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밤의 나락은, 암살자이자 정찰병인 다크 엘프의 근거지로 가야지만 볼 수 있는 몬스터였다.
‘이 근방에 정찰대 망루가 있다고 했지?’
공교롭게도 이준은 이미 붉은 산맥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몬스터 중에서도 굉장히 강한 종족에 속한 게 다크 엘프다.
천외천의 악마들은 이 다크 엘프의 정신을 제압해 세상을 파괴하는데 이용했다.
인간 중에 앞장 선 가문이 신력과 패왕이라면, 몬스터 중에는 다크 엘프와 뱀파이어 종족을 꼽았다.
그 덕분에 다크 엘프에 대한 걸 많이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그들에 대해 먼저 알아야 했으니까.
‘정찰대 망루의 인원은 총 네 명. 수는 적지만 근처의 망루와 다 이어져 있어서 소란이 일면 다크엘프의 본거지까지 알려지는데 10분도 안 걸려.’
하지만 걱정은 없다.
게이트에도 낮과 밤이 있었고, 정찰대의 인원이 망루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있었다.
정찰대의 인원이 망루 밖으로 나오는 시간은 정확히 저녁 8시.
밤의 나락이 빈틈을 보이는 시각이기도 했다.
‘10시간 정도 남았네.’
그동안 할 건 하나였다.
합공 연습.
각자 각성자로서 능력은 뛰어나지만 협동은 부족했다.
어느 한쪽만 강하면 다른 한쪽은 실력으로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밸런스가 무너질 터.
각자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되려 혼자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서로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게 바로 합격진이다.
“우선 밤의 나락을 상대하기 전 배울 게 하나 있습니다. 차 선생님.”
이준이 차경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준 대신에 차경진의 목소리가 학생들의 귀에 들려왔다.
“여러분이 새로 배우게 될 건 백호연격진입니다.”
“백호연격진이요?”
“연격진은 학교 공용 공격진으로 알고 있는데 백호연격진은 업그레이드 판인가?”
박혁진이 농담 삼아 말했다.
“맞습니다. 이준 선생님께서 연격진을 보시고 새로 만든 공격진입니다.”
차경진의 말에 박혁진이 입을 떡 벌렸다.
공격진을 새로 만든다는 건 각 가문의 각주들도 힘들었다.
박혁진의 할아버지인 검제도 불가능한 일.
현 시대의 각성자는 무협 소설에서 보던 무림인들처럼 무공을 재창조하진 못한다.
그저 게이트에 얻은 무공을 소화하는 게 다 일뿐.
이준이 한 일은 전무후무했다.
물론 백호연격진은 이준이 만든 게 아니었다.
무극자 사부가 형편없는 연격진을 보고 보완한 것을 익혔을 뿐이다.
“왜 점점 내가 아는 이준이 아닌 것 같지?”
멀게만 느껴지는 이준이 더욱더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간 느낌을 받은 박혁진이었다.
“어때? 네 매형 될 사람 멋지지 않니?”
“매형은 무슨. 침이나 닦고 말해. 누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걸?”
“뒤질래?”
“아니. 안 뒤질 건데.”
박혁진이 지지 않고 박정연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면서 이준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 자신이 보호해 줘야할 것만 같았던 친구가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젠 손에 잡히지도 않을 곳에 있었으니.
‘나도 더 노력해야 해. 준이한테 민폐가 되는 친구가 될 순 없어.’
그는 강해져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우선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박은비, 서혜지, 남선호 학생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차경진의 호명에 세 사람이 그녀의 곁으로 왔다.
방학동안 열심히 수련했던 합격진이다.
백호연격진은 최소 3인으로 이루어진 공격진.
인원이 추가 될수록 난이도도 높아지며 공격 또한 배로 증가했다.
“각자 자리로.”
차경진의 명령에 남선호가 전방에 섰다.
남선호의 뒤 편.
오른쪽엔 박은비가, 왼쪽엔 서혜지가 섰다.
중앙에는 차경진이 있었다.
세 사람이 차경진을 보호하는 형태였다.
이준이 그들의 맞은편으로 걸음을 옮기자.
“시작하십시오.”
“출!”
차경진의 외침에 대형을 유지한 채 남선호가 이준을 향해 돌진했다.
남선호의 주 무공은 쌍검술.
두 개의 검을 이용해 상대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몰아넣는 게 특기로 자리 잡혔다.
쉭쉭-
쌍검이 바람을 갈랐다.
목표는 이준의 몸통.
하나 그냥 맞아 줄 이준이 아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쌍검을 가뿐히 피하는 이준.
그가 남선호의 빈틈을 공격하려는 찰나.
화염에 감싸인 주먹이 불쑥 튀어나와 이준을 공격했다.
이준이 공격을 거두고 몸을 뒤로 뺐다.
전방의 빈틈을 중앙에 있는 사람이 메꾸는 게 백호연격진의 기능 중 하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
남선호의 자세와 공격이 무너지자, 그 자리를 대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왼쪽에 있던 서혜지가 이준을 향해 음양침을 날린 것이다.
상당히 빠른 전환.
마치 한 사람이 계속해서 공격을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준은 파멸겁을 돌려 음양침을 막아 냈다.
차장창창!
파멸겁에 막힌 음양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혜지의 공격이 끝나려는 찰나를 노려 이준이 손을 쭉 뻗었지만.
여김 없이 차경진의 주먹이 불을 뿜었다.
그리고 다시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박은비의 차례.
그녀의 손에 한빙장이 맺히며 이준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끊임이 없는 진법.
이게 바로 무극자가 연격진을 보완하여 만든 백호연격진이었다.
* * *
“허수야.”
“예. 형님.”
“네 눈엔 저 합격진이 어떻게 보이냐?”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너도 그렇게 보이지?”
“형님도 빈틈이 안 보이십니까? 형님이라면 그래도 약간의 틈은 찾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전혀… 안 보여.”
처음 합격진을 봤을 때는 익숙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격진을 업그레이드한 게 백호연격진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그럼에도 눈에 익은 듯한 느낌을 받은 건 이전 도귀 수하를 상대할 대 사용했던 그 합격진이기 때문이었다.
“저게 백호연격진일 줄은 몰랐어.”
그냥 합이 잘 맞는 정도라고 치부했었다.
지금은 어떤가.
합이 잘 맞는 건 당연했고, 공격 또한 아주 정교했다.
B급 초입에 있는 각성자라곤 믿기 힘들만큼 완벽한 공격이지 않나.
“준이는 사람을 놀래 키는 재주가 있어.”
“능력에 한계가 없는 분입니다.”
“인정한다.”
친구지만 존경스러웠다.
한편 이준이 손을 들어 박은비네 조의 공격을 멈춰 세웠다.
“꽤 익숙해졌습니다.”
“노력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앞으로 더 백호연격진을 연습한다면 밤의 나락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준의 말에 박은비를 비롯한 서혜지, 남선호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들의 등급은 원래 E급.
이준을 만나 특성을 얻고 급성장을 이루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올라왔다.
낮은 등급의 각성자가 몇 단계를 뛰어넘어 B급에 달한 사례는 많이 없었으니까.
한데 그것도 모자라 레드급 몬스터인 밤의 나락을 잡을 수 있단다.
일반 각성자에겐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서로 더 보완해야 할 점을 말했다.
“이준 쌤이 백호연격진은 공격이 끊기면 안 된다고 했어. 선호가 차 쌤을 믿고 더욱 적극적으로 나가는 게 어떨까?”
“그래도 돼요?”
“절 믿고 공격에 더 힘을 둬 보십시오.”
“그럴게요!”
“혜지는 음양침을 빠르게 회수하는 방법 찾았어?”
“아직. 음양침이 엄청 좋은 무기라 손으로 저절로 돌아오긴 한데 시간을 당기는 건 힘드네.”
“그건 차차 해결해 보자.”
박은비와 아이들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고받았다.
세 사람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그들을 보며 작게 웃던 이준이 나머지 조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범을 보았다시피 백호연격진은 공격을 멈추면 안 됩니다. 공격이 끊기는 순간! 백호연격진이 무너진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네!”
“다음 조 나오십시오. 그리고 차 선생님은 박은비 교육생네 조를 상대해 주시고요.”
* * *
백호연격진의 수련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밥도 먹지 않고 계속해서 합격진을 수련했다.
박은비네 조의 영향 때문.
B급 초입 각성자들의 공격이 특별반 학생들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자신들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경쟁자들.
경각심과 동시에 백호연격진의 위력을 보고 조금이라도 더 합격진에 대해 자세히 배우고 싶었다.
각성자에게 있어 무공은 하나의 삶.
특히 천재들에겐 새로운 무공을 배운다는 건 또 다른 재미였다.
학생들이 합격진을 맞추고 있을 때.
짝짝-
이준이 박수를 치며 그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밤의 나락을 상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녀석들을 상대하기 전에 식사부터 하겠습니다.”
“마지막 만찬인가?”
박혁진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모두가 박혁진의 말을 무시했다.
믿었던 허수마저도 말이다.
싸늘해진 분위기는 덤.
농담이 무시당하자,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는 박혁진이었다.
밥이 뚝딱 만들어지고.
우걱우걱.
특별반 학생들이 입도 열지 않은 채 밥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밥을 먹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한 식사였다.
이준도 학생들과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쌔, 쌤!”
그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이준이 가슴을 쓸어내리자 잠잠해졌다.
“바, 방금 뭐였어요?”
“밥 냄새 때문에 흥분한 것 같은데. 나올래?”
“뀨우!”
그가 겉옷인 도포를 걷자 파랑이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파랑아!”
그 누구보다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한지유였다.
“뀨웃!”
파랑이도 한지유가 반가운지 학생들의 머리 위를 발로 밟으며 한지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너도 왔구나?”
“뀨.”
파랑이가 얼굴을 한지유의 가슴에 비볐다.
그 모습을 본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저 녀석이!”
파랑이는 분명 수컷일 게 분명했다.
남자는 이준을 제외하곤 접근을 불허하지만, 여자들만큼은 유독 따르는 걸 보면 말이다.
특히 한지유와 박정연을.
“파랑아! 나는 안 반가워?”
“뀨뀨!”
파랑이가 고개를 들어 울어 댔다.
한지유는 파랑이를 뺏기지 않으려고 꽉 껴안았지만 녀석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와 박정연에게로 갔다.
그리고 한지유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했다.
어떻게 보면 반갑다고 표현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이준의 눈엔 전혀 아니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에잉. 쯧쯧.]
‘사, 사부님! 파랑이를 보세요. 쟤 수컷이 분명해요.’
[한낱 미물일 뿐이니라. 인간이 미물을 부러워해서 쓰겠느냐. 제자는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
‘제가 파랑이를 부러워하다니요! 오해입니다. 저 음흉한 자식 때문에 제가 오해를 받을 까봐….’
[저게 어딜 봐서 너를 오해할 얼굴들로 보이느냐. 정신 차리거라.]
파랑이가 나타나서인지, 이준의 존재감은 싹 사라졌다.
여자들의 시선은 온통 파랑이에 꽂혀 있었다.
차경진 또한 이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우쭈쭈. 그랬어? 이준 쌤이 그동안 많이 괴롭혔다고?”
“뀨웅….”
파랑이의 솟아오른 귀가 아래로 내려갔다.
“파, 파랑아 아니잖아. 우리 지금까지 잘 지냈잖아.”
“뀨.”
파랑이가 얼굴을 박정연의 겨드랑이에 파묻었다.
“참. 나쁜 사람이네. 어떻게 이런 귀여운 동물을 괴롭힐 수 있는 거야.”
“오해할 말은 하는 거 아니거든.”
이준이 악마 교관이 아닌 본래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랑이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정예나와 정예은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이 귀여운 강아지는 뭐야?”
“어떡해. 너무 예쁘다.”
“정연아. 얘 뭔데?”
“이준 쌤이 키우는 여우.”
“와, 정말 예쁘다.”
정예나가 파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예은도 파랑이의 탐스러운 털을 만지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게이트에 강아지 데리고 올 수 있으면 우리 댕댕이도 데리고 올 걸. 힝.”
정예은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준을 보았다.
“후우우우.”
이준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위험천만한 게이트 안에서 정줄을 놓고 파랑이만 신경 쓰고 있다니.
절대 학생들이 자신을 빼고 파랑이에게만 관심을 갖는 게 질투 나는 것이 아니었다.
게이트 안인데도 무사태평하게 있는 학생들을 봐주는 것도 선생으로서의 책무였다.
그러는 동시에 다짐했다.
곧 이 수모를 갚아주겠다고.
아주 뼛속까지.
파랑이는 거들떠보지도 못할 정도로 힘들게 해 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