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이준이 불의 봉우리로 향했다.
경공을 펼쳐 남쪽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대한민국의 남쪽 땅끝 마을인 해남에 도착한 이준.
“후우. 가다가 물에 빠지는 거 아니겠죠?”
[물에 빠지면 무공 때려치워야겠지. 고금제일인의 제자라 말하고 다니지 말거라. 사부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으니 말이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그렇다고 바로 손절치시네요.”
이준이 입술을 앞으로 삐죽 내밀곤 심호흡을 했다.
눈앞에 펼쳐진 건 드넓은 바다였다.
목적지는 바다 너머에 있는 섬, 제주도였다.
비행기는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탈락.
경공을 펼쳐 바다를 건너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경공을 사용해 수십 킬로나 되는 바다를 건너는 건 처음이었다.
“갑니다!”
팟-
이준이 땅을 박찼다.
발끝이 물에 닿는 순간 몸이 아래로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발끝이 처음 물에 닿은 순간 빼고는 물 바로 위의 공기를 밟으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사부님. 저 지금 물을 가로지르고 있어요!”
[그깟 등평도수 가지고 좋아하지 말거라. 이 사부의 얼굴이 화끈거리는구나. 화경의 경지로 물 위를 걷는다고 좋아하다니 쯧쯧.]
그것도 무극군림보라는 희대의 보법이자 경신법으로 말이다.
무극자는 이준에게 핀잔을 하면서도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큰 주인은 해맑은 제자가 마냥 좋은가 보지?]
[큼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다른 제자들한테도 그 같은 미소를 보였으면 얼마나 좋아?]
[그럴 수 없었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더냐.]
[그래도 옛정이라는 게 있잖아. 어렸을 적에는 놈들의 비밀을 몰랐으니 그리 매정할 필요는 없었지.]
[됐다. 옛이야기는 그만하자꾸나.]
무극자가 입을 다물었다.
흑염마조도 더는 무극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무거운 침묵으로 배려를 했다.
그러는 사이.
탁!
어느새 이준이 제주도에 도착했다.
과천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무극군림보는 언제 써도 기분이 좋네요.”
[끌끌. 사부의 최애 무공이기도 하느니라.]
“천마가 사부님의 말을 들으면 저승에서 벌떡 일어나겠어요.”
[노부보다 강하게 만들던가. 어정쩡한 성능으로 만든 놈 잘못이다.]
“날강도.”
[뭬야!?]
“아니 저기 날강도 있다고요.”
[어디?]
“어? 잘못 봤나?”
[크음… 이 찜찜한 기분은 뭐지?]
무극자가 뱁새눈을 뜬 채 이준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시선을 무시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제주도의 중앙.
한라산이었다.
게이트가 생기고 나서부터 화산 활동을 시작한 산.
산 주변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검산 그룹 영역은 죄다 서울, 경기도에 있는데 한라산 게이트가 좋은 건 어떻게 알고 딱 이 곳만 선점했데.”
아니다.
검산 그룹은 한라산 게이트가 좋은지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건 한라산에 수많은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
게이트의 숫자가 많아 여길 차지하고 있었던 거다.
게이트 하나, 하나는 금맥과 같은 값어치를 했으니까 말이다.
이준은 용암이 흐르는 곳을 지나 한라산 정상에 올라섰다.
“여긴가?”
비석 앞에 섰다.
그리고 봉황 비녀를 꺼내 비석을 향해 내리쳤다.
쩌억 소리와 함께 비석이 갈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밑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봉황 비녀의 기능이 작동했습니다.]
[숨어 있던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검은 아지랑이는 한곳에 뭉쳐 원을 만들었다.
그 원은 점점 커졌다.
사람 얼굴만 하던 원이 2m 정도로 커지더니 이내 주변을 집어삼킬 듯한 크기가 됐다.
“최하급 블랙존 게이트면서도 최상급에 속할 수 있는 곳… 이게 불의 봉우리구나.”
[멍때리지 말고 들어가자.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어.]
흑염마조가 이준을 보챘다.
사대종의 수하를 얻는다는 기쁨보다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이준도 그 이유를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곤 게이트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게이트로 들어가자 한라산을 뒤덮었던 입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 * *
[블랙존 게이트인 불의 봉우리(염열 제1지대)에 입장하셨습니다.]
불의 봉우리는 다른 말로 염열지대라고도 한다.
정확히는 염열지대로 가는 통로 중 한 곳이라 보면 된다.
염열지대의 끝은 바로 남쪽의 지배자가 있는 장소였다.
흑염마조가 이준을 보챈 이유도 이 때문.
이곳에 오래 있다간 낭패를 볼지 모른다.
적의 심장부에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빨리 치고 빠져야 한다.]
“알고 있어.”
이준은 곧바로 움직였다.
불의 봉우리는 몇 개의 스테이지로 나눠지지 않았다.
이 장소 전체가 첫 번째 스테이지며 마지막 스테이지였다.
경공을 사용해서 달리자 얼마 안 가 보이는 몬스터.
샐러맨더였다.
일명 불의 도마뱀.
리자드맨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더 포악하게 생겼다.
샐러맨더를 보자 리자드맨이 귀엽게 보일 지경이었다.
“나, 저 몬스터 키우기 싫어.”
이준의 뜬금없는 말이다.
[사부도 제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구나.]
여기에 더해 무극자까지.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지 흑염마조는 곧바로 눈치챘다.
[본좌의 신봉자를 무시하는 거냐!]
“아니, 생김새가 키우고 싶게 생겼니?”
샐러맨더의 대검이 이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준이 몸을 틀어서 녀석의 공격을 흘린 것이다.
샐러맨더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제자의 말이 옳다. 귀여워야 키울 맛이 나지. 쟤들은 생김새가 영… 노부가 없는 사이 네 취향이 바뀐 것이냐?]
두 사제의 쿵짝이 아주 잘 맞았다.
합심해서 샐러맨더가 싫다고 외치고 있으니.
흑염마조로선 화가 머리끝까지 날 지경이었다.
[반쪽한테 죽고 싶나! 저 샐러맨더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반쪽을 이길 승산이 있다.]
흑염마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깡!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윽.”
이준이 신음을 토해 낸 건 덤이었다.
샐러맨더의 공격을 파멸겁으로 막았으나 다른 녀석의 무기가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다.
최하급 블랙존 게이트인데 몬스터의 행동은 정예와 다름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움직임이 좋네.”
이준이 무극군림보를 시전했다.
발이 바닥을 강타하자.
쿵!
대지가 거미줄같이 쩍 갈라졌다.
갈라진 사이로 용암이 튀어 올랐다.
이준이 사용한 건 일보 염.
대상을 공중으로 띄워 삼매진화를 하는 수법이었다.
샐러맨더들이 공중에 떴다.
이제 삼매진화가 진행될 차례였지만.
쿵쿵쿵.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제힘으로 허공섭물을 벗어났다.
처음 있는 일.
이준도 많이 당황해했다.
무극군림보의 일보를 빠져나온 샐러맨더를 본 무극자가 감탄했다.
[호오, 꽤 하는구나. 기를 역으로 돌려서 빠져나왔어.]
수십 마리의 샐러맨더가 진영을 이루었다.
“이놈들 뭐야!?”
콰앙!
이준의 파멸겁과 샐러맨더들의 무기가 부딪쳤다.
주르륵 뒤로 밀린 이준을 향해 나머지 샐러맨더가 공격해 왔다.
화살은 얼굴을 향해, 대검은 어깨를 향해, 검신이 기이하게 꺾인 곡도는 관절을 향해.
꼭 각성자가 합공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빌어먹을.”
이준은 혼원신공을 급히 끌어올려 호신강기를 펼쳤다.
주변에 회색 막이 생겼다.
샐러맨더의 무기가 그 회색 막에 막히며 불꽃을 튀겼다.
호신강기의 반탄력에 공격을 그만할 때도 됐지만.
까앙깡깡!
녀석들은 호신강기를 파괴할 기세로 공격을 가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신강기에 금이 갔다.
“미치겠네. 이래서 최하위 블랙급 몬스터이면서 최상급이라고도 했구나.”
이 불의 봉우리 안.
염열 1지대 안에서 만큼은 샐러맨더가 최상위 몬스터에 속했다.
[성화의 열기가 샐러맨더의 능력을 높여 주고 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더 강해질 거야.]
몸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강해지는 샐러맨더의 특징.
거기다가 이곳은 성화의 영역이었다.
버프를 받고 자기들 스스로 공격력을 올리는 것.
샐러맨더의 무서움이었다.
공격력에 한계가 있으면 모를까.
불의 봉우리 안에서만큼은 공격력에 한계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건 이준이었다.
“조야. 나 혼자서는 안 되겠어. 좀 도와줘.”
이준의 말에도 흑염마조는 꼼짝도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키우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냥 농담… 억!”
호신강기를 거둔 이준이 허리를 뒤로 다급히 눕혔다.
아슬아슬하게 얼굴 위를 가르고 지나가는 곡도였다.
그 바람에 앞머리가 뭉텅 잘려 나갔다.
“남자의 생명은 머리빨인데!”
버럭 소리쳤지만 정신이 없었다.
빈틈이 보인 찰나를 기가 막히게 알고 있는 샐러맨더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했다.
“시간 없다며! 빨리 도와줘.”
[괘씸한 마음이 들어서 안 도와주고 싶지만 본좌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지.]
[노부는 이미 샐러맨더의 능력을 파악하고 있었느니라. 그저 제자의 편을 조금 들어주고 싶었을 뿐. 마조는 서운해하지 말거라.]
바로 이준을 손절한 무극자였다.
그럼에도 흑염마조는 마음이 안 풀린 것 같았다.
[큰 주인이 더 나쁘다.]
원래 옆에서 거드는 사람이 더 꼴 뵈기 싫은 법.
딱 무극자의 포지션이었다.
흑염마조는 무극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곧장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날개를 활짝 펼치자 흑염의 덩어리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여기저기에 흑염의 불길이 일어나자 샐러맨더가 우왕좌왕했다.
대지에 흐르는 두 가지 기운.
성화의 힘과 흑염의 힘에 당황한 것이다.
[너희의 진짜 주인이 돌아왔다. 본좌를 경외하라.]
* * *
철혈검가의 안.
박춘식은 여전히 박혁진의 방에 있었다.
“어찌하여 깨어나지 않고 있느냐.”
며칠 전에 눈을 뜨고 다시 기절을 한 이후 박혁진은 계속 혼수상태였다.
의원을 불러다가 진찰을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손수 진맥을 해보기도 했으나 같은 뇌기를 지녀서인지 박혁진의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 걱정을 안 할 것인데…”
드르륵.
박혁진의 방문이 열렸다.
박춘식의 부인인 김혜연이었다.
“부인, 어떻게 되었소? 신의는?”
“오셨어요. 자리 좀 비켜 봐요.”
김혜연의 뒤에 신력권가의 이의태가 서 있었다.
“검제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철혈검가까지 발걸음을 하게 해서 미안하외다.”
“아닙니다. 철혈검가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지원하라는 가주의 명이 있었습니다.”
“창제에게는 내가 따로 감사의 인사를 하겠소.”
“그러면 잠시 환자를 보겠습니다.”
박춘식이 옆으로 비켰다.
이의태가 박혁진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시작했다.
“조심하시오. 내기를 잘못 주입하면 반탄력이 일어날 것이오.”
“알겠습니다.”
이의태가 눈을 감고 박혁진의 몸에 흐르는 내기를 읽었다.
‘뇌기가… 너무 많구나. 어떻게 사람의 몸에 이 정도의 뇌기가 존재한단 말인가?’
다행히 이의태의 기엔 반발력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 언제 거부 반응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는 조심스럽게 손목을 놓았다.
‘뇌기를 몸에서 강제로 빼 주든지, 아니면 기운을 안정시켜야 한다. 지금의 상태는 주화입마와 같아.’
이의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박혁진은 철혈검가의 후계자.
대를 이를 적통이다.
한데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떻소?”
“말씀드리기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많이 안 좋소?”
“아무래도 주화입마인 것 같습니다.”
“아.”
“부인! 괜찮소?”
“괜… 찮아요.”
김혜연이 이마를 붙잡고 옆으로 휘청였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의태를 향해 말했다.
“방도가 아예 없는 건가요?”
“기를 완벽히 컨트롤… 아!”
이의태의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막대한 내공을 가졌으며 그걸 바탕으로 기의 컨트롤이 신의 경지에 달한 한 사람.
“저희 가주라면 혁진 군의 막대한 기를 컨트롤할 수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