끌고 들어가면 마음껏 싸우실 수 있을 겁니다.”
“알았네. 만천단은 뒤로 물러난다.”
이준은 검제와 눈을 마주쳤다.
“먼저 시흥으로 가 있겠소.”
“곧 뒤따라갈게요.”
고개를 끄덕이곤 신기지가에서 깔아둔 진을 발동시켰다.
천외천이 서 있는 자리 아래.
하얀빛이 뿜어지며 그들을 덮쳤다.
미리 깔아둔 진은 환영진이었다.
천외천에겐 쉬운 진법일진 모르지만 그래도 희생이 아예 없진 않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몬스터들이 허우적거리며 자기 동족을 죽이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은 게 문제네.”
현재까지 일선과 이선은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차라리 여기에 나고쉬의 실을 설치할 걸 그랬나?”
잠시 고민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여긴 서울보다 게이트가 더 많은 지역이야. 피를 잘못 봤다간 균열이 대량으로 발생할지 몰라.”
균열이 일어나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생명이었다.
한 장소에서 수백, 수천의 생명이 사라지면 생기는 게 균열이다.
그리고 주변 게이트와 연계를 이루니.
자칫하다간 대량의 게이트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서울숲에 나고쉬의 실을 설치한 이유기도 했다.
그곳이라면 많은 목숨을 거둬도 문제없으니까.
주변 게이트에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은 서울숲 말고는 몇 개 없었다.
“환영진이 깨졌어. 생각보다 목숨을 덜 잃었는데?”
“저놈을 잡아라!”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마겁이다. 뺏어서 사백께 바쳐야 한다.”
무승들이 일제히 이준에게 날아왔다.
무당의 도인들과 몬스터도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한 번 잡아 보든가.”
이준은 그들이 따라붙을 수 있을 만큼 거리를 준 후 경공을 펼쳤다.
간혹 뒤를 돌아 창기와 장법을 날리기도 했다.
“컥!”
“악.”
사형제가 쓰러지고 몬스터가 죽어도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경공을 펼치면서도 공격에 대비하라!”
“쥐새끼 같은 놈,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냐.”
“마겁을 내려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이준의 손에 들린 파멸겁에 꽂혀 있었다.
한편 쉘터에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영상을 봤다.
가문 연맹회에서 경고한 이들.
천외천이 모습을 드러내자 경악했다.
인간이 게이트를 소환한 게 그대로 영상에 담겼기 때문.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