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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14화 (214/255)

제 214화. 선녀의 날개옷

박 상궁이 새벽이를 안고 물러나자 이향은 윤서를 당겨 품에 단단히 안았다.

향오문 쪽에 정렬해 있던 호위 내관과 갑사가 뒤로 돌아서고, 윤서를 호종하는 한 상궁과 나인 넷, 여기 강녕전 소속 지밀 상궁과 나인들도 모두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스스슥 소리를 내며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다른 때 같으면 불편한 감이 있었겠지만, 무릎이 푹 꺾일 만큼 몹시 반가웠던지라 윤서도 발꿈치를 들고 양팔로 이향의 목을 그러안았다.

“무척이나, 곁에 있고 싶었소.”

진심 어린 고백이 맞닿은 가슴을 울렸다.

윤서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래 말을 타고 달린 후 겉의 융복만 갈아입었던 것인지, 짐승의 냄새가 섞인 체취가 강렬하였다.

“이렇게나 열심히 달려와 줘서, 고마워요.”

윤서는 햇살에 갈색으로 그을린 이향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고요히 입술을 대었다.

윤서가 보이는 대범한 애정 표현에 이향이 나직하게 웃었다.

잘게 떨리는 가슴의 진동이 그만큼 애정을 더 깊게 만들 때, 더 멀찌감치 물러나는 궁인의 발소리가 스스스슥 땅을 스쳤다.

아이를 낳는 동안 멀리서 가슴 졸였던 남편은 자신의 부재 동안 왕비의 역할을 하느라 핼쑥해진 아내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탐했다.

“새벽이가 무사히 태어나고 부인도 또 무사히 회복해가고 있단 서신을 받았을 때, 선녀의 날개옷을 생각하며 아주 깊게 안도했소.”

“···으응?”

“아이가 셋이 되었으니 날개옷이 있어도 날아갈 수 없게 된, 그 선녀말이오. 당신도 아이가 셋이 되었으니 이제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겠다는 안도.”

“···왜, 셋뿐이에요? 희아는······?”

새엄마는 이러하다.

이향의 고백이 가슴 저리게 기쁘면서도 홍위와 금똥이와 새벽이만을 말할 때 내가 희아에겐 잘하지 못하였는가, 자격지심부터 드는.

“희아는 늦게야 부인에게 왔지. 부인이 정말로 자식처럼 키운 것은 홍위부터란 뜻이었소.”

“···아, 맞아요.”

윤서는 긴장해서 멈췄던 숨을 다시 느긋하게 내쉬었다.

“희아는, 딸이라기보단 늦둥이 여동생 같지요. 내게 늦둥이 여동생이 있었더라면, 꼭 희아 같을 거 같은.”

“들어가서, 차 마시면서 이야기합시다. 나 목이 말라. 파주부터 한 번도 안 쉬고 달려온 참이오.”

윤서는 새삼 이향의 얼굴과 몸을 꼼꼼히 살폈다.

관자놀이 밑 수염에 땀이 증발하면서 생겨난 소금 결정이 희끗희끗 묻어 있었다.

“이래서, 서방님 입술이 달콤 짭조름했던 거군요.”

윤서는 웃으며 몸을 떼고

“다구를 들여오시게! 약초 달인 물과 수건도.”

멀찍이 서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녕전 지밀 상궁에게 명을 내렸다.

****

“왜, 날개옷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이향 못지않게 우아해진 손놀림으로 차를 내려 주고, 또 함께 올린 정과와 여름 과일도 충분히 맛보게 한 후,

윤서는 이향을 엎드리게 하고 등을 검사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에 겹겹의 옷을 껴입고 쉴 새 없이 이 지역 저 지역을 말을 타고 달리니, 땀을 흘리다 피지가 막혀 종기로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이향이 순행을 나갈 때 윤서가 늘 극도로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향의 수발을 드는 홍 내관에게 말린 버드나무 껍질과 인동 덩굴을 한 줌씩 넣고 끓인 물에 수건을 적셔 매일 밤마다 전하의 옥체를 닦아드리며 종기가 생기는지 꼼꼼하게 살피라고 명을 내린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 궐에서는 협경당에 마련된 목욕탕에서 비누로 닦아주면서 몸을 살핀다. 하지만 지금은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신 인동 덩굴 특유의 달큰한 향이 나는 물수건으로 등을 닦으며 윤서가 물었다.

“내가 홍위와 금똥이 데리고 어디로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았어요?”

눈을 감고 윤서의 손길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던 이향이 뭉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물게, 아주 드물게였지만 부인이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소.”

“!”

너무 놀라서 엉덩이 위 쏙 들어간 부분을 닦던 손이 절로 멈췄다.

“여기 조선이, 궁궐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가 서너 번 있었소. 남들은 그저 부인이 언짢게 화가 났다라고 읽겠지만, 내게는 보이는 그런 표정. 그럴 때 부인은 정릉 계곡 수영장에 가서 팔다리가 옷감에 쓸려 피가 날 때까지 수영을 했지.”

그런 적이 서너 번 있었다.

중전이 된 후 최소로 줄이긴 하였어도 어딜 가나 상궁 하나와 나인 네다섯을 꼬리처럼 달고 다녀야 하기에.

원래는 오래오래, 적어도 10km는 홀로 달려야 풀어지는 막막한 기분을 풀 방법이 없어서, 상궁과 나인 모두 달고 가 물 밖에 서 있게 하고 홀로 반 시진 넘게 쉬지 않고 수영한 적이 서너 번 있었다.

한 번은 궁중 연회에서 태종의 딸들이 왕에게는 자손이 많아야 하거늘 왜 이향이 천한 것들처럼 강녕전도 아니고 협경당에서 매일 자면서 후궁을 버려두는지 윤서를 노골적으로 꾸짖은 후였다.

또 한 번은 천지 만물이 리(理)에서 생겨났기에 그 이치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하기에 왕비인 윤서는 그 누구보다 엄격하게 주자가례와 삼강오륜에서 규정하는 삶의 방식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을 때였고,

또 반송방 일대 윤서와 박 상궁의 ‘노비’들이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많이 벌어 천한 주제를 모르고 정음으로 시를 짓고 거문고며 비파까지 뜯으며 놀더라, 이러다가 노비 새끼들이 반가의 여식과 혼인하자고 덤빌 노릇이라고 정혜 옹주인지 정신 공주인지가 윤서 앞에서 혀를 찼을 때였고.

또 한 번은 반송방 거지 새끼들이 닭을 훔쳐 구워 먹었는데 왕비가 돌보는 보육원 애들이라 손도 못 대는데, 빈한한 가문의 출신 왕비라서 천한 것들에게 지나치게 너그럽다고 쑥덕거린다고 말을 전하며 정 귀인이 “그런 무엄한 말을 하는 자들은 인두로 입을 지져야 합니다, 중전마마.” 빙글거릴 때.

이전의 삶에서라면 그런 인간들과는 아예 말도 더 섞지 않고 자리를 피한 후, 홀로 오래 달리며 분노와 경멸을 털어낸 후, 마음 꼭 맞는 부모님과 스승님과 친우들 몇과 고요하고 안온하게 개인적, 직업적 삶을 살아왔던 윤서는 도무지 이 개 같은 순간이 참아지지가 않아서,

홍위도 금똥이도 떼어놓고 정릉 수영장으로 바지와 저고리와 도포 차림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

“시펄, 개좆같네, 진짜.”

수백 번 홀로 중얼거리며 물살을 가른 후 다시 잘 살아갈 의욕을 되찾은 적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겨드랑이와 팔 안쪽과 허벅지 안쪽이 저고리와 바지에 쓸려 피가 제법 날 정도로.

수영복이 수영복처럼 생긴 것은 다 필연적인 이유가 있지만, 조선에서야 언감생심인지라 사향 넣은 자운고를 발라 치료해야 했는데, 옷감에 쓸려서 생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밤에 연고를 발라주는 이향에게조차 왜 이 지경이 될 정도로 홀로 수영해야 했는지 한 마디도 털어놓지 않았었다.

이향이 아무리 왕일지라도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시대의 한계였다.

호기심에 반지 한번 껴봤다가 십오 세기에 떨어지게 된 자신의 업보였다.

무엇보다 이미 해줄 수 있는 것 이상을 해주고 있는 배우자에게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푸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이향은 읽고 있었다.

“홍위나 금똥이를 업고도 수영을 능숙하게 하는 부인이니, 홍위는 세자라서 차마 못 데리고 가겠지만 금똥이 하나 정도는 등에 업고 한강을 헤엄쳐 저기 홍주 어디로 도망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연고를 발라주며 생각했지. 그런데 이제 새벽이가 생겼으니. 둘까지 업고 헤엄칠 수는 없는 거 아니오? 물론 배다리가 있긴 하지만, 다리는 병사들이 지킬 거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응.”

윤서는 놀라서 대체 자신이 무얼 어떻게 했기에 애를 업고 한강을 헤엄쳐 도망칠 수도 있다고 이향이 생각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날, 부인이 나를 정말로 마음에 담기로 했다고 고백하던 날 밤에, 실은 그 고백 전에는 한강을 헤엄쳐 도망칠 생각이 아니었소?”

이제야 기억이 났다.

아직 보모 나인이던 시절 달이 아주 밝던 날 밤, 정말로 한강을 헤엄쳐 노량진 쪽으로 다가갔을 때, 허리를 묶은 천을 칼로 떼어내고 이대로 사라질까 한참 고민했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한강에 둥둥 떠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세종이 무서운 궁궐에서, 이 시대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때,

“윤서야!” 애타게 부르던 이향의 음성과,

오랜 가뭄 끝에 후두둑 떨어지던 빗방울과,

또 “거가 나잉야!” 부르며 치맛자락을 꼭 쥐는 홍위의 작은 손가락의 온기 때문에 차마 광목천을 베어내지 못했던 그 순간을.

그 이후 얼마나 이향을 사랑하게 되었던가.

비록 앞으로도 드물게 살이 쓸려 피가 나도록 분노의 수영을 하는 일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향.

“그건 당신을 사랑하기 전이잖아요. 우리 금똥이도 낳기 전이고. 세상에, 이향. 내가 당신과 우리 홍위를 두고 금똥이한테 아버지까지 없게 하면서 어딜 간다는 거에요?”

“정말 단 한 번도 그리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은 거요?”

“단 한 번도 없어요. 수영하다가 피가 난 것은 옷에 쓸려서이고, 중전을 하지 않을 생각은 있었지만 그것도 너무 사랑해서! 아까 정 귀인을 오래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막 질투가 날 지경이어서! 하, 전하! 전하는 저의 사랑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네요.”

“흐음. ···새벽이가 어머니를 기다릴 것 같은데.”

뒤늦게 머쓱해진 이향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윤서는 여자 심리를 잘 모르는 것 외엔 다 완벽한 남편을 놀릴 수 있는 이 드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안 기다려요. 자고 있을 거에요. 두 번째 아이를 낳고 나니 좋은 점이 있어요.”

“으응? 무엇이?”

“금똥이 때는 한순간만 떨어져 있어도 안절부절못하고 마음이 초조했는데, 새벽이는 워낙 울지도 않지만, 또 마음이 편해요. 어지간하면 아이들은 잘 자란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새벽이 아버님.”

“···으응?”

윤서가 “홍위 아버님” “금똥이 아버님”이라 부를 때마다 짓궂은 말을 했던 기억에 이향이 밍기적 대답했다.

역시나 윤서는, 이향의 얼굴을 보며 마주 누워서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물었다.

“제가 새벽이 아버님 눈에는 선녀로 보였다는 것이군요. 날개옷을 입은 선녀.”

“선녀지. 부인은 선녀요. 여러 유용한 지식을 가지고, 우리 홍위와 나를 지키기 위해 미래에서 온 선녀.”

“!!!”

아니 놀려 줄려고 했는데 이리 진지하게 답을 하시면!

“좋아요. 선녀가 정말 선녀해야겠네요. 앞으로 머릿속을 탈탈 털어서 온갖 것을 만들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지금까지 만들 수 있게 해준 것들만으로도 충분하오, 정말.”

“아니, 아니에요. 조선의 국왕을 사랑하게 된 선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열심히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전하.”

사랑의 맹세가 감미롭게 무르익는다.

윤서가 이향의 입술을 다시 훔치려 할 때였다.

“중전마마, 아기씨께서 배가 고프신지 자꾸 우시는지라······.”

밖에서 조심스럽게 고하는 박 상궁의 음성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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