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어마어마한 태풍이 불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조원을 배신하고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15가문 연맹 중 신력과 패왕의 자식이 벌인 일이었다.
하필 조원들이 15가문 연맹에 소속된 후계자라는 것.
그 속에 속한 철혈검가에선 때 아닌 비상 회의가 열렸다.
쾅-
한 남자가 책상을 손을 쳤다.
이 정도의 세기면 책상이 부서질 법도 한데 멀쩡했다.
대신 책상 위엔 남자의 손바닥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깟 놈들이 감히 내 딸을 미끼삼아 도망치려고 해? 아버님! 당장 신력과 패왕에 항의를 해야 합니다.”
“…….”
“맞습니다. 아버님. 제 조카가 죽을 뻔했다고 하니 가슴이 철렁했지 뭡니까.”
“안되겠습니다. 제가 당장이라도 철혈검대를 데리고 두 가문에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책상에 손바닥 자국을 남긴 남자는 철혈검가의 가주인 박영섭이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말로 검대를 이끌고 신력과 패왕에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는 딸의 일로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앉거라.”
제일 상석에 앉아 있는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갔다가.”
박영섭의 동생이자, 무적검대의 대주인 박영수였다.
“앉으라했다.”
상석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몸에서 태산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조용한 목소리에서 호랑이가 포효하는 그런 느낌을 내보였다.
“네….”
“예. 아버님.”
세상 사람들이 검왕이라 치켜 부른 박영섭이라도 어깨를 움찔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노인은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드는 절대자.
한국의 하나뿐인 S급 전력 검제 박춘식이었다.
그가 보고하러 온 가솔에게 물었다.
“정연이를 구해준 아이가 누구라고?”
“신력권가의 이준이라는 학생입니다.”
“이준?”
들어본 듯한 이름에 일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하는 가솔 대신 박영섭이 대답했다.
“권왕의 서자로 혈족계승을 못 받은 아이입니다. 아버지.”
“혁진이 친구 말이더냐?”
“네, 녀석 말로는 친구라고 합니다.”
검왕이 떨떠름하게 여겼다.
낙오자와 실패작이란 이명을 가진 아이.
자신의 아들과는 정반대의 운명을 가진 아이였다.
아들이 그런 녀석을 친구로 두니, 아비 된 입장에선 안 어울렸으면 했다.
“혈족계승도 못한 아이가 블루존 게이트에서 B급 각성자를 구했다라…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혈족 계승을 받지 못한 각성자는 일반 각성자와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더 못한 존재였다.
그런 아이가 블루존 게이트에서 두 마리의 보스를 해치우고 아이들을 구했단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저도 보고를 받고 너무 놀랐습니다.”
“허, 이것 참 혁진이는 뭐라더냐.”
“아무 말도 없는데요?”
검제 박춘식의 미간에 내천 자가 그려졌다.
그리고 아들인 박영섭에게 버럭 소리쳤다.
“아비란 놈이 아들과 대화도 안 한단 말이냐!”
박춘식의 꾸지람에 박영섭의 목이 자라목이 되었다.
박영섭은 아버지인 검제가 안 들리게끔 혼자 궁시렁댔다.
“아버지도 저랑 이야기는 많이 안하셨는데….”
“뭐야?”
“아, 아니에요.”
“어째 행동하는 게 저리 철이 없을 꼬. 내가 너 때문에 못 죽는다, 이놈아!”
박춘식이 검왕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20년은 더 정정하실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놈이!”
박춘식이 의자 옆에 둔 검을 쥐자.
“당장 혁진이를 통해 이준이란 아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제야 행동이 빨라진 검왕이었다.
“뭔가 나오면 당장 나한테 보고 하거라.”
박춘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그려면?”
“신력과 패왕의 일은 아직 말씀도 안하셨는데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언제까지 이 애비가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하느냐.”
“알겠습니다. 다른 소리 하기 없기입니다.”
박춘식이 회의실을 나갔다.
뒷짐을 지고 걸어가면서 이준이란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듣기론 삼재심법을 익혔다고 하던데, 혹 게이트에서 새로운 심법이라도 얻었나? 아니야. 기존의 심법을 삭제하려면 계승의 꽃이 필요한데 그걸 구할 순 없어.’
계승의 꽃은 블랙 존에서만 피는 꽃이었으니까.
F급인 이준이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생각을 하다가 이젠 자신의 손자에게로 갔다.
‘혁진이는 이준이란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느꼈을까? 그래서 친구로 지낸 건가?’
손자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같은 나이의 또래에게 인기도 많았고 따르는 이들도 널렸다.
그런데 손자는 그런 이들을 한 번이라도 친구라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진정한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헌데 이준이란 아이는 어떤가?
손자가 달고 사는 이름이었다.
그때는 자세히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이제라도 관심을 가져봐야겠지.’
그의 생각대로라면 소식을 많이 들을 이름 같았다.
* * *
한편 이준은 병상 옆에 앉아서 누워 있는 박정연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성격만 지랄 맞지 않으면 참 좋은데 말이야.”
잠자고 있으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
이준이 턱받침까지 하며 박정연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였다.
“야, 다쳤다며.”
박혁진이 치료실 문을 거칠게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정연이 누나 잔다.”
“어떻게 된 일이냐.”
박혁진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풀풀 날렸다. 매일 장난치는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밖에서 안 들었어?”
“박정연이 다쳤다고 해서 돌아오자마자 무작정 들어왔어.”
알 만 했다.
만나면 티격태격하지만 서로를 아낄 줄 아는 남매였다.
“게이트에 이상이 생겼는데 이신하고 최태민이 정연 누나랑 조원들을 미끼로 던지고 도망치려고 했어.”
“미친놈들.”
언제나 선배로 꼬박꼬박 대하던 박혁진도 욕을 했다.
“원래 미쳤어.”
“내가 지금 당장 그 자식들을 조져놔야겠어.”
몸을 들리려는 박혁진을 잡아 진정시켰다.
“내가 이미 손 봐놨어.”
“어떻게?”
“최태민은 허벅지에 쇠꼬챙이를 꽂아 넣었고, 이신은 조만간 해치울 예정.”
“최태민이 가만히 있었어?”
“도망치려는 순간에 창을 냅다 허벅지에 박아 넣었지.”
내색은 안 했지만, 박혁진은 또 한 번 놀랐다.
많이 달라진 이준.
강해졌다는 건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최태민을 단번에 제압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준이 A급에 오른 유령살귀를 제압했다고는 하나, 자신과 최태민도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B급이란 등급은 어디까지나 개학 전의 등급.
현재 자신과 최태민도 A급에 올랐다.
그런 그를 아무렇지 않게 제압한다는 건 A급 보다 위라는 소리였다.
‘대체 어떻게 강해진 거야? 사부란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 때문인가?’
과연 누굴까.
누구기에 신력에서도 포기한 이준을 강하게 만들어 준 걸까.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이준을 단시간에 강하게 만든 사람.
아마도 자신의 할아버지만큼 강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잘했다. 네가 안 했으면 내가 직접 했어.”
“지금 존나 분해 있을 걸. 여태 쌓아놨던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져서 타격이 클 거야.”
“그 가면 좀 벗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꼴좋다.”
“으음.”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박정연이 기척을 내며 깨어났다.
“야. 괜찮냐?”
박혁진이 무심한 척 물었다.
“여긴…?”
“학교 치료실이야. 너 큰일 날 뻔했어.”
박정연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예나랑 경수는?”
리자드 퀸의 공격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졌다.
학교 최고의 의료진 덕에 상처 부위가 단숨에 나아 있었다. 그러니 무리한 동작에도 괜찮은 거다.
“두 사람 다 무사해.”
“아, 준이구나… 준이!?”
박정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귀신 보는 것처럼 쳐다보니까 되게 무안하네.”
이준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준이야?”
박정연은 이준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요리조리 흔들면서 정체를 확인했다.
“악! 그만해!”
“준이가 맞구나. 그런데 너!”
박정연이 이준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왜?”
역시 잠자고 있는 게 천사였다.
깨어나니 예전 깡패 같은 본능은 여전했다.
“게이트는 어떻게 들어왔어?”
“열려 있어서 들어갔지.”
이준이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거라.]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정말?”
“응.”
박정연이 고양이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커다란 눈으로 이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먼저 피했던 이준.
오늘은 웬일로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잘 맞췄다.
‘눈이 맑은 걸 보면 준인데… 이 위화감은 뭐지?’
이준인 듯 이준 아닌 느낌이 들었다.
“물어볼 건 많은데 힘들다.”
“좀 쉬어. 보스한테 입은 데미지는 아직 다 안 나았어.”
“그래. 좀 쉬었다가 물어봐야겠다.”
박정연이 다시 누웠다.
그리고 이준을 향해 쑥스러운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워.”
“응? 뭐라고 말했어?”
“못 들었으면 말아.”
박정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이준이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다 문득 전생이 떠올랐다.
굉장히 좋지 않게 죽었던 그녀였다.
만약 전생과 똑같이 흘러간다면 결과는 똑같이 안 좋게 끝날 터.
현생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여러 번 몬스터와 악마들에게 구해줬던 친구의 누나.
이번에는 자신이 그녀를 구해줄 차례였다.
“이만해서 다행이야. 혁진이도 왔으니까 난 나가볼게.”
“왜? 더 있다가지?”
“남매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불청객은 빠진다.”
박혁진이 이준을 붙잡았으나 이준은 이미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참다못한 박혁진이 입을 열었다.
“괜찮냐?”
“피곤만 하지 아무 이상 없어.”
“그러게 친구 좀 잘 사귀라니까.”
“내가 그 자식들하고 같이하고 싶어서 했냐? 예나가 같이 하자고 하니까 했지.”
“됐고. 앞으로 신력권가와 패왕도가는 우리의 적이야.”
“준이도?”
박혁진이 격하게 부정했다.
“신력권가에서 버린 자식인데, 준이는 예외지.”
“그게 쉽겠냐만은… 근데 궁금한 게 있어.”
“뭐? 준이가 저렇게 강해진 거?”
“응. 영약이라도 먹었어?”
“준이 말로는 무공을 가르쳐준 사부가 있다나봐. 아마 사부란 사람 때문에 강해진 것 같아.”
“사부가 있어? 그럼 계승의 꽃이라도 먹은 거야? 사부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래?”
박정연이 박혁진에게 속사포로 물어봤다.
박혁진은 누나의 질문에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준이 그 이상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사부에 대해서 말하면 그저 웃기만 했다.
이준에게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서로 비밀이 없었던 자신과 이준.
비밀이 생김과 동시에 벽이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나도 몰라.”
“너한테도 안 가르쳐줬어?”
“이것도 준이가 많이 가르쳐준 거야.”
“아씨. 궁금한데.”
“한 번 가문을 통해 알아볼까?”
“그러자. 그게 좋겠다. 나 궁금한 건 못 참는 거 알지?”
박정연이 이준을 키워준 사부에 대해 궁금해 했다.
이준을 이만큼 강하게 한 사람이면 분명 대단할 것 같았다.
검제인 할아버지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