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3화. 이향의 귀환
향오문에 들어서며 이향은 먼저 윤서부터 찾았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아이들과, 그 뒤로 화려하게 성장한 채 서 있는 여인들을 빠르게 스친 시선이 강녕전 대청마루 그늘 속 흰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잡아냈을 때.
“······!”
“······!”
이향은 저절로 미소를 지으며 비로소 ‘집’에 돌아온 듯한 평안을 느끼고,
찰나의 순간이지만 제일 먼저 오롯하게 자신만을 온전히 담는 이향의 시선 속에서 윤서는 새벽이의 출산 후 쉼 없이 이어졌던 고단한 날들의 피로를 단숨에 잊었다.
‘전하는 중전마마부터 찾는다.’
비록 눈 세 번 깜빡일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향오문을 들어선 순간 전하의 시선이 모두를 스쳐 중전부터 단단히 담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엄숙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정 귀인, 유 소용, 양 소용, 문 소용 등 후궁은 모두 보았다.
‘중전께서 현실은 늘 허구보다 극적이라 말씀하더니, 전하는 내 소설 속 사내들보다 더 다정하시네.’
작가의 시선으로 덤덤하게 전하를 관찰하는 유 소용과 달리,
정 귀인은 소매 속으로 손을 말아쥐고,
양 소용은 휴우, 나직하게 체념의 한숨을 내쉬고,
문 소용은 전하의 얼굴은 건성으로 보며 전날 “상왕 전하 시절 내명부의 대소사를 주관하신 분이 혜빈이시네. 말씀드려 놓았으니 가서 차근차근 일을 배워두시게.” 하고 말씀하신 중전마마의 말뜻을 곱씹었다.
윤서를 단단히 시선에 담은 후에야 이제 아이들을 눈에 담을 여유가 생겼다.
이향은 홍위부터 덥썩 안아 올렸다.
“잘 있었느냐? 목검도 익숙해지고?”
“예, 아바마마. 종으로 베기 연습했어요. 여기, 팔뚝이 단단해졌습니다.”
홍위가 목검을 휘두르며 얻은 팔 근육을 자랑했다.
홍위가 검술을 배우게 된 것은 천 내관의 검술을 보고 배우고 싶다고 조른 것도 있지만 윤서가 적극 찬성하고 나선 이유가 컸다. 홍위 심성이 너무 다정하니 강단 있는 무예를 통해 단호한 기질을 미리 길러주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였다.
다음은 희아였다.
희아가 ‘어머니께서 탈곡기처럼 발로 밟아서 동력을 전달하는 베틀을 함께 궁리해보자고 말씀하셨어요. 일본의 여러 번에서 우리 조선의 면포를 사고자 한다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제가 궁리하고 있습니다. 정종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하고 써 보냈던 서신을 생각해 낸 이향이 다정하게 물었다.
“베틀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했다고?”
“예, 아바마마. 이따가 설계도 보여드릴게요.”
이제 희아의 손을 잡고 있던 금똥이 차례다.
윤서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금똥이는 동시대 아이들과 달리 애정과 감정 표현에 거침이 없이 활달했다.
희아와 말을 나눌 때 이미 양팔을 넓게 벌리고 아버지 품에 안길 준비를 하고 있던 금똥이는, 안자마자 짧은 팔로 이향의 목을 단단히 감으면서 비밀을 말해주듯 속삭였다.
“아밤마아, 저도 헝아가 되었떠요.”
“그래? 축하한다! 동생이 생기니, 어떠하냐?”
“으응. ···에쁜데, 또 슷퍼요.”
“왜? 왜, 슬픈 것이냐?”
금똥이 젖 먹을 때 슬그머니 밀어내고 무릎을 차지하던 홍위 생각하면 무슨 뜻일 거 알 것 같으면서도 이향이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자 금똥이가 입술을 비죽비죽 하더니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어먼니가, 어먼니가, 으아아앙. 해벅이만 안아저요. 으아아앙.”
말하다 보니 새삼 설움이 복받치는지 금똥이는 아예 이향의 융복 자락에 얼굴을 묻고 통곡을 했다.
“그건 젖 먹는 아가라 그런 거야, 금똥아. 너도 새벽이만할 땐 늘 어먼니 품에 안겨 있었어.”
동생의 심정이 무엇인지 아는 형아 홍위가 의젓하게 달래고,
“이리 와. 누나가 대신 매일 안아줄게.”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희아가 팔을 벌리고,
여러 복잡한 심정이 들 수 밖에 없는 후궁들마저 소리 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홍위 때 이미 이런 일을 겪었던 이향은 대처 방법도 심리학 박사 윤서에게 배워 잘 알고 있다.
“아이쿠, 어머니가 새벽이만 안고 있어서 속상했구나. 그럼 어머니한테 새벽이 안아주지 말고, 울어도 그냥 두시라고 할까?”
“······.”
생각해보니 또 그러면 조그마한 동생이 불쌍하다. 금똥이가 조그만 머리통을 열심히 흔들었다.
“안니에요. 아가는, 아가는, 안나저야 해요.”
“그래. 아가는 아직 이빨이 나지 않아서 밥도 먹지 못해. 그러니까 어머니가 안고 보살펴야 우리 금똥 형님처럼 쑥쑥 크겠지?”
“녜에. 헝아니까, 도자도 헝님처염 띡띡해요. (네에, 형아니까, 소자도 형님처럼 씩씩해요.)”
한바탕 울어서 속이 풀린 금똥이가 배시시 웃고 이향의 품에서 내려와 홍위의 손을 잡았다.
하아, 고 녀석 참.
이향은 이제 선아를 보았다.
“잘 있었느냐? 소학을 얼추 배웠다고?”
“예, 아바마마. 매일 써서 외우며 부지런히 익히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닮아 화려한 미모를 보이기 시작한 선아는 예의 바르게 답을 올렸다.
이제 양 소용 차례다.
한참 더운 날씨를 구실로 속살이 살짝살짝 비치는 세모시 연녹색 긴 저고리를 입고 나온 양 소용은 습관처럼 나오려는 교태 어린 자태를 애써 자제하며 “긴 순행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하고 고개만 숙였다.
물론 숙이는 각도가 조금 깊기는 했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예전 지밀 나인 대하듯 양 소용에게 인사를 건넨 이향은 이제 유 소용의 손을 잡고 있던 금아를 안아 올렸다.
금똥이보다도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깡마른 몸이 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딸이다. 그래도 살아 있으니, 되었다.
“약 잘 먹고 있었느냐? 소용 어머니께 글자도 잘 배우고?”
“녜에. 잘 먹어요.. 그리구 ‘아바마마’도 쓸 수 있어요.”
“그래, 잘하고 있구나. 약이 써도 매일 잘 먹어야 한다.”
“녜에. 어머니가, 설탕 줘요.”
수양 대군이 해양 길을 개척한 후 여러 상단이 대마도를 거쳐 유구국까지 제법 오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후추와 설탕은 조선에서 그닥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되었다. 그 덕을 우리 금아가 보고 있구나.
“금아를 잘 돌봐주어 고맙네.”
“예,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이향은 유 소용과 덤덤한 인사를 나눴다.
유 소용이 쓴 소설들을 이향도 거의 다 훑어보았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한문으로 번역한 것들도 거의 다 훑어보았다.
저렇게 무감하게 생겨서 남녀의 상열지사를 서정적이고 애틋하게 그려내는 솜씨도 참으로 큰 재주라고 새삼 감탄하며, 이향은 이제 자신의 아이를 낳지 않은 두 후궁을 마주하였다.
“전하, 강녕하셨습니까?”
문 소용은 다른 생각에 빠진 듯 건성으로 인사를 올리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고,
“백성의 삶을 돌아보시느라 고초가 크셨습니다, 전하.”
정 귀인이 당당하게 시선을 마주하고 치하하였다.
“······.”
이향은 후궁 중 가장 오랫동안 동궁을 지켰던 정 귀인을 말없이 응시했다.
창덕궁에서 상왕 전하 내외께 문후를 여쭐 때에서야 이향은 어마마마께 새벽이를 낳던 날 교태전 구석에서 발견된 저주 제웅 이야기를 들었다.
“중전이 저주 따위의 사술을 담대하게 넘기는 성품이라 천만다행이었소. 심신이 약한 여인 같아서는 울며불며 무서워하다 무사히 해산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담담하게 대처해 새벽이를 무사히 낳고 또 바로 그 여파로 몰아칠 일을 먼저 대비해 놓느라 마음 편히 산후조리도 못 했으니, 주상이 잘 위로해주시오.”
“그리 당부하지 않아도 주상은 잘 위로하겠지. 주상, 내명부 일은 중전에게 맡겨두시게.”
왕가의 며느리들이 자꾸 물의를 일으켜 상소가 빗발치고, 경복궁의 내궁에 전에 없던 불온한 움직임이 생겨나는 것에 심기가 불편한 아바마마께선 불퉁하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큰일을 윤서는 세 통의 서신을 보냈으면서도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순행에 차질을 주지 않으려는 속 깊은 배려였다.
‘내궁의 누군가가 그 일에 관여했다면, 정 귀인이 아니겠는가.’
가장 먼저 후궁으로 뽑혀 들어왔고, 다른 두 후궁 중 하나는 세자빈이 되고, 나머지 후궁 하나는 가장 큰 총애를 받을 때 줄곧 소외되어 있던 그 원망으로 윤서를. 내 아들을 해치고자 한 것이라면.
정말로 그리한 것이라면!
정 귀인을 주시하는 이향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식었다.
“······?!”
만져보면 말랑하기만 한데 근육이 생겼다고 귀엽게 자랑하는 홍위와,
발판을 밟아 돌아가는 탈곡기를 지켜보다가 문득 영국 영화에서 봤던 방적기 생각이 나서 함께 만들어보자 지나가듯 말한 것을 벌써 이리저리 궁리하기 시작한 것을 고하는 희아와,
동생이 예쁘다고 옆에 엎드려 조심스럽게 뺨을 쓸어보다가 또 어머니는 새벽이만 예뻐한다고 골을 내다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변하는 금똥이가 아버지 품에서도 우는 것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윤서는,
이향이 오래도록 정 귀인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전하.”
차례가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려던 윤서는 서둘러 이향을 불렀다.
어떤 감정으로든 이향이 다른 여인을 오래 눈에 담길 바라지 않는다.
오랜만에 돌아온 남편 앞에 그의 후궁들이 저리 꽃처럼 차려입고 주욱 서 있는 풍경이, 교태전 마루 밑에 들어 있었다는 흉측한 저주 제웅보다 더 불쾌한 광경이다.
하아. 홍위가 혼인을 해 손주를 낳을 때에나 이 풍경이 익숙해질까.
이향을 부르는 음성에 저절로 원망이 스며든다.
“······!”
이향은 윤서의 음성에 깃든 초조함을 읽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우리 새벽이도 안고 있는데.
“다들 돌아가게. 희아야, 동생들 데리고 먼저 협경당에 가 있거라. 아버지는 어머니와 새벽이 보고 차차 가마.”
이향은 그리 말하고 성큼성큼 어도를 걸어 윤서에게로 갔다.
“금똥아, 누나가 안아줄까?”
희아는 아직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금똥이 얼굴을 수건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묻고,
유 소용과 양 소용은 각자 옹주 손을 잡고 돌아가고,
문 수용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정 귀인을 살피고 상궁과 나인을 이끌고 씩씩한 걸음으로 처소로 돌아가는데.
“······!!!”
정 귀인은 덜컥 내려앉는 마음으로 전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럴 리가.
흔적은 다 지웠고 무당 노릇을 했던 술사는 은자 두둑하게 받아 가지고 북방 어디로 피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나를 아끼진 않아도 아버님의 학식과 올곧음을 아끼시니, 의심하지 않으실 것이다.’
아니, 의심을 해볼 만큼의 관심도 아니 가지시겠지.
거센 바람에 펄럭이듯 주름 잡힌 융복 자락을 우아하게 휘날리며 빠르게 걷는 전하의 모습에선 대청마루 위에 서 있는 중전을 향한 강렬한 애정만 느껴졌다.
정 귀인은 씁쓸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윤서 앞에 다다른 이향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대청마루에 올랐다.
“네가 새벽이구나.”
희고 보드라운 강보에 싸인 아기가 새카만 눈동자로 이향을 빤히 응시하였다.
“하, 어마마마께서 어릴 적 나와 똑같다고 하시더니. 정말로 울지도 않고 침착하네. 새벽아, 안아주고 싶지만 아버지가 고삐 쥔 손을 아직 씻지 않았단다.”
애정이 듬뿍 깃든 음성이다.
윤서는 비로소 이향이 오랫동안 정 귀인을 바라본 사실을 용서했다.
“저도 뜰에서 기다리고 싶었는데, 노을에 새벽이 눈이 부실까 봐 여기 서 있었어요.”
그래서 뜰에서 기다리지 못한 무례부터 사과하였다.
이향은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에 윤서를 오롯하게 다시 담은 채 기단 한쪽에 서 있는 박 상궁에게 명했다.
“박 상궁, 새벽이 좀 안아서 먼저 협경당으로 데려가게.”
윤서를 안고 위로해주고 싶은데, 새벽이가 있어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 전하.”
박 상궁은 연신 벙싯거리며 조심스럽게 새벽이를 안아 물러나고,
마침내 이향은 윤서를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