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어찌 이런 일이!’
속으로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가장 화젯거리의 주인공.
손자의 친구이자, AA급 각성자인 풍사도를 이긴 고등학생.
신력권가의 혈족 계승도 못 받은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박춘식은 자신의 내공이 어떻게 됐나 의심했다.
천뢰제왕신공을 운용해서 상태를 체크했는데, 이상이 없었다.
자신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은 뭐란 말인지.
머리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준이 가진 기운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
정확히는 그가 익힌 내공이 뭔지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세상에 나온 내공은 전부 안다고 자부한 박춘식이다.
‘설마 삼재심법? 무협지를 보면 삼류였던 심법이 원래는 엄청나고 대단한 신공이라고 쓰는 것들이 많던데 그런 종류인가?’
하다 하다 너무 가버린 그였다.
아니면 설명이 안 됐다.
이준은 풍사도를 이긴 각성자였으니까.
‘아니야. 수미천왕신공을 익혔다고 했잖아.’
분명 뉴스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내용이다.
자신이 익힌 천뢰제왕신공과 같은 급의 무공을 익혔다고 대대적으로 알려졌지 않나.
그렇다면 수미천왕신공의 기운이 읽히기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천뢰제왕신공보다 수미천왕신공이 더 윗줄에 있는 건가?’
박춘식은 닥치는 대로 생각해 보았다.
칠십 평생 겪어보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혼란스러운 그였다.
한편 이준의 귀로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기운을 알아보려고 하는 중이구나.]
‘괜찮을까요? 아무리 혼원 반지라도….’
[가아알! 감히 혼원문의 신물을 의심한단 말이렸다!]
‘그래도 S급 각성자인 검제신데.’
[검신의 할애비가 와도 화경의 초입 가지곤 혼원 반지의 내력을 뚫지 못하느니라.]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엔 한껏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랑.
[누차 말했지만, 황제조차 황도로 데리고 가려고 했던 천하제일 장인을 협박해 만든 것으로 그놈의 입에서 평생의 걸작이 나왔다고…]
이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을 협박한 걸 자랑이라고 제자한테 여러 번 연설하는 사부였다.
괴짜도 이런 괴짜가 없었다.
설교가 끝날 때까지 로봇처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사부님 말처럼 내 기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네.’
만약 혼원신공에서 나온 기를 알아차렸다면 자신을 사마련으로 몰수도 있었다.
혼원신공은 물감과도 같았다.
그 어떤 걸 섞어도 다 어울리는 신공.
현재 자신의 혼원신공은 마기에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정순하고 패도적인 마기.
저급했던 게이트의 마기를 혼원신공으로 정화해서 순수한 마기로 만든 것.
자신의 혼원신공은 마기가 토대였다.
‘다행이야. 뭐 눈속임으로 수미천왕신공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걱정하던 게 날아가자 긴장을 푸는 이준이었다.
“할아버지?”
“미안하구나. 잠시 딴생각을 했단다.”
“아닙니다.”
이준이 괜찮다며 대답했다.
박춘식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빨리 정리하고 싶어서인지.
이준을 향해 물었다.
“넌 오늘 대련을 하느냐?”
“네.”
“언제쯤 하느냐?”
“점심쯤에 제 차례가 올 것 같습니다.”
“점심이라 이 말이지? 알았다. 내 친히 눈여겨볼 터이니 잘해 보거라.”
검제의 말이었다.
그를 평생 보좌한 제왕단의 인원조차 놀라 했다.
검제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건 오랜만이다.
끽 해봐야 손자, 손녀에 대한 기대.
그리고 중국에서 발견된 달마신공과 천마신공에 대한 관심.
이게 끝이었다.
그런데 오늘 하나가 추가됐다.
이준에 대한 호기심이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이준이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었다.
검제는 자신이 익힌 무공이 뭔지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할 거다.
천무대전에서 혼원신공을 내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
박혁진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수미천왕신공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운동장에 설치된 전광판에 대진표가 나왔다.
박혁진은 검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고, 이준은 홀로 대진표를 보고 있었다.
“첫 상대가 1학년이네.”
B급 각성자.
1학년 치고는 굉장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상대는 아니다.
굳이 대전 상대가 누군지 볼 필요가 없어 등을 돌리려는데, 허수가 나타났다.
“마침 찾아가려고 했는데.”
“저를 말입니까.”
“응. 너 대전 상대 정해졌어?”
“네.”
“누구야?”
“D급 각성자로 패왕도가 출신입니다.”
“하필 패왕도가네. 쯧.”
이준이 혀를 찼다.
허수는 지금 건곤미허신공과 연환패왕도를 배운 상태.
그것도 두 무공 모두가 3성의 경지에 올랐다.
현재 허수의 등급은 못 해도 C급은 됐다.
성취도가 낮아도 원체 높은 등급의 무공이라 훨씬 강해져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너 천무대전에 나가야겠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기권하는 게 어때?”
“기권… 말입니까?”
허수의 안색이 굳어졌다.
뜬금없이 천무대전에 나가지 말라고 하니 당연했다.
천무대전은 외부인들에게 자신을 선보이는 자리.
여기서 성적을 잘 받으면 스카우트는 물론 여러 가지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기말고사의 시험이기도 했다.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기권하겠습니다.”
“괜찮겠어?”
“전 이미 형님께 스카우트 된 몸 아니겠습니까. 이깟 성적 잘 받는다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지원 나온 장학금을 받을 필요도 없고요. 형님께서 스카우트 비용으로 전부 지불해 줬으니, 괜찮습니다.”
이준이 허수를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음에도 천무대전을 포기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해 보겠다고 매달릴 수도 있었을 터.
허수는 달랐다.
무조건적인 믿음과 충성.
자신이 박혁진의 옛 수하였던 허수를 탐낸 이유였다.
더해서 향후 실력까지 겸비하니.
아주 듬직한 아군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 다 널 위해서야. 네가 익힌 무공은 패왕도가의 것인데, 여기에 도왕도 와 있잖아? 네가 비무대에서 실력을 보인다면 도왕은 필시 네 무공이 어떤 건지 알아챌 거야.”
그렇게 되면 허수가 많이 곤란해진다. 아니, 곤란해지다 못해 피를 볼 것이다.
현 각성자 시대에는 혈족 중심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무공이라 자부했던 무공이.
그것도 최상위 무공이 이름도 모르는 E급 각성자에게 흘러갔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할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어떻게든 허수를 괴롭힐 게 뻔하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천무대전에 참여하지 않는 게 좋았다.
‘아니면 혼원 반지를 잠깐 빌려줄까?’
[아서라 제자야. 혼원 반지는 혼원신공이 아니면 제어를 하지 못하느니라. 허수가 낀다면 녀석의 목을 옥죌 수 있어.]
‘사부님 건 뭐든 까다롭네요.’
[괜히 고금제일이 앞에 붙는 게 아니니라.]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냥 천무대전 기간 동안 게이트에서 수련을 하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 어차피 기권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아, 좋은 생각입니다.’
허수는 자신처럼 대기를 안으로 갈무리하지 못한다.
만일 도왕을 만난다면 큰일일 터.
그 전에 여기서 사라져야 한다.
어쩌면 허수의 기운을 읽고 이곳으로 오고 있을지 모른다.
“멍청했어.”
“네?”
“나 따라와.”
이준이 허수를 데리고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이준이 있던 자리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허리에 기다란 도를 장착하고 있는 사람.
그는 바로 패왕도가의 가주인 최강규였다.
“여기서 분명 패왕도가의 무공과 아주 흡사한 기운을 느꼈는데 도중에 끊겼어.”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느낀 기운을 찾기 위해 기감을 퍼트렸다.
아까와 같은 기운을 찾으려 했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잘못 안 걸까?”
“가주님. 가셔야 합니다. 모두 기다릴 겁니다.”
“알았다.”
최강규는 미련을 못 버리고 더 찾다가 이내 포기를 했다.
* * *
이준은 허수와 화장실로 급히 피신했다.
게이트를 열어 안으로 들어왔다.
“후우우.”
이준이 한숨을 돌렸다.
뒤늦게 따라붙은 하나의 기운.
그건 바로 도왕이었다.
만약 자신이 허수의 기운을 지우지 않았다면 들키고 말았으리라.
“네가 날 늦게 찾아왔으면 정말 큰 일 날 뻔했다. 도왕이 따라붙었었어.”
“정말입니까?”
허수의 눈이 커졌다.
“응. 게이트로 들어온 게 천만다행이야.”
“형님께서 저를 위해….”
허수가 감격스러운 눈으로 이준을 보았다.
굉장한 무공을 구해 준 은인.
심지어 심법을 초기화하는 계승의 꽃도 준 사람.
스카우트 비용으로 가족의 생계까지 챙겨준 게 이준이었다.
오늘은 자신의 무공으로 인해 도왕과 마찰을 빚을까 봐 손수 구해줬다.
‘이분은 대체 뭘까? 하늘에서 날 불쌍히 여겨 내려 주신 천사일까?’
고마운 존재였다.
사실 천무대전을 포기하라고 할 때 살짝.
아주 살짝 서운했다.
혹 자신이 못 미더운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런 마음을 단번에 무안하게 만든 이유.
모두가 자신을 도왕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이준 형님을 의심한 게 부끄러웠다.
‘내가 감히 의심할 수 있는 분이 아니구나.’
안 그래도 허수는 이준을 신처럼 여겼다.
자신을 밑바닥 구렁텅이에서 구원해준 사람.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따르기로 결심했었다.
한데 자신을 이렇게 아끼는 모습을 보이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수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고 있는 이준.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또 허수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였다.
괜히 도왕과 마주쳐서 허수를 잃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쓸 만한 수하를 얻었는데, 그들에게 뺏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괜한 수고로움을 피하기 위해 허수를 게이트로 데려온 것이다.
이준의 이런 뜻을 곡해한 허수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갑자기?”
“전 형님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까진 할 필요 없고.”
“아닙니다. 수하된 자로서 주군을 위해 희생하는 건 영광이나 다름없다고 배웠습니다.”
“누구한테?”
“무협지에서입니다.”
‘아이고 두야.’
이준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누가 무협광 아니랄까 봐.
무협에 있는 걸 다 따라 하는 허수였다.
“됐고, 네 한 몸이나 지켜.”
“형님께서 걱정하시지 않을 때까지 죽어라 수련에 임하겠습니다.”
스르릉-
허수가 도갑에서 참마도를 꺼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
“전 걱정하지 마시고, 나가 보십시오. 천무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수련만 하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허수가 참마도를 휘둘렀다.
혼자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허수를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운동장으로 가자, 서혜지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준아!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나.”
“잠깐 일이 있어서. 그런데 웬 호들갑이야?”
“저것 좀 봐. 첫 매치부터 대박이라니까.”
서혜지가 전광판을 가리켰다.
이준이 고개를 돌렸다.
전광판을 보는데 익숙한 이름이 두 개나 보였다.
한지유와 박정연.
첫 비무부터 빙화 대 검화의 대결이 성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