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6화. 모의 수전 (2)
볼거리가 변변하지 못한 15세기 조선에서 가장 커다란 구경거리는 왕과 왕비의 행차와 외국의 사신단 행차 장면이었다.
행차가 예고된 날이면 그 전날부터 가노를 시켜 구경하기 가장 좋은 자리를 잡느라 야단법석이었고, 간식과 음료, 술까지 노비에게 들려 나들이 겸 놀러 나오는 귀부인들도 많았다.
보통의 행차는 왕과 왕비, 사신 등 높으신 분들의 권위와 위엄이 가장 돋보이게 구성되는 행렬이었다.
맨 앞에 광대 재인이나 여악(女樂) 재주를 부리거나 노래를 불러 흥을 돋구고, 그 뒤에 노란색 괘자를 입고 깃털이 멋들어지게 달린 노란색 초립을 쓴 악공이 나발과 태평소 나각을 불고, 징과 자바라, 용고를 두드리며 행진한다.
그리고 각종 의장기를 군병들이 위엄있게 행진하고, 말을 탄 관원이 앞장 선 후에야 시위 패에 둘러싸인 임금과 왕비의 어가 행렬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뒤로 말에 타거나 걷는 궁인과 시종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 속에서 진행된 행진에서 주연은 왕과 왕비가 아니었다.
새벽부터 육조 거리 좌우로 빽빽하게 늘어선 구경꾼들 앞에서 각종 의장기를 든 병사가 앞장 서고, 그 다음은 평소보다 빠른 사박자의 곡을 연주하는 주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며 뒤따랐다.
그리고 본격적인 행진을 시작한 이들은 평소 왕의 행차 시에 호위와 시위를 담당하는 상번 경갑사 오백 인, 북방에 파견되는 양계 갑사 오백 인, 그리고 앞으로 해안의 방어와 해양 무역에 종사할 수군 갑사 오백 인과 그들의 지휘자였다.
상왕 전하 내외와 신왕 전하 내외, 어린 세자를 비롯한 왕실의 주요 종친 인사들, 의정부의 삼정승과 문무 고위 관원은 육조 거리 동쪽 편 형조 앞에 높게 마련된 귀빈석에 좌정하고 행렬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 어머!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얼굴들이 훤할까요?”
“갑사는 용모를 보고 뽑으니까 그렇지요. 우리 생질도 지원했는데, 쏘는 족족 과녁을 맞히는 신궁인데도 키가 작아서 뽑히지 못했어요.”
“어머나, 정씨 가문의 자제면 무과를 보면 될 것을요. 솔직히 갑사가 몸 좋고 얼굴 훤하다지만 정식 무과 급제자만이야 하나요? 녹봉도 번을 설 때만 나오고.”
“···그깟 녹봉 얼마나 한다고. 전 재산이 많으니 갑사를 한번 만나봐야겠어요.”
“아하하, 하긴 하평 부인은 사별하신 지 이 년이 되셨으니 이제 슬슬 재혼 자리 알아볼 때도 되었지요.”
가노를 밤샘 시켜 잡아놓은 명당자리에 우아하게 앉아 눈동자를 바삐 굴리고 있는 여인들이 말하듯, 갑사는 본래 간단한 무예 시험만 거쳐 선발하는 직업 군인이었다. 일정 기간 복무 후엔 종4품 무관직을 받을 수 있어 지배층의 자제도 많이 지원했다.
그러나 타고 다니는 말과 군복, 군장 모두 스스로 마련해 갖춰야 했기에 재력이 없으면 지원하기 어려웠다. 또 왕의 행차에 시위로 서는 경우가 많아 용모도 따졌기에 무재, 재력과 함께 외모까지 갖춰야 했다.
이런 갑사의 채용에서 예외가 시작된 것이 행렬에서 세 번째 무리로 등장한 수군 갑사였다. 이들은 신분에 관계 없이 무재와 기민한 판단력을 시험해 선발하였고, 말과 군복, 무기 등 필요한 모든 물품과 경비는 호조와 병조에서 함께 지원했다.
앞의 두 갑사 행렬이 모두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붉은색의 철릭 위에 화려하게 장식한 활집과 동개를 어깨와 허리에 차고 칼집에 든 환도를 어깨에 걸고 손으로 받쳐 들고 행진하는 것과 달리,
수군 갑사는 짙푸른 바다색의 쾌자가 무릎 위로 한 뼘 올라오게 길이가 짧고 허리도 잘록 동여매 기동성을 강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장식 없이 투박한 활집과 동개를 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긴 환도는 허리 뒷 춤에 매달고 장창 하나를 왼쪽 어깨에 메고 오른손으로 받친 채 행진하였다.
옷의 폭이 넓고 길이가 긴 것이 신분의 상징인 시대에 기동성을 위해 짧고 좁아진 군복의 위엄을 보충하기 위해, 이들 수군 갑사는 어깨에 화려한 붉은색 견장을 달고, 견장 아래로 밧줄 모양으로 꼬아놓은 노란색 굵은 줄을 가슴께로 늘여 멋을 주었다.
“와, 저기 수군 갑사라고 뽑힌 이들 좀 보세요.”
“세상에. 신분에 관계 없이 뽑았다더니, 몸 기준이었을까요?”
“몸 기준이었네요. 그러니까 날렵한 허리가 강조되게 허리를 잘록하게 묶고 튼실한 다리가 잘 보이게 쾌자가 저렇게 짧지.”
“아니 옷 짧은 거야 배 위에서 언제든 싸우기 좋게 만든 것이지요. 치렁치렁하면 활이나 제대로 쏠 수 있겠어요.”
“맞네. 그러네. 역시, 절도사 댁 따님이라 그런지, 뭘 좀 아시네.”
여인들이 소곤소곤 수군 갑사의 몸과 군복에 감탄할 때,
사내들의 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와 열을 맞추어 착착 걷는 갑사의 절도 있는 동작과, 무재를 갖춘 청년들이 집단적으로 뿜어내는 투지와, 그리고 그 모든 우월함을 상징이라도 하듯 어깨 위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는 붉은색 견장과 노란색으로 가슴께에 늘인 장식에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자칫 광대 패처럼 보일 차림새가, 어쩐지 멋지다, 야.”
“진짜. 아주 기냥 무 찌르듯 사람 배를 쑤실 것 같이, 사내다워 보이네.”
“아버님, 저도 나중에······.”
“쓰읍! 물고기 밥 된다!”
돈과 재산으로 과시하듯 낚아채는 경갑사 자리도 아니고, 종4품 무관직을 얻을 자리 욕심에 자원하는 양계 갑사 자리도 아니고,
거친 파도 위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를 해적과 목숨 내걸고 맞서 싸워야 하는 수군 갑사가 갑자기 사나이들의 가슴에 뜨겁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날따라 주악대의 대취타 연주는 나각과 징, 용고의 편성을 대폭 늘려, 갑사들이 절도 있게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둥둥 함께 자극적인 진동을 만들어냈다. 듣고 있으면 저절로 저 무리에 합류하여 두 팔을 힘차게 휘저으며 함께 행진하고 싶은 호전성을 일깨우는 운율이었다.
행진의 절정은 호조 앞에 차려진 귀빈석을 지날 때였다.
경갑사의 행진이 귀빈석의 앞에 이르렀을 때 맨 앞에서 걸어가던 갑사의 우두머리가 갑자기 오른손으로 받쳐 들은 칼집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받들어, 검!”
그러자 행진하던 경갑사 오백 인이 일제히 검을 얼굴 앞으로 올리며 고개를 우로 올리고 걸음마다 사박자에 맞춰 외쳤다.
“목숨을, 다하여, 충! 성!”
이에 맞춰 주악대가 징과 북을 둥둥둥 힘차게 두드렸다.
때마침 일어서 계시던 두 분 전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바로, 검!”
그러자 경갑사 오백 인은 한 사람이라도 된 듯 검을 원래 위치로 돌리고 다시 힘차게 행진하는 것이었다.
“하아!”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우렁찬 충성 맹세가 주는 시각적, 청각적인 효과는 대단했다. 이 순간만큼은 출생 신분과 문무 고하 직위를 망라한 모두가 하급 직업 군인 갑사의 위용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날 군례의 절정은 수군 갑사였다.
미천한 신분으로 일 년 내내 녹봉을 받는 갑사로 임용이 되고, 말부터 군복, 의장, 그리고 혹여 부상을 당할 경우 치료와, 그보다 더 험한 일을 당했을 경우 가족의 최소 안전 생계 오 년 보장까지.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받은 오백 인의 수군은 지난 초봄부터 내내 엄격한 지도에 따라 헌신적으로 전투술, 장거리 항해 시의 위생과 건강 관리, 항해술 등을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 이날 행진 의식에서도 그간 닦아온 실력을 가장 힘차고 절도 있게 선보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쿵쿵 뛰게 하였다.
“중전 덕분입니다.”
수군 갑사 일동이 “받들어, 창!”의 의례에 따라 긴 창을 옆으로 들며 예를 표하고 난 후 남대문 방향으로 행진해 갔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가슴 뛰는 의례였어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향이 윤서에게 속삭였다.
그러하다.
이는 윤서가 현대의 열병식과 그 의미를 이향에게 먼저 귀띔하고, 이향이 이를 응용해 모의 수전에 앞서 갑사로 하여금 시범 실시하도록 명을 내린 군사 의례였다.
이날 시범을 시작으로 앞으로 출정하는 장수와 장병들, 그리고 전투를 치르고 돌아오는 장수와 장병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무기를 선보이며 군인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더 정교하고 화려한 군사 의례가 확립될 예정이었다.
이는 몇 년 내로 있을 토목보의 변을 기회로 건주 여진을 조선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향의 장기 계획의 일환이었다.
“상왕 전하, 이렇게 화려한 복장에 이렇게 둥둥 피를 자극하는 음악에 맞춰 여기 육조 거리를 행진할 수만 있다면, 우리 조선군에 들어 오고 싶어 할 여진의 사내는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여진뿐 아니라 왕족 중에서도 상당하겠소, 주상.”
세종까지 이날의 군례 행진이 가지는 잠재적인 매력을 한눈에 간파하였다.
이향을 열심히 내조해 홍위가 무사히 보위에 올라 오래 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미래 지식을 이용해 왕실 재정을 늘리는 것, 세종을 도와 모두 기본 교육을 받게 하는 것, 세습 노비 제도를 철폐하는 것 외에 정치에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던 윤서였다.
그런 윤서가 부족한 지식으로나마 현대의 군대 의례와 의복, 훈장, 견장 등이 가지는 심리적 효과에 대해 이향에게 조언하고, 정치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은 홍위 때문이었다.
‘고작 다섯 살 홍위도 백성을 위해 굶기까지 하며 세자다움을 실천하는데.’
명색이 중전이 되어 그냥 손을 놓고 있으면 되겠는가.
윤서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왕족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분에 상관없이 선발하게 된 수군 갑사가 수양 대군이 장차 무엇으로 회유를 하든 절대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국왕 이향, 그리고 훗날 홍위에게만 충성을 다하게 할 방편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 일환으로 떠올린 것이 ‘군인다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익히는데 가장 기본이 된다는 제식 훈련, 충성심과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특히 거대한 것에 헌신하고 싶어 하는 젊은 층을 매료시키는 장중한 행진 의례, 멋진 군복과 견장과 훈장, 그리고 그들을 올바르게 이끌 지도자였다.
그래서 윤서는 한명회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깨고 이향에게 속삭였다.
“수군 갑사를 키워내고 지도할 사람으로, 전하. 성삼문의 부친 성승과, 내금위에 있는 유응부를 써주세요. 이 두 분이라면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을 전하의 수군을 키워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향은 경상도 병마절제사로 나가 있는 무관 성승과, 활 쏘는 솜씨와 강직한 성품이 빼어난 무관 유응부에게 수군 갑사를 맡겼다.
앞으로 이 두 사람이 다양한 병법, 항해술, 해외 무역 실무, 둔전 농법, 염전 경영법 등을 가르치는 교육 과정을 관리하고 또한 국왕과 나라를 향한 뜨거운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킬 것이다.
수양 대군은 수군으로 이뤄진 군선과, 상단이 타는 상선을 함께 이끄는 지도자로서 항해를 떠나 국제 외교, 해외 무역 기지 개척을 책임지지만 군사 행동에 대한 결정권은 성승의 휘하 유응부가 최종적으로 가지도록 정치와 군사를 이원화하였다.
‘화려하구나. 정말로 화려하고 절도 있구나!’
성승과 유응부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수양 대군은 일단 수군 갑사의 화려한 위용에 지극히 만족하였다.
저렇게 대단한 무리를 이끌고 해외에 나가면 수십, 수백 척씩 떼를 지어 다니는 화인 상단과 왜구 해적으로부터도 언제나 안전할 것이고,
그러면 마음 놓고 해외의 진귀한 수입품을 대량으로 들여와 국내와 일본에 팔아 거대한 차익을 남길 수 있을 터였다.
‘돈이면 귀신도 부리니.’
먼 항해 길에 함께 목숨을 걸고 개척한 숙명의 시간이 결정적인 지원으로 작용하는 날이 없으리라고 그 누가 장담을 하겠는가.
형님은 장자란 이유로 편히 한양에서 행하는 그 모든 일을 나는 하나하나 내 몸으로 박박 굴러 이룩하노니.
이향 뒤에 서 있던 수양 대군은 “받들어, 창!” 외침이 자신을 향한 것인 것만 같아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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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전 마마, 저희 상단에서는 오늘 여기 한강진 일대 구경꾼에게 주먹밥을 제공하였습니다.”
윤서의 적극적인 이향 지원 행보는 내외명부의 여인들에게도 이어졌다.
동전과 은전으로 찍어낸 화폐 통용이 시작된 후,
기존의 부자들은 이번에도 여지 없이 화폐가 제대로 통용되지 않고 실패로 끝이 나리라 확신하며 거대한 창고에 산처럼 쌓아둔 면포를 처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에는 태종과 세종 때의 화폐 유통 때와 돌아가는 형세가 달라 보였다. 화폐 대신 지불 수단으로 이용되던 오승포 면포를 산처럼 쌓아둔 이들의 근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근심을 이용해 윤서는 이향의 내조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