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화. 나 또한 세자에게 보위를 넘기려 하오!
세종께선 병환이 나셨다.
밤잠을 잊고 새 지식을 탐구하시다가 지병인 소갈증이 악화되신 것이라고 외부에는 공표하였지만, 실은 참담한 미래를 알게 된 데에 따른 심리적 충격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다른 때 같으면 시약청이 차려진다, 조정의 조회가 중지된다 온통 부산스러우련만 세종께서 “세자가 이미 정무를 관장하고 있으니 수선 떨 것 없다”라는 말씀으로 모든 번잡스러운 처치를 마다하시고 소헌 왕후와 함께 연희궁으로 피병을 나가셨다.
윤서도 당분간 희아, 홍위, 금똥이와 함께 연희궁에 거하게 되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아바마마께서 지금 느끼실 가장 큰 감정은 배신감이오. 늘 자랑이 되어온 아들 중 상당수가 수양의 편에 섰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또 자식처럼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집현전의 학사들도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원망, 일생의 헌신이 넝마처럼 무화되었다는 허무, 이 모든 것이 저하의 심신을 피폐하시게 몰아갈 수 있으니 윤서, 당신이 아이들하고 함께 가서 살펴드렸으면 좋겠소.”
한참 수척해진 윤서에게 이향이 미안한 기색으로 당부하기도 하였지만, 그런 당부가 없었어도 윤서는 따라가서 살필 마음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직접 지식을 전하면서 목격한 세종의 광적이기까지 한 지식 욕구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희궁은 하륜이 궁궐터로 손꼽던 명당으로, 경복궁에서 서쪽 아현 고개 넘어 현대의 연세대학교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왕가의 피병을 위한 이궁으로 지어진 탓에 궐의 엄격한 건축 양식을 따르지 않아 규모가 큰 여염집 형상이었다.
다만 이향이 미리 안산에서 흘러들어오는 계곡물을 가둔 후 석탄을 때서 데우는 목욕탕을 경복궁 후원처럼 호사스럽게 만들어둔 점은 같았다.
“시중드는 궁인도 최소한으로 줄이거라. 지금은 그냥 모든 짐을 벗고 보통의 늙은이처럼 지내고 싶다.”
마차에서 내리시며 단호히 선언하신 세종께서는 머리에 건도 쓰시지 않고 대충 상투만 틀어 올리시고 의복도 아예 편안한 평복을 입으셨다.
그에 따라 중전마마도 윤서도 아이들도 모두 거추장스러운 당의와 머리 장식을 벗고 소박하게 지내게 되었다.
목욕탕이 있는 후원으로 바로 문이 나 있는 안쪽 건물에 거처를 정하신 세종께서는 어의의 진료를 받을 때와 의녀에게 안마를 받으실 때를 제외하고는 정말로 보통 할아버지처럼 손주들을 불러 시간을 보내셨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윤서에게 새 지식을 묻는 대신 금강경과 법화경 등 여러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서책을 탐독하며 군주로서 인간으로서 살아온 생애 전체를 반추하시는 듯 하였다.
“그래도 전하, 새해는 궐에 돌아가 맞이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정 신하들이며 또 여진과 왜에서 온 사절도 접견하셔야 하고요. 망궐례(望闕禮)도 주관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연희궁에 온 지 이레째 되는 음력 12월 25일,
희아는 보료에 편히 기대 서책에 푹 빠져 있고, 홍위는 나무로 만든 팽이를 돌리는 법을 금똥이에게 보여주고 있는 오후였다.
금똥이를 무릎에 앉히신 채 “옳지, 홍위야. 옆을 살살 쳐야지. 이렇게 팽이가 돌아가는 속도를 계산해낼 수 있느냐, 희아야?” 하고 흥겨워하고 계신 세종을 향해 소헌 왕후가 근심스럽게 여쭈었다.
“이제 많이 나아지신 것 같은데, 전하. 염이더러 문안 오라고 할까요?”
소헌 왕후께서 세종께서 가장 사랑하신 아들이라고 여러 번 실록에까지 기록된 막내 아들 영응 대군을 슬쩍 거론하셨다.
연희궁에 오신 후 세종께서 조정의 일을 보고하는 세자와, 전순의와 여러 의녀를 데리고 탕약을 시약하는 광평 대군의 문후만 받으시는 까닭이었다.
“아니에요, 중전. 혼인 후 거처할 궁 건축으로 분주할 터인데, 되었습니다.”
“······.”
세종께서 또 그렇게나 사랑해 마지않는 막내아들의 소환을 거절하셨다.
그러자 소헌 왕후는 윤서를 향해 고개를 잘게 흔들어 보이셨다.
‘네가 사람의 마음을 잘 아니, 전하의 심기를 좀 내게 알려다오.’
하시는 뜻이셨다.
“중전마마, 외조모님의 쾌유를 위해 유 승휘가 금강경을 정음으로 번역해 보내왔습니다. 붉은 비단에 금이 들어간 먹으로 정성껏 썼사온데, 보시겠습니까?”
아이들이 세종을 뵈러 들어오면 보모 역할로 함께 와 방구석에 서탁 하나 놓고 여러 업무 서류를 처리하는 것이 일과인 윤서는 못 알아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이미 친정의 멸문이라는 비극을 겪으셨고, 쇠약해지신 친정어머니 환후에 근심이 많으신 중전께 미래의 비극이란 짐마저 얹고 싶지 않은 애정 때문에 세종께서는 원래 역사에서 처세가 미심쩍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아들들을 만나길 한사코 거부하고 계셨다.
그 마음까진 모르시나 세종께서 무언가로 깊게 번민 중이시라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던 소헌 왕후께서 윤서의 말에 장단을 맞추셨다.
“오오, 유 승휘가? 기특한지고. 그렇지 않아도 내 내일 원각사에 가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예정인데, 가지고 가서 약사 부처님 앞에 바쳐야겠구나.”
소헌 왕후께서 말씀하시자, 세종께서는 팽이를 향해 팔을 뻗으며 버둥거리는 금똥이를 돌려 안으시고 새카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시며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아가야. 모든 것이 다 얽혀 있어 서로가 원인이자 결과라는 연기법의 가르침을 네가 아느냐? 너 또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던 무수히 많은 부처를 이미 만났더냐? 그 겹겹의 인연으로 네가 우리 홍위 동생으로 온 것이더냐?”
“어아, 어아.”
할아버지의 말씀을 알아들을 리 없는 금똥이는 형아를 부르며 몸부림쳤다.
그 모습을 본 홍위가 팽이를 멈추게 한 후 집어서 금똥이에게 건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바마마, 금똥이는 애기여서 그런 맛씀 아직 어여워요. 팽이 쥐고 노게 해 주세요.”
윤서에게 지식을 갈취하시던 모습에 놀랐던 홍위는 할바마마께서 또 어린 동생에게도 무얼 시키실까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금똥이는 홍위가 건넨 팽이를 쥔 후 끙끙거리며 몸을 비틀어 세종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신나게 방 한가운데로 기어가 앉은 후 팽이를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홍위를 보며 “어아, 어아!” 어서 팽이를 다시 돌려달라고 졸랐다.
“헝아가 해 주께. 기다여, 기다여야지, 자꾸 던지지 마.”
홍위는 팽이를 집어서 팽이 채가 금똥이 얼굴에 닿지 않을 거리로 물러난 후 다시 팽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똥이에게 팽이 채를 건네주었다.
“그엏게 세게 하면 안 돼. 삿짝삿짝 쳐야 해. 금똥아, 삿짝. 아고 너무 세게 쳐서 넘어진다.”
홍위는 마구잡이로 채를 휘두르는 금똥이의 손을 잡아서 제대로 하게 하려 애쓰고, 그런 둘의 모습을 슬쩍 본 희아는 “아기가 무슨 팽이를 쳐. 그렇게 정교한 손동작은 더 커야 가능한 거야. 좀 있으면 답답하다고 울텐데.” 하고 말했다.
과연 희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똥이는 형아처럼 안 된다고 채를 던지며 으아앙, 엎드려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엉덩이를 치켜들고 울었다.
그러자 당황한 홍위는
“헝아가 가으쳐 주께. 금똥아, 헝아 앞에 앉아 봐. 헝아랑 손 잡고 삿짝삿짝, 응?”
달래며 금똥이를 일으켜 앞에 앉힌 후 왼손으로는 가슴께를 안고 오른손을 금똥이의 오른손에 겹쳐 함께 채를 잡고 옆으로 누워 있는 팽이를 쳐서 돌리려 무진 애를 썼다.
우는 척만 했지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렸던 금똥이는 형이 같이 채를 쳐주자 언제 울었냐는 듯 꺅꺅 소리내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렇지만 넘어져 있는 팽이는 바닥을 구를 뿐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희아가 “아이, 귀찮은데.” 하고 일어서서, 팽이를 집어 쌩 돌려주었다.
“눈나, 고마워. 금똥아, 눈나가 팽이 도게 해 줬으니까, 삿짝 쳐, 삿짝. 이어케! 이어케!”
홍위는 다시 금똥이 손을 겹쳐 쥐고 조심스럽게 채로 팽이를 때리며 놀았다.
“중전, 이 다음부터는 말이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세종께서 소헌 왕후께 말씀하셨다.
“우리 왕실에서 아이를 낳으면 다른 후궁이나 신하 집에 맡기지 말고, 낳은 어미가 자기 처소에서 직접 키우게 합시다. 형제끼리 남남처럼 뿔뿔이 흩어져 자라게 하지 말고 홍위와 금똥이처럼 저렇게 함께 크게 말이오.”
“···윤서가 키우듯 말입니까?”
“그렇소. 나도 어려서 형님들과 따로 뿔뿔이 흩어져 컸지만, 또 유도 너무 어릴 적에 궐 밖에 따로 떨어져 자라서, 그래서 형제간에 정이 덜하고 매정한가 싶어서······.”
“그건 유 잘못이 아니라 현동이 어미가,”
윤씨 부인을 말하려다가 이미 죽고 없어진 사람이란걸 떠올리신 소헌 왕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한참 침묵한 왕후께선 이윽고 깊게 한숨을 내쉬시며 “아미타불” 탄식하셨다.
“정말로 함께 있는 것이 좋아요, 할바마마 할마마마. 양부모께서 전심으로 잘 돌봐주셨지만, 상전 모시듯 어려워했어요. 궐에 돌아와 홍위와 아바마마와 권 승휘와 매일 함께 보내고서야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어요. 금똥이도 매일 보니까 더 귀엽고요. 그리고 할바마마,”
처음 궐에 돌아왔을 땐 얼음공주처럼 무표정했던 희아가 부드러운 애정을 담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팽이가 도는 속도 구하는 거요. 그거 어쩌면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스승님께 말해볼래요.”
스승인 이순지와 함께 팽이가 도는 속도를 구해 보겠다고 말하는 희아의 눈에 호기심이 생생하게 반짝거렸다.
“그래. 그래. 그러자꾸나. 이리 오너라.”
세종께서는 미간을 찡그린 채 남몰래 길게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옆에 다가온 손녀를 기특하단 듯, 혹은 애처롭다는 듯 거듭거듭 쓰다듬으셨다.
한참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신 후 세종께서 윤서와 소헌 왕후를 보며 말씀하셨다.
“무수히 많은 윤회의 고리를 거치는 동안 세존께서는 성문과 연각, 보살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여러 번 현현하셨다고 말씀하셨소. 그 무수한 만남 중 단 하나라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세상과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니,”
세종께서 멀리 앉아 있는 윤서의 눈을 의미심장하게 직시하셨다.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다른 미래를 볼 시간이오.”
“!?”
소헌 왕후께선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 의아하신 표정이셨지만, 윤서는 바로 알아들었다.
번뇌의 시간은 마침내 끝났다는 선언이셨다.
그리고 그날 밤, 세종께서는 세자와 의정부의 삼정승, 그리고 육조의 판서를 모두 연희궁으로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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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하루 날이 관상감에서 뽑은 길일로, 천지신명의 성스러운 기운이 종묘사직의 안위를 굳건하게 축복하는 날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내 권 승휘를 세자빈으로 책봉하는 날을 그 날로 정했으나, 요 며칠 몸이 심하게 아픈지라 다르게 결정을 내렸다.”
“!”
“!”
낮 동안 아이들이 활기차게 놀던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전하, 전하께서 늘 백성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지라 옥체 미령하신 지 오래이옵니다. 다행히 세자 저하께서 정무를 탄탄히 보고 계시니, 초정 약수에 가서 더 요양하시면 어떠하신지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황희가 먼저 나서서 요양을 고하였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부러 허술하게 빗으신 머리를 좌우로 흔드셨다.
“내가 태종께서 건네신 이 나라 조선을 누린 지 이십 년도 훨씬 넘게 지났다. 그간 경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뤘으나 또한 미진한 것도 여전히 있지. 그러나 겨울이 지나면 새봄이 오듯, 만물에겐 다 때가 있는 법. 이제 세자는 내가 보위를 물려받았던 나이보다 훨씬 더 원숙하고, 훨씬 더 정무에 밝으니. 나 또한 세자에게 보위를 넘기려 하오!”
“전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거두시옵소서!”
이향과 신하들이 일제히 엎드려 외쳤다.
“전하, 이미 세자 저하께서 거의 모든 정무를 맡으시고, 전하께서는 군권과 인사권만 행사하고 계시온데 구태여 양위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디 망극한 말씀 거두어 주옵소서.”
좌의정 하연이 눈물을 흘리며 고하였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도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망극한 말씀 거두어 주옵소서.”
“통촉하여 주옵소서.”
그러자 세종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태종께서 날 세우실 때 면복을 입혀 그대들 앞에 내세우셨다. 나 또한 그리할 것이니, 차질 없이 준비하거라. 번복은 결코 없을 것이다. 다만,”
‘다만’이라니.
모두가 솜털 하나까지 바짝 세우며 세종의 말씀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