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1화. 윤서의 세종 트라우마
“······.”
“······.”
권좌에 올라 있는 자와 장차 오를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세자를 위해 다른 똑똑한 동생들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가 멸문을 당한 외가 민씨 가문,
죽음을 몰고 오는 삿된 기운을 피하시게 하기 위해 이 절에서 저 절로 어머니를 모시고 옮겨 다닐 때, 정신이 드시기만 하면 제발 네 형 양녕을 죽이지 말라 애원하시던 모후 원경 왕후의 마지막 모습.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난 친정의 비극에 정신을 놓아버린 듯 울지도 못하던 아내의 모습.
저주와도 같은 그 숙청의 굴레를 벗겨내기 위해 지극히 애를 쓴 끝에 결국 맞이한 미래는 그 피의 업보가 대를 건너 아들 대에 벌어지게 하였다는 자괴까지.
일그러진 표정 속에 담긴 제왕의 고독과 결단과 슬픔을 효심 지극한 세자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향은 부왕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바를 먼저 고하였다.
“지금 유와 우리 수륙군이 유구에서 천축국에 이르는 여러 섬의 항로를 익히고 있습니다. 허니 소자가 종국에는 호주에 가닿아 정착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하아.”
원하는 대답을 받아낸 세종은 비로소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펴시고 다시 제왕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내 현실적인 문제를 짚으시기 시작하였다.
“유가 과연 가려 할지, 또 유를 따라가려 할 무리가 있을지 의문이다. 새로 개척한 서북 4군과 동북 6진 지역에도 가서 살려 하지들 않는데 말이다.”
“호주의 동부는 꽤 비옥한 땅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이향은 결국 지도를 짚으며 윤서에게 먼저 배워 알고 있는 사항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호주에 정착해 새로 나라를 만든 이들은 여기 유럽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라는 곳에서 보낸 죄수 일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먼 곳에서부터 죄수 나부랭이들도 가서 정착하여 일궈내는 곳인데 유나 다른 조선인이 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미 영락제 때 여기 아프리카 연안까지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유와 그 일당을 죽이는 대신,
“유가 가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유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왕실의 다른 형제들의 운명에 대해 심려하지 마옵소서, 아바마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기어코 재확인한 세종은 이제 그 천재적인 시야를 미래로 돌렸다.
“그래. 두창 예방 침이 보급되면 인구가 빠르게 늘 것이다. 게다가 학당이 보급되며 지식이 늘면 여기서 노비로 사는 것보다 새 땅에 가서 기회를 잡고자 하는 백성들도 많아질 것이야. 5년, 앞으로 5년 이상의 장기 계획을 가지고 빈틈없게 추진하자꾸나.”
“예, 아바마마.”
“가 쉬거라. 지금쯤 윤서가 소식 듣고 가슴을 졸이고 있을 것이다.”
“예, 아바마마. ···그리고, 윤서는.”
이향은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바마마께서 지극히 자애로우시다고는 하나 또한 군주였다. 미래의 지식을 가진 존재가 그릇되게 마음을 먹을 때 어떤 위험이 되는지 뻔히 아실 수밖에 없다.
“비록 꿈에서 여러 서적을 본다고 하나 그 지식을 오로지 저와 홍위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여인입니다.”
“···꿈에서라.”
과연 꿈에서 서책 몇 권 본다고 얻어질 지식과 통찰인가.
그러나 세종은 머릿속에 피어나는 의문을 애써 외면했다.
오늘 밤 이 추위에 저리 달려온 이유가 자신의 부름보다 혹여 윤서가 어찌 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서는 사람 죽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더구나. 그러면 기본 심성은 갖춘 것이니라. 다만,”
세종은 이제까지 굳어 있던 아들의 입매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았다.
“···다만 윤서의 꿈에 대해서는 너와 나만 아는 것으로 하자. 윤서가 건네는 지식은 내 모두 취합하여 어느 선까지 공개할 것인지 장차 정할 것이니.”
이향은 아까부터 멈추고 있던 숨을 비로소 내쉬며 머리를 조아렸다.
“예, 아바마마. 조금 더 침수 드시옵소서.”
“먼 길 달려오느라 고생하였으니, 향이 너도 오전에는 좀 쉬거라.”
이향은 절을 올리고 침전을 물러 나왔다.
‘아바마마께서도 사람 죽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시니, 윤서의 지식이 우리 조선을 위해 체계적으로 쓰이겠구나.’
이향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관이 밝히는 등롱의 불빛을 따라 걸었다.
*****
협경당 안에 들어선 이향은 윤서가 서재로 쓰는 전각에 불이 훤히 켜진 것을 발견하였다.
“···윤서가, 왜?”
잠을 안 자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 앞에서 나인과 함께 번을 서고 있던 조 상궁이 나직하게 고하였다.
“전하께서 금선패를 보내셨다는 소식을 엄 상전에게 들으시자마자 아기씨를 유모에게 맡기시고 무엇인가를 내내 적고 계시옵니다.”
“···너희는 모두 물러가거라.”
이향은 궁인을 모두 물린 뒤 조용히 문을 옆으로 밀어 열었다.
사각의 등불이 여기저기 환하게 불을 밝힌 방안은 온통 글자가 적힌 종이로 가득하였다.
“부인!”
아는 지식 모두를 적고 있던 윤서는 부드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암청색 두꺼운 철릭을 입고, 손에 방한모를 든 이향이 서 있었다. 이엄을 썼다가 벗느라 늘 단정한 머리카락이 몇 가락 망건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윤서는 붓을 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전하께서 저를, 그냥 두신다 하시던가요?”
미래를 아는 괴이한 것이 동궁에 들어앉아 있다고, 그런 위험한 것은 제거해야 한다고 저하를 급하게 불러들이신 것이 아닌가요.
전하께서 하마연 연회 중간에 궐에 돌아오셔서 대전 내관에게 금선패를 주어 이향을 불러오라 명을 내리셨다는 소식을 엄자치에게 들었을 때.
천추전에서 세종을 두 번째로 알현하였을 때 들었던 음성이 벼락처럼 귀에 휘몰아쳤다.
“명심하거라, 권가야. 세자가 네게 현혹되어 내 아들 중 누구 하나라도 죽이려 드는 날, 네가 먼저 전균처럼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천재이신 세종이시니 내가 미래를 알아 수양 대군을 경계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셨을 것이다.
그러면 세종께서는 아직은 노골적으로 역모를 도모하지 않은 수양 대군을 벌하시기에 앞서 저지르지 않은 미래를 세자에게 누설한 자신을 먼저 벌하려 하시리라고, 그렇게 벌하시기 위해 세자를 급하게 불러들이신다고 윤서는 짐작했다.
‘나라도, 금똥이를 누가 그리 해하려 한다면, 나라도!’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의 마음을 진실로 알게 되는 것처럼, 금똥이를 낳아보니 윤서는 그토록 명철하신 세종께서 아들들의 문제에는 왜 그토록 순진하시고자 하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 순간 윤서는 옆에서 천진한 얼굴로 놀고 있는 금똥이를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세게 안았다가 유모에게 건네며 당부했다.
“내가 급히 적어야 할 것이 있어서 다른 날처럼 직접 우리 금똥이를 재우질 못하네. 유모. 내 자네를 유모로 뽑을 때, 사랑을 많이 받고 컸다고 해서, 그래서 그 점이 마음에 들어 뽑은 것이야. 그러니 자네가 받은 사랑처럼 우리 금똥이도 사랑으로 돌봐주게.”
“···마, 마마님, 무, 무슨?”
갑자기 비장한 얼굴로 유언처럼 말하는 권 승휘를 보며 유모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윤서는 거듭거듭 심호흡으로 폭풍처럼 뒤흔드는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마침내 평온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유모에게 말했다.
“언제든 여러 일이 생길 수 있는 궐이 아닌가. 부탁하네.”
“어마, 어마!”
윤서는 “엄마”를 부르며 울먹거리는 금똥이의 얼굴에 무수히 많은 입맞춤을 퍼붓고 단호하게 서재로 건너왔다.
그리고 붓을 들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쓰기 시작했다.
‘이향에게, 그리하여 우리 홍위와 금똥이에게 아는 지식은 모두 다 전해야 해.’
바쁘게 붓을 놀리며 윤서는 문득 세종과의 첫 알현이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남아, 자신이 때로 비이성적으로 세종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개처럼 끌려 들어간 천추전에서의 첫 알현은 결국 전균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그래서 윤서는 붓을 놓고 눈을 감고 어깨를 토닥이면서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안구 운동 요법을 스스로 행하여 두려움의 상당 부분을 해소하려 애를 썼다.
‘그렇지만 군주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심호흡을 하고 눈동자를 움직여도 불안은 완전히 가시지 않아, 윤서는 그저 30년이 넘는 삶 동안 배워온 현대의 지식 모두를 종이에 옮기는 데에 의식적으로 집중하려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이향이 왔다.
“전하께서 저를 저하를 현혹한 마녀나 그 무엇으로 여기지 않으시던가요?”
윤서가 묻는데, 이향은 대답 없이 저벅저벅 걸어 윤서가 써 놓은 무수한 종이들을 하나씩 집어 빠르게 읽었다.
[모터를 움직이면 운동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 이 전기 에너지는 구리를 감아 만든 축전지에 저장될 수 있는데 정확한 원리는 모른다. 그저 현대에서는 흐르는 강물에 높은 담처럼 생긴 댐을 철근을 넣은 콘크리트(석회석을 이용하여 만드는 아주 단단한 물질)로 쌓은 후, 거기서 떨어지는 수력을 이용해 터빈을 돌리고, 그 돌리면서 생겨난 운동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꿔 전송하고, 또 축전지에 저장한다는 것만 배웠을 뿐이다. 전기 에너지는 구리를 주로 한 전선을 통해 옮겨져 각종 물체를 돌리는 동력과, 유리알로 만든 전구의 빛을 밝히는 용도로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고 (중략)]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도처에 있다. 이 세균은 유리와 유리 뒷면에 수은을 이용한 물질을 칠해 만드는 거울을 여러 개 장착한 현미경을 만들어 관찰하면 보일 수 있다.]
그 밑에는 현미경이라고 그린 그림이 있었다.
[세균을 관찰하면 병원균을 찾아낼 수 있고, 획기적인 치료가 가능해진다. 각종 세균을 죽일 수 있는 항생제는 음식이 부패하면서 생기는 푸른 곰팡이에서 추출하는데, 정확한 원리는 모른다. 하지만 실험을 통해서 (중략)]
“윤서야, 너는 대체!”
이향은 어지럽게 놓인 종이 뭉치와, 또 그 위에 두서없이 적힌 내용을 통해 윤서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그렇게 지독한 두려움 속에서도 무엇을 끝내 전해주고 싶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하아, 권윤서. 내가 있는데 네가 왜! 왜, 죽을까 봐, 이게 다.”
“제가 미래를 알아도 그냥 넘어가 주시는 것인가요? 그 위대한 세종 대왕께서는?”
윤서가 묻자 이향이 다가와 윤서를 와락 당겨 안았다.
“네가 살던 세상에서 저 광화문 앞에 불상처럼 세워져 계시다는 그 위대한 세종 대왕이든 그 누구든, 너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조선에 없다, 권윤서.”
단호하게 선언하는 이향에게서는 밤새 달려오며 흘린 땀 냄새가 진동하였다.
윤서는 힘껏 이향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향의 목에 팔을 두르고 속삭였다.
“더 세게 안아주세요. 더 세게. 앞으로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지금 들이마시고 있는 땀 냄새와, 당신 팔의 강인함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세종을 처음 뵈었을 때 받은 충격적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껏 안고 손가락으로 제 등을 톡톡 두드리세요.”
이향은 시키는 대로 윤서를 힘껏 껴안고, 손가락으로 등을 토독토독 두드렸다.
윤서는 등에 와닿는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며 동시에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그리고 반송방에 외출했다가 돌아온 직후 전균 일행에게 짐승처럼 양팔을 잡혀 세종 앞에 끌려갔던, 조선에 온 후 가장 공포스러웠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제 그 순간은 먼먼 과거에 불과하다. 내가 미래를 안다는 것을 아시고도 세종께서는 나를 죽이려 하지 않으신다. 나는 이향의 품에서 안전하다.’
윤서가 스스로에게 행하는 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요법) 치료 의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