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거대할 정도로 큰 앙상한 나무.
가지들이 한대 엉켜 뾰족한 창이 되어 일행을 공격하고 있었다.
“여긴 내가 맡을게.”
한지유가 거대한 나무 앞에서 연검을 휘둘렀다.
팽팽하던 검이 검은 뱀처럼 구불거리며 앞으로 뻗어나가더니.
뾰족한 나뭇가지를 잘라갔다.
부우욱!
연검이 나뭇가지를 자른 것도 모자라 나무의 몸통을 휘감았다.
둘레가 두꺼워서 연검이 나무를 다 감싸지 못했지만, 한지유는 그대로 검을 뒤로 잡아당겼다.
그윽- 소리가 나며 움직이는 나무가 멈췄다.
연검이 스치고 간 자리에 틈이 생기더니.
나무가 옆으로 쓰러졌다.
쿠웅.
한 마리의 몬스터를 해치운 한지유가 다른 몬스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쟤는 언제 더 강해졌데?”
방금 전 쓰러트린 몬스터는 나무 정령.
블루급 몬스터다.
공격력이 낮아 상위급 몬스터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방어력과 체력이 높았다.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질만큼 약하지 않았다.
“특성을 개화한 후에 더 강해졌다고 해요.”
“특성이요?”
“이준 도련님께 못 들으셨어요? 절친이라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몰랐어요.”
박혁진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학기 초에 한지유를 봤을 때 B급 끝자락에서 A급 초입이었다.
높은 등급에서 특성을 개화한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평생 특성을 개화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런데 한지유는 현재의 등급에서 특성을 얻은 것 같았다.
박혁진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높은 등급에서 특성을 개화하는 건 일반 특성이 아닌, 희귀 특성일 거다.
최하 A급.
그러니 지금과 같은 성장 속도를 보이는 거겠지.
“저 아이뿐만 아니라 저 아이들까지 도련님이 전부 특성을 개화해줬다고 하네요. 저도 도련님의 훈련에 참가한지 얼마 안 되서 특성을 얻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많은 걸 배웠어요.”
“준이가 특성을 얻게 해줬다고요?”
“아이들 말로는 그래요.”
박혁진의 입이 대발 튀어 나왔다.
이런 엄청난 정보를 가르쳐 주지도 않아 섭섭했다.
“이준 이 자식. 가문의 일만 끝나봐라. 뒤졌으!”
한동안 이걸로 울궈먹어야겠다.
‘감히 형에게 비밀을 만들어? 가만두지 않겠어!’
박혁진이 이준을 어떻게 갈굴까 생각하는 사이.
박정연의 검은 더욱 거칠었다.
파지직-
그녀의 검에는 뇌기가 잔뜩 흘렀다.
천뢰제왕신공을 사용해서 뿌리는 검초는 무지막지한 힘을 자랑했다.
쾅쾅쾅!
그녀의 검이 흔들릴 때마다 폭음이 연달아 일어났다.
“우리 준이가 이번에도 지유만 챙겼구나?”
그녀는 검을 휘두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엔 푸른 귀화가 폈다.
귀신의 눈빛에 웃고 있는 입.
거기다 홀로 중얼거리기까지.
검화인 줄 모르고 보면 광녀라고 착각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우리 준이가 말이야~ 어릴 때는 누나랑 결혼할 거라고 하더니 많이 컸네. 어느새 누나만 빼고 다른 애들만 챙겨주고 말이야.”
이준이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누가 태클이라도 걸면 목이라도 벨 기세였다.
파직- 파지직!
그녀의 기세는 엄청났다.
괜히 S급 신공을 익히고 있는 게 아닌 모양.
더해서 A급 무공까지.
아직까지 상위 특성을 개화하지 못한 박정연이 강한 이유기도 했다.
그녀의 검에 담긴 뇌기가 절정에 이르더니.
나무 정령을 향해 일제히 뿜어져 나갔다.
뇌전의 칼날들이 닿은 곳을 모조리 파괴하며 폭사했다.
콰아아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폭음이었다.
“후욱… 후욱… 우리 귀여운 준이가 계속 한눈을 파는 것 같네? 어떻게 하면 좋지?”
박정연의 혼잣말이 길어졌다.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뭇 섹시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어떤 것인지 아는 박혁진의 표정이 굳었다.
“준아. 고인의 명복을 빈다. 형이 네 몫까지 열심히 사마.”
그가 이준의 명복을 빌고 있을 때였다.
마침!
정말 우연찮게 이곳에 불청객이 제 발로 찾아왔다.
“여, 오랜만이다. 검룡.”
“도귀에 음귀까지? 너희가 여긴 무슨 일로 왔냐?”
“우리 영역에 무사고 학생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고 있나 한번 보러 왔지.”
“봤으니까 그만 가라. 잘못 걸렸다간 너희 오늘 죽을지 몰라.”
박혁진은 옆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엔 누나인 박정연이 걸려 있었다.
여전히 홀로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
이준에 대한 집착이 중증에 달해있는 상태였다.
“그건 너희겠지. 15가문 연맹 따위가 우리 사마련의 영역에서 사냥을 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
“야, 진짜 내가 인간적으로 니네가 불쌍해서 이야기 하는 거야. 너희 진짜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난 분명 경고 했다.”
“언제까지 기고만장해 있는지 보자. 여자들만 남겨두고 전부 죽여!”
도귀 길필성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각성자들이 무사고 학생들을 향해 쇄도했다.
경공을 펼치며 날아오는 사마련의 각성자들을 보며 박혁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고 난 모르겠다. 준이야 니 때문이니까 니가 책임져.”
그가 한숨을 푹 쉬며 뇌격검을 들어 올렸다.
* * *
“아 씨!”
“무슨 일이 십니까?”
옆에 있던 전 동의각주 이의태가 물었다.
“갑자기 뒷목이 서늘한 게 예감이 안 좋아요.”
“지안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겁니까?”
“아니요. 심법 초기화는 거의 다 끝났어요.”
“그러면 어떤 예감이 안 좋은지…?”
“저도 모르겠어요. 뭘까? 곧 위기가 다가올 것만 같은 이 불길한 건?”
이지안의 심법 초기화도 잘 된다.
이제 남은 건 수미천왕신공을 배우는 것뿐.
전 동의각주를 자신의 편으로 거의 돌아서게 했다.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고 있는데, 느낌이 싸한 게 지워지지 않았다.
허수의 신변에 위협이라도 있나 싶어 그에게 전화했지만.
“별 일 없다고? 알았어. 수련 열심히하고 있어.”
뚝.
아무 일 없단다.
그러다 문득 부재중 전화를 봤다.
“이걸 왜 이제야 본 거지?”
한지유에게서 온 전화였다.
왜 일까.
좀처럼 통화를 하기 싫은 까닭은.
손이 가지 않았다.
“한지유가 원인인 건 분명한데, 오늘 들어간 게이트가 사마련의 영역이라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텐데. 15가문 연맹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은 이상은.”
사마련은 악독한 집단이긴 하지만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멍청하지는 않았다.
걔들 중에 신기지가의 포지션을 맡은 두뇌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마련의 영역이라 해도 무사고 학생들.
즉, 15가문 연맹의 후계자들이 그들의 영역을 많이 드나들기도 했다.
사마련 측 후계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 사이가 나쁘다 하더라도 전쟁은 국가적 차원에서 손해였다.
각 세력 차원에서도 손해였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충돌을 피했는데.
“혁진이랑 정연 누나도 합류했다고 했으니까 별 일 있겠어?”
일행들만 해도 웬만한 중소 가문은 찜 쪄 먹을 전력이다.
위급한 상황이면 긴급 메시지가 날아오겠지.
이준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등골이 오싹한 건 친구들이 위험한 상황이 아닌,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몸을 사려야겠어.”
이준이 팔로 몸을 꽁꽁 감싸는 시늉을 하는 사이.
드디어 심법 초기화가 끝났다.
“이제 스킬북을 찢어.”
“후우우.”
이지안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부우욱.
스킬북을 양쪽으로 찢자, 그녀의 몸에서 빛이 났다.
“파랑아 부탁해.”
“뀨웃!”
파랑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녀석의 몸에서 청염이 활활 타올랐다.
이지안의 주위는 파랑이로 인해 온도가 상승했다.
“지안이 넌 수미천왕신공을 운용해.”
그녀가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았다.
단전에 새롭게 자리 잡은 수미천왕신공을 운용했다.
양강의 기운을 지닌 수미천왕신공이었으나.
그녀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음기 때문에 한기가 주변으로 나왔다.
“파랑아 한기를 빨아 들여.”
“뀻!”
파랑이가 이지안의 몸에서 흘러나온 한기를 먹어치웠다.
“청호면 불속성인데 괜찮은 겁니까? 저러다 죽기라도 한다면…”
“괜찮아요. 파랑이는 불속성과 얼음속성, 두 가지를 가지고 있거든요.”
“헉! 청호가 그럴 수도 있는 겁니까?”
“보통 청호라면 두 가지 속성을 지녔다간 죽겠죠. 파랑이는 다른 청호랑은 달리 특별해요. 그렇지 파랑아?”
“뀨웃!”
파랑이가 힘차게 외치며 청염의 화력을 최고로 높였다.
이준이 이지안의 등 뒤로 갔다.
[이제 네가 수미천왕신공을 이용해 저 아이의 막혀 있는 혈을 뚫으면 된다.]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잘 될까요?’
[잘 안되면 아까운 인재 두 명을 잃는 거겠지.]
아까운 인재는 동의각주 이의태와 손녀인 이지안을 말했다.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도 하시네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기를 인도하라는 말이니라.]
‘알겠습니다.’
이준은 손을 이지안의 등에 살포시 대었다.
그녀가 움찔하는 게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아플 수도 있어. 아니, 꽤 많이 고통스러울 거야. 그래도 참아.”
이준은 혼원신공을 내부에 가두고 수미천왕신공을 끄집어냈다.
“흡!”
* * *
“흡!”
사마련 소속 각성자들의 입에서 저마다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여자가 아니었다.
뇌전을 뿌리는 사신.
그들에겐 악마였다.
“들어와. 아까 전과 같은 기백은 어디 간 거야. 설마 우리한테 쫀 건 아니지? 그러면 잔뜩 기대한 난 뭐가 돼.”
파지직-
박정연의 주위에 뇌기가 번쩍거렸다.
몸 주변은 푸른빛을 띠고 있고, 눈엔 귀화가 핀 모습은 사마련의 각성자들로 하여금 오금을 지리게 만든 모습이었다.
푸확!
박혁진이 도귀의 수하에게 박아 넣은 검을 뽑았다.
구멍이 뚫린 심장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 박정연 또 눈 돌아갔어.”
이럴 줄 알았다.
도귀와 음귀의 수하들이 공격해 올 때부터 예견된 상황이다.
이미 박정연은 이준으로 인해 빡친 상태.
불을 지핀 건 저들이었다.
“이, 이럴 수가!”
“저년, 놈들하고 우리가 이 정도로 수준이 차이난다는 게 말이 돼?”
“안 되… 지.”
도귀 길필성과 음귀 배솔찬의 눈동자가 좌우로 떨렸다.
무사고의 학생들과 사마련의 어린 각성자들은 같은 수준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사고 학생들은 온실 속 화초라 진흙탕에서 처절하게 구른 자신들에게 안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생각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무려 200명.
모두가 최하 B급 완숙에 든 각성자였다.
상대는 고작 해봐야 7명.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공격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면 대체 저 무공은 뭔데!”
도귀가 버럭 소리쳤다.
사마련 소속 각성자들이 우후죽순 쓰러지는 게 아닌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X발. 이대로는 안 되겠어. 필성이 우리라도 도망치자.”
“그러자. 지금의 상황을 아버지와 사마련에 보고를 해야겠어.”
“맞아. 우린 수하들의 희생으로 값진 정보를 얻어가는 거야.”
배솔찬은 이상형인 홍련권 차경진에게 접근도 하지 못한 채.
스스로 정신 승리를 해야만 했다.
살아나가서 사마련에 무사고의 전력이 어떤지 알리는 것.
수하들의 목숨보다 적 진영의 전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이다.
하나 두 사람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파지직.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
“거, 검화.”
“저, 저리 안 비켜?”
어느새 퇴로를 막고 서 있는 박정연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그 누구보다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그녀.
지척에서 뇌기가 흐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금이 저렸다.
눈앞의 미녀는 광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