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정예은이 철왕의 뒤를 잇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전생에 천외천과 싸울 때 어땠나.
들고 있는 무기가 그들과 싸우는 족족 부서졌다.
실력의 차이가 확연한 것도 맞지만 무기의 차이도 났다.
천외천이 든 무기들은 하나 같이 AA급에 해당하는 장비였으니까.
정예은이 철왕의 뒤를 이어, 질 높은 아티팩트를 만들어 공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녀를 가르치는 동안 봤는데 확실히 제조와 제작 능력을 타고 났다.
게다가 관심도 보조 능력에 더 있으니 괜찮았다.
“알았어.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준이 흔쾌히 수락하자 정예은이 활짝 웃었다.
철장의 망치는 제작 능력에 특화된 아티팩트.
이 망치를 통해서 장비를 만든다면 부가적인 게 옵션이 더 붙는다.
과거 이 망치를 얻은 만독암가의 인물이 한탄한 게 있었다.
조금만 더 자신에게 시간이 있었더라면 아군의 무기가 이렇게 맥없이 부러지지 않았을 거라고.
이준도 같은 생각이었다.
천외천의 무기들은 죄다 명검급.
어정쩡한 무기로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철장의 망치로 제작된 무기만 그나마 좀 합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마저도 숙련도가 굉장히 낮았을 때 이야기니 만약 숙련도가 높아지고 제대로 된 무기가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처럼 맥없이 무기가 부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은이는 철왕의 뒤를 잇게 해야겠어.’
이준은 마지막 한지유의 무기를 골랐다.
그녀가 사용하는 건 연검.
이곳에 있는 연검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특이하게 생긴 작은 단검 류.
일반 검신의 길이에 절반밖에 되지 않은 검이 벽에 걸려 있었다.
[참백연]
등급: AA(각성 전)
설명: 장백검문의 검후가 사용했던 걸로 알려졌습니다. 혼을 가르는 검이라 하여 참백연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복마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만지면 일반 병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효과: 민첩 +88, 정신력 +50, 마인에 대한 공격력 +35%
[장백검문의 연검이라면 저 아이의 물건이구나. 이곳에 검후의 물건이 있다니, 운이 좋은 아이로고.]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였다.
사부가 말한 것처럼 한지유는 운이 정말 좋았다.
자신이 직접 겪어 본 결과 무기와 상성이 잘 맞는 무공은 그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예로 박혁진을 들 수 있었다.
녀석이 천월로 뇌신공을 펼쳤을 때의 움직임은 그 어떤 때보다 빨랐다.
자신도 간혹 녀석의 신형을 놓칠 때도 있었다.
그만큼 시너지가 극대화됐다는 소리.
한지유도 새로 익힌 무공을 참백연으로 시전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다.
“지유는 이걸로 해.”
이준이 보잘것없는 걸 추천해 주자 옆에 있던 한민성이 이유를 물었다.
“특이한 아티팩트긴 하나, 실상은 그저 평범한 검이네. 저걸 선택한 연유라도 있나?”
“겉보기에는 평범하죠. 하지만 딱 지유의 물건이에요. 저 아티팩트를 선택 안 하면 지유는 평생을 후회할 거예요.”
이준의 말에 한지유가 참백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웅웅.
아주 작게 참백연이 떨려 왔다.
한지유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거리를 좁혔다.
그럴수록 참백연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지유가 참백연을 붙잡은 순간.
검신의 길이가 길어지며 빛을 뿜어냈다.
“윽.”
환한 빛에 모두가 손으로 눈을 가려야만 했다.
빛이 사라졌다.
감았던 눈을 뜬 한지유.
고개를 내려 참백연을 보니 그녀의 눈에 참백연의 정보가 들어 왔다.
이준에게만 보였던 정보.
신병에 속한 참백연이 한지유를 선택함에 따라 정보를 공개한 것이다.
“아.”
자신의 무공과 관련된 무기라는 걸 안 한지유가 토끼 눈이 되었다.
“뭔데 무기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박혁진이 흥분을 하며 말했지만 모두가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준은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젓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자신이 고를 차례.
이곳에서 두 개의 아티팩트를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한 개는 이미 정해 놓았다.
그 아티팩트를 갖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달빛의 지배자가 4대 성역의 금지에 당도했습니다.]
‘두 달은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나? 빠르면 한 달 이내로 올 거란 생각은 했는데 일찍 왔네?’
달빛의 지배자가 귀속을 청한다는 메시지가 왔을 때부터 3주가 지났다.
아직 일주일이 남았는데 의외로 빨리 도착한 것이다.
[달빛의 지배자가 다급히 문을 두드립니다. 게이트의 문을 여시겠습니까? (Y/N)]
‘응. 열어 줘.’
이준은 메시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메시지를 끄고 황금빛 비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티팩트의 이름은 봉황 비녀.
이준이 알고 있는 정보대로라면 이곳에서 제일 좋은 아티팩트였다.
최하급 블랙존 게이트인 염열지대를 열 열쇠였다.
‘뇌령석 아니었으면 봉황 비녀가 제일 좋은 아티팩트였을 텐데 밀렸네.’
그렇다고 아쉽진 않았다.
박혁진도 좋은 아티팩트를 가져야 나중에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기에 괜찮았다.
“우선 하나는 이걸로 할게요.”
“이준 선생이 그 비녀를 선택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네만…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왜 이걸 선택하냐고요?”
한민성은 지하 동에 있는 동안 계속 질문을 던졌다.
왜 그 아티팩트를 선택하냐.
이유가 있냐.
궁금증도 있겠지만 정보를 원하는 것이다.
상대방과 말을 섞다 보면 입에서 중요한 정보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한민성이 귀찮게 질문을 하는 이유였다.
“그렇네… 혹, 여자에게 선물을 주려고 고른 것인가? 내가 봐도 그 비녀는 굉장히 고급져서 머리에 꽂고 다니면 굉장히 눈에 띌 것 같네.”
하지만 이준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아니, 여태까지는 다 예상한 질문이었는데 지금의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아…닌데요?”
“부끄러워할 필요 없네. 이준 선생도 혈기 왕성할 나이지 않나. 여자를 사귄다 해서 이상할 게 전혀 없어.”
한민성의 말에 박정연은 노골적으로 비녀를 쳐다봤다.
한지유는 관심이 없는 척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온 신경은 비녀에 꽂혀 있었다.
‘저 비녀 탐이 나. 내 긴 머리에 딱인데. 노골적으로 달라하면 준이가 싫어하겠지?’
‘…난 단발이라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닌데 왜 이렇게 섭섭한 걸까…?’
박정연과 한지유는 각자 속으로 비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이준이 지하 동에서 얻으려 하는 아티팩트.
분명 의미 있는 물건일 것이라 생각한 그녀들이었다.
[제자야. 말 잘해야 할 것이야. 아니면 네게 아주 큰 고난이 닥칠 것이니라. 여자를 잘 아는 사부의 말을 꼭 귀담아 들어야 하느니라.]
무극자 사부의 충고였다.
‘사부님까지 왜 그러세요.’
[이 사부는 제자의 안위가 심히 걱정이니라.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할까 노파심에 하는 말이다.]
‘전 이 비녀 여자한테 줄 생각 없거든요. 제가 무슨 호구도 아니고 이 귀한 걸 왜 남한테 줘요.’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말거라. 아니면 후환이 두려울 것이니라.]
그러나 이준은 무극자 사부의 충고를 무시해 버렸다.
무려 천년이 넘는 경험을 말이다.
이준은 당당한 목소리로 한민성 이사장에게 대답했다.
“이사장님. 제가 여자가 어딨습니까. 아니 있다고 해도 이 귀한 아티팩트를 왜 줘요? 제가 호구처럼 보여요?”
너무도 당당한 말에 한민성이 당황해했다.
“아, 아니었는가. 내 잠시 착각을 했나 보네.”
그와 동시에 한쪽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박정연과 한지유가 있는 곳이었다.
“나머지 하나도 빨리 고르고 나가죠.”
이준이 걸음을 옮기는데 두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박정연과 한지유는 이준을 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저 두 사람은 또 왜 저런데. 참 여자들은 피곤해.’
[아이고. 제자야. 이 아둔한 놈을 두고 내가 어찌 사라질꼬.]
이준의 행태에 무극자 사부는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아야만 했다.
* * *
그 무렵.
평화로운 4대 성지의 금역에 손님이 찾아왔다.
지잉-
금역의 중앙, 허공에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꽤 많은 인원.
하나같이 등에 날개를 달고 있었다.
하나 꼬락서니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추격을 당한 듯 상처투성이었다.
철퍼덕.
금역에 새로 나타난 이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처음 발견한 스케먼이 테구르를 황급히 찾았다.
“테, 테구르 니이임!”
수하의 부름에 이준의 보물 창고를 관리하고 있던 테구르가 성질을 내었다.
“무슨 일이야! 나 지금 주인님의 창고를 정리하고 있는 거 안 보여?”
테구르의 1순위는 언제나 이준이었다.
주인님의 기쁨은 종인 테구르의 기쁨.
보물 창고의 물건을 반질반질 닦아 놓으면 분명 주인인 이준이 좋아할 거라 여겼다.
때문에 그는 이 시간을 아주 귀하게 보냈다.
“모, 몬스터가 쳐들어왔습니다요!”
“몬스터? 감히 어떤 겁 없는 새끼들이 이곳에 쳐들어온단 말이야! 가자. 내가 직접 봐야겠어.”
테구르는 4대 성역의 금지에서 집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곳의 전반적인 일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만년금구인 황금이를 제외하고 제일 강한 샥쿠조차 일이 있으면 테구르에게 와서 도움을 청할 정도.
테구르는 집사직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타 게이트에서 금역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관리하는 것도 집사로서의 일이었다.
테구르가 이준의 보물 창고에서 나와 침입자를 향해 달려갔다.
“이 만신창이는 뭐냐?”
싸움을 각오하고 온 테구르가 눈을 크게 떴다.
침입자들의 상태가 아주 걸레짝이었던 것.
싸울 필요도 없었다.
쓰러져 있는 페어리 중 한 명이 힘겹게 말을 걸어왔다.
“로…티틸…을 부, 불러… 줘…”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너무 작아서 안 들렸는데.”
“저는 로티틸 님의 이름까지 들었습니다요.”
“로티틸 님?”
테구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역에 침입한 페어리는 로티틸과 같은 종족.
로티틸의 이름이 나오자 조심스러워졌다.
“로티틸 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지?…요?”
테구르가 어정쩡한 말투로 물어봤다.
그의 감이 말했다.
예의를 차리는 게 맞다고.
자신보다 약하다고 함부로 대했는데 만약 로티틸의 손님이라면?
무례를 저지른 것과 다름없는 거였다.
“…로티…틸…”
하나 침입자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난감한 상황에 테구르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스케먼이 살며시 말했다.
“그냥 로티틸 님을 불러올까요?”
“그러는 게 좋겠다. 언능 갔다 와.”
“옙!”
잠시후 로티틸과 심부름을 갔던 스케먼이 돌아왔다.
“절 찾으셨다고… 헉! 펠리아스 님!?”
쓰러져 있는 페어리의 얼굴을 확인하자 로티틸이 화들짝 놀랐다.
침입자의 이름은 펠리아스.
페어리 왕 밑에 있는 4대 페어리 중 달빛을 지배하는 자였다.
로티틸과의 관계는 친한 삼촌 격이다.
“펠리아스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로티틸이 쓰러져 있는 이를 흔들어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에 오고 얼마 있다가 기절한 것 같습니다요.”
“테구르 님! 어서 다른 페어리를 불러 주세요. 꽃밭에 꽃잎도 따서 가져와 주시고요.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요! 애들아. 로티틸 님 말씀 들었지? 빨리 움직여.”
“옙!”
테구르와 스케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로티틸은 다급히 펠리아스를 치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