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85화 (185/255)

제 185화. 모의 수전 (1)

역풍을 받으면서도 배가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삼각돛 범선 개발을 책임지고 있고, 새로 뽑아 육성한 직업 군인인 수군 갑사와 그 휘하 일반 수군 병사, 그리고 몇몇 상단의 무리까지 거느리고 다시 먼 항해 길을 나서야 하기에 수양 대군은 자신이 모의 수전의 주인공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늘 자신을 조선의 중심에 놓고 싶어 하는 대군의 욕망이 빚어내는 착각에 불과했다.

모의 수전은 이향이 그리고 있는 커다란 그림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즉위하기 전부터 이향은 틈이 날 때마다 윤서가 적어준 미래 지식을 보며 여러 현안을 고심하고 또 고심하였다.

윤서가 군제에 대해 적어준 종이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시험을 보기 위해 암기한 내용이라 용어만 알고 실제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조선에 올 줄 알았으면 논문까지 다 외웠을 건데!!!) 위대하신 우리 세종 대왕님의 천재 아드님이시니, 잘 유추하옵소서 ^.^;;)

초기 오위 체제가 세조(수양 대군) 때 진관체제로 바뀌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 시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지휘 장수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투를 해야 해서 효율적인 방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별다른 저항 없이 한양까지 며칠만에 당도할 수 있었다.

어명을 받은 장수 신립이 청주에서 배수의 진을 쳤으나 몰살당했고, 그 후 왜군은 이렇다 할 전투 없이 한양까지 그대로 진격했다.

이때 왕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간 후, 백성을 버리고 요동으로 넘어가겠다고 고집하여 당대는 물론 현대에까지 두고두고 욕을 먹었음. 명나라에서 원병을 보내주어 전쟁은 7년간 지루한 대치를 계속했음.

이때 백성이 많이 죽고 전 국토가 황폐하게 되어 회복하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다고 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과 거북선으로 왜적을 분쇄하며 바다를 지켜 그나마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 만세! 이분은 고작 열두 척의 배로 왜구의 수백 척 배를 섬멸한 위대한 장군으로 전 세계 군사학 교재에도 실려 있습니다. 난중일기란 일기도 남아 있었어요. (읽진 않았지만;;) 이분 사당 현충사가 제 고향과 가까워서 꽃 피는 봄에 엄마 아빠와 김밥 싸서 많이 놀러 갔었어요^.^ 아, 엄마 아빠 보고 싶다!!!)

이순신 장군 영화에서 보면 판옥선은 선체가 거대하게 높은 배로 노 젓는 병사들은 지하에 있고, 활과 포를 쏘는 병사들은 갑판 위에 있어 전투와 노 젓기가 분리되어 있어 방향 전환이 빨랐다고 합니다. 거북선은 거북이 머리 모양으로 (밑 그림 참조) 생겨서, 입으로 대포를 쏘았고, 뾰족한 철판을 씌워 왜적이 배로 오를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거북선 안에서 밖을 어떻게 내다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 후 1637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건주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세우는 나라.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지배합니다.)의 기병이 의주대로로 거침없이 쳐들어와 강화도로 피난을 가던 왕이 배를 못 띄우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있다가 청나라 황제에게 아홉 번 절하고 항복하였습니다. 이때 우리 백성 수십만 명이 포로로 심양으로 끌려가는 참화가 있었습니다.

군제는 처음에는 양인이 군역을 부담했으나 곧 면포로 내고 다른 이가 대신 군역을 지는 것으로 바뀌었음. 세 살짜리 아기, 이미 죽은 이에게까지 면포를 부과해 백골징수(?)라고 백성의 고초가 지대했으니 이는 개혁하셔야 합니다!]

밑에 거북선이라고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향은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게 된다. 다른 건 다 잘하는 윤서가 그림 솜씨만은 영 서툴러서이다.

미래 지식을 알게 되면서 이향이 가장 놀란 점은 명나라가 이백 년이 지나기 전에 멸망한다는 점, 그것도 지금 면포와 비단과 자기 등 여러 하사품을 받기 위해 해마다 입조하는 오랑캐 여진족에게 멸망한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사절을 보내 무역을 청하는 일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장사치 출신 인물의 지휘하에 조선을 침략한다니. 그리고 그로부터 사백 년 후 기어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삼는다니!

우리 조선이 성리학의 농본상말(農本商末) 정책으로 공평한 빈곤의 나라를 실현하는 동안 저들은 저리 눈이 부시게 발전하는구나!

처음에는 너무 거대한 지식이 한꺼번에 몰아닥쳐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받아온 체계적인 교육과, 윤서가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다고 그토록 극찬하는 새 문자 정음 창제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할 만큼의 빼어난 사고력의 소유자 이향은 현재 실행 가능한 일을 따로 정리하며 차곡차곡 실행안을 짜고 있었다.

이를 테면 군제에 대해서 이향은 현재 시점에서 유추 가능한 내용만 따로 정리해 적고, 이어 추측한 바를 덧붙였다.

[거북선은 태종 때 왜구를 물리치는 데 사용했던 것과 유사하다. 시각적으로도 적에게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 판옥선은 격군이 지하에 있으니 전투 형세와 관계없이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어 기동성이 빼어나다. 또한 선체가 높아 왜적이 배로 기어오르기 어렵고, 배를 몰고 적선에 부딪쳐서 침몰시킬 수도 있다. 기동성을 살려 배의 방향을 수시로 바꾸려면 포대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으면 안 되니, 이동 가능한 대형 화포를 탑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필요한 참고 사항을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고금의 문서를 통해 찾아내라 명하였다.

군제의 경우 중국의 역대 왕조는 어떻게 군역을 지웠는가, 필요한 국방 재원은 어떤 세금의 형태로 조달하는가를 성삼문, 최항, 이계전, 하위지 등 집현전 학사에게 조사하게 한 후 이에 비추어 조선의 군제의 현황을 비교하고, 개선안을 제시하란 명이었다.

이렇게 취합한 내용을 세종에게 먼저 보여 향후 나아갈 방향을 결정지은 후 비로소 의정부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를 불러 실무 논의에 들어갔다.

20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투표란 것을 하여 ‘대통령’이란 한시적 왕을 선출하는 체제에서 온 윤서는 때로 놀라울 정도로 전제적인 면을 보이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였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부단한 정치 투쟁을 통해 국민의 정치의식이 발전한 후에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법과 제도와 인권과 교육이 미비하고 향후 일본과 중국의 침탈이 예고되어 있는 지금의 현실에선 태종과 세종, 당신과 같이 빼어난 지도자의 강력한 선도만이 백성을 위한 강대한 조선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윤서는 역사의 비극이 김종서를 비롯한 원로 대신의 독단과 자만에서 기인한 바도 적지 않다면서, 아무리 충성스러운 신하라도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이향은 나라의 근본 방향을 결정짓는 통치 행위는 국왕만이 할 수 있다고 결론 짓고 국정 운영 경험이 풍부한 상왕 전하와 먼저 논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 이향은 윤서가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이 두드러지지 않게, 윤서가 독극이 든 약식을 먹은 후 잠시 사후 세계를 방문하면서 미래 지식을 엿보는 꿈을 꾸게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미래 지식을 정리하여 세종께 보여왔다.

그러나 군제 개혁은 나라의 총역량을 담보로 추진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기에 백 년 뒤에 있었던 임진왜란, 그로부터 또 삼십 년 후에 있었던 병자호란을 상세히 기술할 수밖에 없었다.

“···윤서가 쓴 원본을 보자!”

이향이 정리한 문서를 읽다 두 차례의 전쟁에 큰 충격을 받아 끙 눈을 감으셨던 세종께서 꺼낸 첫마디였다.

실은 그간도 세종은 윤서가 시시때때로 수북하게 써 아들에게만 보인다는 그 종이의 내용이 궁금해서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질 정도였다.

학당의 기본 교재를 만들기 위해 다방면의 지식을 광평 대군과 함께 전수받으면 받을수록 느끼는 바는, 이 지식의 폭과 깊이가 꿈을 꾼다고 얻어질 종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신기하고 방대한 지식을 향이만 전수받는다니!

“이번 이 군제와 향후 외적의 침탈에 관련된 내용뿐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서도 네게 써 준 그 종이 원본을 보자꾸나!”

“안 됩니다, 아바마마.”

평생 효성스러운 아들이자 완벽한 후계자였던 아들이 처음으로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왜? 대체, 왜 안된다는 것이냐?”

“···윤서가 중간중간 저를 향한 연심의 말을 써놓았기에, 아바마마께 보여드리기가 참으로 민망합니다. 송구하옵니다.”

“무어?!”

세자 시절부터 이향이 순행을 나갈 때마다 왕에게 보고를 올리는 편에 윤서에게 쓴 연서를 딸려 보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체 그 점잖기만 한 애가 윤서에게 매일같이 무엇을 서신에 쓰는지, 신첩도 한번 읽어 보고 싶습니다.”

소헌 왕후가 신기해할 만큼 의외의 행보였는데, 이에 반해 윤서는 답신을 보내는 일이 드물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답신을 이런 중차대한 내용에 섞어서 쓰고 있었다니!

어허, 참.

상왕이 되어 아들 내외간 주고받는 은밀한 밀어를 보자고는 할 수 없는 노릇.

그러나 세종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주상. 미래를 대비하는 일은 나라의 사직과 관련된 일. 예로부터 미래의 조각이라도 얻어보려고 거북점을 치고 천신께 제를 올리는 둥 여러 행위를 해왔소. 그런데 이제 우리 조선에는 이 임진년의 왜란과 병자년의 호란을 미리 알게 해줄 정도로 기막힌 예언가가 생겨났으니, 조선의 홍복이오. 허니 주상은 윤서가 엿본 그 미래 지식을 가감 없이 따로 정리하여 상왕인 나와, 주상, 그리고 장차 보위에 오를 홍위, 그 이후엔 홍위의 뒤를 이를 후계만이 볼 수 있는 제왕 전용 기밀문서를 만들어 전해야 할 것이오.”

“예, 상왕 전하. 이미 집필 중입니다.”

이향은 윤서가 생각날 때마다 써내는 조선사와 세계사를 같은 연대별로 정리하여 기술하는 작업을 이미 진행 중이었다. 어느 정도 분량이 모이면 상왕 전하께 먼저 보이고, 홍위가 열다섯 살이 되면 건네줄 <세계사 예언록>이었다.

“우리 조선에서 시행 중인 조용조 제도는 군주가 전 국토의 주인이라는 유교적 사상과 균전제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미 중국에서는 폐기된 지 오래란 말이냐?”

“예, 아바마마. 토지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인(人)마다 요역과 포로 세금을 부과하는 조용조 제도는 이미 당나라 중기에 폐지되었고 그 이후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모든 세금을 농사짓는 토지에 따라 봄가을로 화폐로 징수하는 양세법을 시행하였다고 집현전에서 보고해 올렸습니다. 중국에서 화폐 유통이 발달하고 덩달아 상업이 발달하게 된 것은 이 양세법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화폐를 유통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장은 어려울 것이니.”

“토지에 따라 쌀로 세를 받아들이고 십 년 정도 기간을 두었다가 화폐가 완전히 정착한 후 시행하면 될 것입니다.”

“으흠, 전국의 지주가 모두 다 들고 일어날 것이다. 지주들이 거의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이니 이는 단순히 세법만 바꾸는 문제가 아님을 저들도 곧 간파할 것이고.”

“유학이 지나치게 사변적인 성리학으로 흐르는 점은 아바마마께서도 근심하신 바가 아닙니까? 주자 이전의 유학, 공자께서 온 중국을 쏘다니며 군주를 통해 뜻을 펼치려던 통치학으로서의 유학을 되살릴 때가 되었습니다.”

세종과 이향은 앞으로 닥쳐올 국제 정세의 변화에서 조선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군제를 비롯해 세금 제도와 교육 제도를 어떻게 아울러 바꿔나가야 할지 시일을 두고 치열하게 논의하였다.

때로 관련된 부분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신하들을 불러 실무 의견을 묻기도 하였고, 집현전에 명해 필요한 지식을 더 찾아내 보강하라 명하고, 관련된 분야의 지식을 윤서에게도 물어 확인하길 거듭한 끝에.

이향은 단기 5년, 장기 10년의 일차 조선 개발 계획을 세우고 그 시작을 모의 수전을 통해 화려하게 선보이기로 작정한 바였다.

그리하여 10월 3일.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 속에 광화문에서 주악대의 힘찬 연주를 앞세운 행렬이 시작되었다.

“와, 저기 수군 갑사라고 뽑힌 이들 좀 보세요.”

“세상에. 신분에 관계 없이 뽑았다더니, 몸 기준이었을까요?”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이 대단한 구경거리를 위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던 아낙들 입에서 탄성이 소곤소곤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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