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이준은 무극자 사부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그냥 무시하면 분명 단단히 삐지겠지.
사부가 삐지면 골치아픈 건 자신이다.
물론 무공명이 뭔지 듣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아둔한 제자에게 자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큼큼. 이 사부가 특별히 가르쳐 주겠노라. 내 말하지만 그 어떤 제자한테도 가르쳐 주지 않은 무공명이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불초 제자. 사부님을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시면 제사상 기깔나게….’
이준은 말을 하면서도 너무 나갔다고 생각했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재빠르게 화제 전환하는 게 상책.
‘그 하늘도 떨게 한다는 무공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무공의 값어치를 하늘로 후려치자, 무극자가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하늘도 떨게 하는 무공의 이름은.]
‘이름은?’
[패천기공이니라.]
이름만 들어서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파천멸기가 이름에는 더 임팩트가 있어서 그런가.
그렇게 감흥이 대단하지 않았다.
이준의 반응에 무극자의 승부욕이 발동되었다.
이름만 알려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가 패천기공이 어떤 건지 일일이 설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자가 아둔해서 잘 모르나본데 패천기공은 파천멸기, 즉 무극기의 강한 부분만 골라서 만들었느니라.]
‘무극기도 파천멸기의 좋은 부분만 골랐다면서요?’
[그랬지?]
‘그러면 파천멸기보다 무극기고 무극기보다 패천기공이라는 말씀이세요?’
[얼추 비슷하느니라.]
‘뭐, 무극기를 사용해 봐야 대단한지 알죠. 지금은 모르겠네요.’
이준의 말투가 굉장히 거슬렸을까.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단전에 기를 잔뜩 모아 사자후를 쓰려는 사람이랄까.
아무튼 그 전조 증상에 이준이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다.
‘아무래도 무극기를 써 봐야 사부님의 위대함을 알 것 같다는 소리입니다. 지금으로선 제자의 혜안이 그리 넓지 않으니 사부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이준의 말에 말이 없던 무극자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노성이 터져 나오진 않았다.
[아는 게 별로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사부는 마음이 대해 같아 다 이해할 수 있느니라.]
이준과 무극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해안가에서 어느새 시합이 열리는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
이준이 경기를 보려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무슨 일이야?”
남선호가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다.
가슴에는 기다란 도의 흔적이 보였다.
흔적에서는 이준의 눈에만 보이는 검은 연기 또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 갔었어? 선호 미즈시마의 도에 당했어.”
“당해?”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륜마멸진의 방어식에 적색무의 방어력이면 미즈시마 정도의 도는 막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미즈시마는? 어떻게 됐는데?”
남선호가 이렇게 됐다면 미즈시마 요시오라도 큰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어떻게 되긴 걸어서 잘 나갔지. 그 새끼 선호를 죽이려고 했어. 내가 안 나섰다면 선호는 목이 잘렸을지 몰라.”
박혁진의 말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각을 잘못 쟀나?’
[너는 잘 봤을 수도 있지만, 저 녀석이 돌발 행동을 했을 수도 있지. 이 부분까지는 생각 못 하지 않았느냐.]
‘돌발 행동….’
이준은 남선호가 자신의 말대로만 할 줄 알았다.
설마 그가 다른 행동을 할까란 의심을 하지 못했다.
이준이 간과한 건 하나.
E급이던 남선호도 A급에 올라섰다는 것.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위험할 때였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었다.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위험하다고.
딱 그 짝이었다.
* * *
당소미는 수하들과 해안가로 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녀가 본 것은 다름 아닌 폐허.
진도 9의 강진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요즘 건물들은 몬스터 때문에 최첨단 방어벽 설계가 추가로 들어갔다.
내진 설계로 인해 웬만한 충격에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데.
근처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이곳과 멀리 떨어진 경기장에는 영향이 없는지.
시합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푸스스.
당소미의 팔이 움직였다.
중국의 각성자 협회에서 나온 B등급의 각성자가 한숨에 혈수가 되었다.
당소미의 이명은 독나찰.
그녀는 악독한 손속과 더불어 성격도 잔인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독수로 만들어 버렸다.
“당장 알아봐!”
당소미가 뒤를 향해 소리쳤다.
“명!”
그녀의 수하들이 싹 흩어졌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은 자신의 심복.
은오였다.
은살대는 그녀에게 있어서 쏠쏠한 살수 집단.
그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보았던가.
사천당가에서 쫓겨날 팔자에서 은살대 덕분에 여성 최초로 가주가 되었다.
그런 은살대가 무림도 아닌, 다른 세계에서 쓸쓸히 죽어만 갔다.
시체라도 남아 있다면 좋으련만.
시체들이 죄다 고깃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뿌득.
“어떤 개자식이야!”
그녀의 몸에서 파천멸기의 파편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이 닿은 곳은 모두 녹아내렸다.
건물이며, 풀이며 심지어 바닷물까지 수증기로 증발했다.
“분명 전륜살상진을 알아보라고 했어. 그 참에 이준에 대한 정보도 캐고 그런데 왜 여기서 죽어 있는 거니 은오야.”
당소미가 싸늘한 표정을 한 채 은오로 보이는 시체 앞에서 중얼거렸다.
검은 무복을 입은 몸통.
가슴 부위가 뻥 뚫려 있었다.
목에는 초승달 모양의 목걸이가 반쯤 부서진 채였다.
사천당가 방계 중 직계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주는 표식이었다.
목걸이를 보고 이 시체의 주인이 은오인 걸 안 것이다.
그녀가 은오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보고입니다.”
“말해.”
“흔적이 거의 지워졌지만, 남아 있는 걸 토대로 추측해 보면… 난장판이 된 장내를 제외하고는 은살대가 차근차근 사냥을 당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사냥?”
“예….”
“은살대가 사냥을 하는 게 아니고 사냥을 당해?”
“제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천외천의 그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버럭 할 말이었다.
그만큼 은살대의 사냥 실력은 뛰어났다.
그런데 사냥을 한 게 아니라 도리어 당했다고 한다.
기가 차는 헛소리.
당소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한번 되물었다.
“정말 은살대가 사냥을 당했어? 누구한테?”
“많은 흔적이 지워져 그것까지 알아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알아낼 수 있다는 소리잖아.”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무조건 찾아내!”
“명을 받듭니다.”
당소미의 수하들이 흩어졌다.
남아 있는 수하 중 은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준의 가능성은 배제해 두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사냥을 당했다잖아. 암살에 관한 무공을 배워야지만 은살대를 사냥할 수 있어. 누가 AA급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사냥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도륙이라면 몰라도….”
힘으로 찍어 누른 것과 한 명, 한 명 소리 소문 없이 처치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특히 살수에 특화된 무공이 아니면 더욱더.
백영창법은 은살대를 도륙하는 무공에 더 걸맞지, 지금처럼 암살에는 특화되어 있지 않았다.
고수가 기척을 숨기고 접근해 몰래 죽인다?
한두 명은 가능하나 이렇게 많은 이들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럴 거면 살수 집단이 왜 유지되겠나.
개나소나 살수를 하지.
무엇보다 강력한 무공을 가졌다면 사냥할 필요도 없었다.
차라리 한꺼번에 몰살시키는 게 편하지.
변태 이상 성욕자가 아닌 이상, 이준은 범인에서 제외시켰다.
제3의 인물.
당소미는 이준 말고 다른 인물이 은살대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를 것이다.
이준이 누구의 무공을 이어받았는지.
만약 이준이 ‘그’의 무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용의선상에서 제외시키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무공은 파괴적이고 강맹하기도 했으며, 유령같이 은밀하기도 했으니까.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서 육신을 갈기갈기 찢고 말 테다.”
그녀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 *
남선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상처 부위에는 침이 수북이 꽂혀 있는 상태.
음양침답게 온기와 냉기가 번갈아 가며 상처를 치료했다.
서혜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남선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해 이준이 나섰다.
“내가 봐 볼게.”
서혜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준이 남선호의 앞에 앉았다.
남선호가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파천멸기의 파편은 제가 아니면 치료를 못 하네요.’
신력권가의 동의각주 이의태도 치료 못 하는 게 파천멸기의 파편이었다.
그나마 희망이 있는 건 그녀의 손녀 이지안뿐.
나중을 위해서, 파천멸기의 파편을 치료할 수 있는 각성자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에 서혜지에게 맡겨 본 것이다.
물론 실패였다.
역시나 파천멸기의 파편은 아무나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작 파편 쪼가리의 기운일 뿐인데 천외천이 아닌 현시대의 각성자에게는 최악의 상처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네.”
이준은 침이 꽂힌 남선호의 가슴 부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혼원신공을 운용했다.
흡자결.
흡혈마공과는 결이 다른, 어쩌면 그 윗윗 단계의 기술이었다.
이준의 손을 타고 파천멸기의 파편이 올라왔다.
“미즈시마가 썼던 검은 기운이야!”
박혁진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치료 중이잖아! 조용해.”
박정연이 막지 않았다면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을 터.
다행히 그녀의 입막음으로 인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이준이 손을 거두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선호의 눈꺼풀이 떠졌다.
“으음…”
“선호야 괜찮아?”
박혁진의 말에 남선호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여긴 어디… 윽!”
그의 가슴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을 토해 냈다.
“치료실이야.”
“경기는 어떻게… 됐어? 내가… 졌지?”
“한 번 질 수도 있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앞으로 더 강해지면 되잖아?”
박혁진이 남선호를 위로했다.
“고, 고마워.”
남선호가 고맙다고 한 후 이준을 보았다.
얼음장 같은 얼굴.
장난기가 하나도 없었다.
“…미, 미안.”
이준에게 하는 말이다.
남선호도 자기의 실수는 아는 모양.
순순히 잘못을 빌었다.
“앞으로 내가 지시한 것과 다르게 움직이면 특별반에서는 아웃이야. 명심해. 실력이 늘었다고 자만하지 마.”
고저 없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음성은 대기실에 있는 모두에게 들렸다.
남선호뿐만이 아니라 특별반 전체에게 하는 경고.
다음 차례인 진경수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 또한 강해졌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일본 원숭이 새끼들을 한 주먹에 날려 버릴 각오를 했는데.
이준의 말에 의해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자칫 실수를 했다간 특별반에서 나가리.
그렇게 되면 인생이 평생 꼬일 것이다.
이준네 특별반은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갈 세대의 각성자.
오왕의 뒤를 이을 재목들이라 진경수는 자신했다.
그는 이준의 말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절대 선호 같은 실수는 안 돼! 어떻게 선생님의 마음을 돌렸는데 그럴 순 없지.’
전의를 다졌다.
일본 원숭이를 상대함에 있어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