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한참을 달리고 있던 패왕대가 멈춰 섰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최미진이 최순호를 보며 말했다.
“뒷 대열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알아보겠습니다.”
최순호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신호를 받은 패왕대원 하나가 경공을 사용해 웅성거리는 쪽으로 갔다.
“무슨 일이냐.”
“부대주. 명석이가 안 보입니다.”
“그놈 또 몰래 오줌이라도 싸러 간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옆에 있었습니다.”
“부대주. 창현이도 어디로 사라졌습니다.”
“4조장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곳곳에서 사라진 이들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각 조장은 인원을 파악해 봐.”
패왕대의 부대주 말에 조장들이 나서 인원 체크를 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무려 50명이란 인원수가 사라졌다는 걸.
부대주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최순호에게 보고를 했다.
“대주. 아무래도 기습을 당한 모양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50명의 패왕대원이 사라졌습니다.”
“뭐야!?”
최순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고요했다.
땅에 난 풀잎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곳 어딘가에 대원들을 죽인 누군가가 숨어 있다면 조금이라도 기척이 있을 터.
하지만 그의 기감에 누구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기감에 전혀 잡히지 않았던 기척을 드디어 잡아낸 최순호였다.
“거기냐!”
패왕대의 중간 대열.
그곳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기를 발견했다.
그가 거대한 도를 등에서 뽑아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기척을 낸 자에게 접근한 그가.
푸욱.
“커헉!”
대도를 몸에 찔러 넣었다.
“대… 주…!”
최순호의 눈이 커졌다.
분명 은밀히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건만.
대도를 박아 넣은 사람은 패왕대의 대원이었다.
“이럴 수가.”
최순호가 당황했다.
그가 혼란을 느끼는 사이.
바스락.
다시 은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사모님.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잡아와.”
성우건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가 품에서 쌍단도를 뽑았다.
신력권가의 천왕대에 있던 성우건.
하나 그의 진정한 정체는 살수였다.
귀살대의 조장.
살수로선 거의 최고나 마찬가지다.
같은 암살자를 상대하는 건 자신 있었다.
성우건이 패왕대원들의 틈에서 유유히 움직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기척을 낸 자에게 접근을 한 후, 목덜미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푸욱!
“억!”
성우건이 죽인 그림자를 확인했다.
패왕대의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칫. 미꾸라지 같은 놈.”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귀에 또 다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성우건과 같이 최순호도 암살자를 발견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 그림자를 공격했다.
쉬이익- 퍽!
성우건이 팔을, 최순호가 목을 쳤지만.
데구르르.
목이 떨어진 그림자는 이번에도 패왕대원이었다.
“도망치게 놔둘 성 싶으냐!”
최순호가 분노에 찬 음성으로 죽은 대원의 뒤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대도에 희미한 강기가 생겼다.
도강.
AA급 각성자만이 쓸 수 있는 고유 기술이었다.
“모두 비켜!”
최순호의 외침에 패왕대와 귀살대가 퇴보를 밟으며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일었다.
먼지가 일어난 안에 있는 최순호의 눈이 커졌다.
“넌…?”
“뭘 놀라고 그래. 날 죽이러 왔으면서 당연히 너희를 죽일 사람은 나 밖에 없잖아.”
이준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최순호가 믿기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어떻게 내 도강을 막지?”
“네 도강이 뭐? 도왕보다 한참이나 모자라구먼 잘난 척은.”
까앙!
이준이 단검으로 변해 있는 파멸겁에 힘을 주며 최순호의 도를 쳐냈다.
최순호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능력치만 원상태였으면 그냥 X밥이네.”
이준이 그를 향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단전부터 나와 광폭하게 몸을 돌아다니고 있는 혼원신공.
대단한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삼 느꼈다.
천외천의 악마들이 왜 사부와 관련된 물건을 이 세계까지 와서 찾는지.
현재 자신의 등급은 일시적으로 A급으로 떨어진 상태다.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는 AA급.
전생에 패왕도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에게 일절 밀리지 않았다.
능력치 제한이 걸린 지금의 등급으로도 거뜬 하달까?
‘혼원신공으로 파멸겁을 사용해서 그런가?’
[홀홀. 혼원신공을 사용한 파멸겁은 무적이니라.]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골렘을 상대로 휘두를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그건 제자의 창술이 부족해서이니라. 지금의 네 수준으론 딱 짧은 단검으로 밖에 위력을 내지 못한다.]
‘사부님과 관련된 건 뭐든지 까다로운 조건이 달리네요.’
[홀홀. 괜히 고금제일인의 무공과 무기겠느냐.]
무극자 사부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사부에게 신경을 끄고 파멸겁을 원래의 형태로 되돌렸다.
창의 형태로 돌아온 파멸겁.
패왕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더 이상의 기습은 의미 없었다.
이준이 누구에게 막말을 한지 인지한 최순호가 버럭 소리쳤다.
“천것이 조금 강해졌다고 기고만장하는 것이냐!”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라 너무 지겨워. 그러면 그 천것한테 뒤질 너희들은 뭐냐?”
“그 입 함부로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패왕대는 벽력진을 펼쳐라!”
최순호의 말에 패왕대가 20인 1조를 이루며 이준을 감쌌다.
패왕도가가 자랑하는 공격진법.
상대를 압박해 제대로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게 이 벽력진의 장점이었다.
벽력진을 구성한 패왕대가 이준에게 기세를 뿜어냈다.
곳곳에는 귀살대가 함께 했다.
그들 사이로 최미진이 걸어 나왔다.
“드디어 널 여기서 죽이게 됐구나.”
“무거운 발걸음 하셨네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다니, 아주 많이 컸구나. 천것아.”
최미진은 이준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준을 경멸의 눈빛과 함께 벌레 보듯 쳐다봤다.
“이신 그 덜떨어진 놈이 당신께 복수 좀 해달랍니까?”
“뭐야?”
“쥐새끼처럼 남의 뒤꽁무니 몰래 쫒아 와서 말해본 겁니다.”
최미진이 도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도 각성자다.
그것도 AA급.
신력권가의 안주인으로만 있으니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지만.
그녀가 활동했을 때의 이명은 아주 강렬했다.
패도나찰.
지독한 심성에 어찌나 강맹한 도법을 구사한지.
패왕도가의 각성자뿐만 아니라, 일반 각성자도 그녀가 무서워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는 이준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너 따위가 감히 내 아들을 입에 올린 단 말이냐!”
뇌기가 맺힌 그녀의 도가 이준을 위에서 아래로 갈랐다.
콰릉!
하늘에서 한줄기 벼락이 쳤다.
벽력도법.
철혈검가의 천뢰제왕신공과 마찬가지로 천지간의 기운 중 가장 강력한 뇌의 기운을 담은 무공이었다.
“윽.”
이준이 파멸겁을 들어 최미진의 도를 막았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뇌기가 찌릿했다. 최순호가 보였던 도강의 위력을 가뿐히 뛰어넘은 위력이었다.
‘도왕 다음으로 최고 고수라더니. 그 말이 맞네.’
패왕도가의 전력이 오대세가 중 철혈검가와 함께 괜히 최고라 불린 게 아니었다.
갓 AA급에 든 각성자면 벌써 3명.
풍사도 최대웅과 패왕대주 그리고 최미진까지.
이들 말고도 더 있었다.
그러니 패왕도가가 15가문 연맹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한 거다.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절 왜 그렇게 싫어하십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쾅쾅!
최미진의 도가 허공을 갈랐다.
이준의 파멸겁을 두 쪽으로 쪼갤 듯한 기세로 창대를 마구 후려갈겼다.
콰릉-
파직!
뇌기가 이준을 향해 내리쳤다.
혼원신공을 뇌기를 막아주긴 하나 찌릿하긴 했다.
그럴 때마다 내공이 뚝 끓기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심법이었다면 아주 치명적이었을 일. 하나, 혼원신공은 이를 가뿐히 해결해버렸다.
“천한 년이 핏줄과 함께 내 자리를 노리는데 너라면 가만히 있겠어?”
“그래서 제 엄마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라 시킨 겁니까?”
멈칫.
도를 사정없이 휘두르던 최미진이 멈춰 섰다.
“그걸 알고 있었구나? 내가 네 엄마를 죽이라고 사주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문에 붙어 있으려고 하다니 독한 것.”
그녀는 숨김없이 말했다.
이곳은 이준의 무덤이 될 곳.
이준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들 변한 건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당신 입에서 직접 들으니 시원하네요. 제가 이들을 모두 죽여도 될 것 같으니 말이에요.”
이준의 눈이 회색빛으로 번들거렸다.
패왕대가 내뿜은 가짜 살기가 아닌, 아득한 심연 바닥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공포였다.
“천천히 죽여 드리죠.”
* * *
이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공포.
그건 성우건 자신이 가진 파천기과 비슷한 성질을 가졌다.
‘저 기운은 뭐지?’
주인이 준 기운을 이준이 사용하고 있으니 찜찜했다.
파천기와 같은 기운을 뿜어낸 내공은 세상에 없었다.
오직 주인이 익힌 파천신공뿐이다.
‘왠지 불길해.’
성우건은 맨 뒤로 빠져 이준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준의 창이 패왕대원의 몸을 뚫었다.
다른 한 쪽 손으론 다른 대원의 쇄골을 잡았다.
콰직.
손아귀에 힘을 주어 쇄골을 그대로 부숴버린 이준이었다.
성우건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봤던 움직임이야. 어디서 봤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떠오를 듯 말듯,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떠오를 때까지 이준의 싸움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컥.”
이준의 창에 허벅지가 뚫린 패왕대원.
그가 도를 내린 순간!
이준의 주먹이 가슴을 강타했다.
퍼억-!
주먹의 경기에 가슴이 뚫렸다.
심장이 핏물로 변해 바닥을 적셨다.
“가만히 넋 놓고 있지 말고 어서 빈자릴 채워!”
조장들이 대원들을 재촉했다.
18살의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원들을 죽였다.
“악독한 놈!”
패왕대원들이 이를 악물었다.
쉬이익!
패왕대는 이준을 죽이기 위해 도기를 계속 날렸다.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만큼의 경력이 이준에게 날아갔다.
이준은 무극군림보를 밟으며 피했다.
그가 피하는 틈을 타 귀살대가 다가가 이준의 몸에 상처를 줬다.
촤악-!
귀살대원 중 한 명이 이준의 팔을 그었다.
대신.
그는 목숨을 줘야만 했다.
이준이 귀살대원의 머리통을 잡고 그대로 땅에 박아 넣었다.
퍼억!
머리통이 박살나며 피와 함께 뇌수가 줄줄 흘렸다.
이준이 몸을 일으켰다.
땅을 박차며 다시 움직였다.
번쩍!
창에서 빛이 나며 반월 모양의 창기가 벽력진을 이루고 있는 패왕대를 향해 폭사했다.
쾅!
20인 중 죽은 사람은 고작 두 명.
이준이 창기를 날린 것 치곤 미미한 성과였다.
‘대열을 무너트려야겠어.’
벽력진은 꽤나 귀찮은 진법이었다.
저걸 깨지 않으면 오랜 시간을 잡아 먹을 듯 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키게 하는 무공.
무극군림보만 한 게 없었다.
이준의 무릎이 허리까지 올라갔다.
혼원신공을 발에 집중하자.
회색으로 된 기류가 회오리치며 몰려들었다.
쿠우웅!
아직 시작도 안 했건만.
게이트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찍어 누르는 기세와 함께.
화르륵!
“으악!”
“모, 몸에 불이!”
“이것 좀 어, 어떻게 해줘! 어억!”
벽력진을 이루고 있는 패왕대가 알 수 없는 불꽃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