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화. 뜨거운 밤의 고백
“저하······.”
이미 두 번이나 두창 예방 침을 맞았기에 옮을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윤서는 이향을 밀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향은 오히려 더 침의 자락을 넓게 펄쳐 윤서의 몸을 감쌌다.
얇은 침의 자락에는 싸늘한 한기와 차가운 밤 내음이 흠뻑 묻어 있었다.
“···밖에, 오래 서 있었어요?”
“아니오. 천천히 걸어와서.”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고 해도 이 추운 겨울에 침의 차림으로 자선당에서 여기까지 천천히 걸어오다니.
열에 혼곤하였던 의식이 한기에 깨어나며 마음에 부드러운 감동이 일었다.
윤서는 손을 뻗어 어스름 속 희게 빛나는 이향의 뺨을 쓸었다.
손끝에 와 닿는 뺨이 차가웠다. 윤서는 남은 손을 마저 올려 추위에 얼은 뺨을 감싸고, 얼굴을 마주 대었다.
윤서의 뜨거운 숨결이 이향의 차가운 얼굴에 쏟아졌다.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채 서로의 숨결을, 서로를 향한 마음을 밤의 침묵으로 나눴다.
이윽고 이향은 윤서의 등과 누워 있던 요가 모두 축축한 것을 발견했다.
“이부자리가 너무 축축하다. 안 되겠다. 여봐라!”
“예, 세자 저하.”
밖에서 밤번을 서는 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부자리 새로 내오고, 몸을 식힐 미지근한 물과 수건을 들여오너라.”
“예, 세자 저하.”
“저하, 여긴 나인들에게 맡기고 돌아가셔요. 내내 곤하셨는데.”
“잠드는 거 보고.”
나인 둘이 새 이부자리와 물이 든 놋쇠 대야를 들고 왔다.
요를 새로 깔기 위해 일어나니, 정말로 잠옷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인이 새 침의를 가져왔다. 보통 입는 얇은 저고리와 치마가 아니라, 수유하기 편하도록 현대의 잠옷처럼 통으로 벙벙하게 길게 만들어 입은 잠옷이었다.
나인 둘이 윤서의 잠옷 시중을 들 준비를 하였다.
“저하.”
이제는 나인들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고 입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이향이 보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기는 몹시 쑥스러운 일이다.
윤서가 곤란한 표정으로 이향을 보자, 이향은 낮게 웃고는,
“너흰, 나가보거라.”
오히려 나인들을 내보냈다.
아직 어린 나인들은 저희끼리 눈을 맞추며 얼굴을 붉히더니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이향.”
열이 오른 얼굴을 더욱 붉게 붉히며 윤서가 책망하듯 고개를 흔들자, 이향은 문득 이 여인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구나, 잠자리를 할 때는 무척 과감하면서도 평소에는 이렇게 여전히 수줍어하는구나 싶어 놀리듯 채근하였다.
“어서 땀을 닦고, 마른 옷 입고, 자자꾸나.”
눈동자가 짓궂게 빛나는 것을 보니, 이향은 오늘 밤 기어이 직접 몸을 닦아줄 모양이었다.
목욕탕에서 종기 검사를 하다 유희를 즐긴 적이야 많지만 그건 뿌연 수증기 속에서이다. 이렇게 훤한 불빛 아래 몸을 보인 적이 거의 없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윤서는 고분고분 걸어가 이향 앞에 앉았다.
조선의 세자 이향은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지 않은 적이 없기에.
이향은 윤서의 젖은 잠옷을 벗기고, 물에 적신 수건을 세게 짠 다음, 얼굴부터 몸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다.
몸에 닿은 물기가 증발하면서 열이 점점 내려갔다. 윤서는 지분거리는 손길을 받으며 손을 뻗어 아까 순덕이 준비해 주었던 탕약과 물도 마셨다.
새 잠옷을 머리 위에 씌워주며 이향이 문득 말했다.
“이렇게 하니 우리 첫 밤이 생각나는구나.”
비현각에서 뜨겁게 밤을 보내고, 자선당 동온돌에서 온몸을 닦아 주었던 그날의 밤을 이향이 말하자, 윤서는 문득 금똥이가 곁에 없다는 자각이 들었다.
자선당의 그 시절처럼 지금 침실은 동쪽에, 그리고 홍위가 잠들던 서온돌처럼 금똥이가 대청마루 건넌방에 잠들어 있다!
“옷을 입혀줘요. 잠깐만 금똥이 확인하고 돌아올게요.”
윤서는 이향이 머리에 씌워주는 잠옷을 서둘러 잡아 내린 후, 그대로 방문을 나서 대청마루로 나갔다.
“하아.”
정말로 권윤서는 변함이 없구나.
그때도 늘 열락의 시간 후 서둘러 대청마루를 건너가더니, 지금도······.
그러나 윤서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유모와 함께 고롱고롱 잠든 아기를 확인한 후, 뺨에 살짝 입술을 댄 후, 유모에게 다시 자란 손짓을 하고 다시 대청마루를 건너 이향에게 돌아왔다.
“어서 누워요, 이향. 주무셔야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윤서는 아이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이향에 대한 마음도 깊어졌다. 사내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그리고 인생의 반려로서도 이향이 훌륭한 배필이라는 점과 더불어.
윤서는 차츰 군주로서 이향이 짊어진 무게를 실감하게 되었다.
홀로 감당하는 이향의 고독이 느껴질수록 윤서는 그에게 좋은 여인이 되고 싶었다. 위로와 믿음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두 사람은 보송해진 이부자리에 함께 누웠다.
물수건 덕에 한결 열이 내린 윤서는 이향의 품을 파고들어, 속삭였다.
“금똥이가 없는 이 밤, 뜨겁게 유혹하고 싶지만, 예방 침을 맞아 한창 두창 균이 활동하고 있는지라 허벅지 꼬집으면서 참고 있어요.”
이향의 가슴이 잘게 떨렸다. 웃음을 참는 듯했다.
“오늘 하루는 어떠셨어요?”
윤서가 묻자 이향은 화폐 유통을 위해 전하와 조정의 대신들, 집현전의 학사들과 논의한 사안을 들려주었다.
“그때 부족했던 구리는 유가 유구국에서 가져올 것이고, 또 한남군이 국초부터 지성으로 우리에게 백제의 후손이라며 교류를 소통하는 대내전에서도 구리와 은을 들여오기로 해서 별문제가 없는데, 적정 화폐 유통량을 정하는 문제에서 의견이 갈린다.”
“!”
윤서는 상체를 일으켰다.
어둠 속에 이향의 눈동자가 짙게 반짝거렸다.
태종 때도, 또 세종께서도 실패한 화폐 유통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큰 듯, 잠기운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초롱한 눈빛이었다.
윤서는 세종께도, 그리고 이향에게도 종이 화폐인 저화와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조선통보를 유통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 지금 새로운 치세를 연 이향이 화폐 유통의 성공을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는지도 잘 알았다.
윤서는 이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은행을 세워요.”
“응?”
“내수사에 재산이 많잖아요. 그리고 무역을 통해서 앞으로 더 벌어들일 것이고요. 왕실이 지급 보증을 서는 은행을 만들면 새로운 화폐에 대한 불신이 빠르게 없어질 것이에요.”
“은행이, 무엇이냐?”
윤서는 은행에 대해 빠르게 개략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대략의 설명만 듣고도 이향은 빠르게 은행의 기능을 이해했다.
“송나라에 있었다는 전장(錢莊) 같은 곳이로구나. 그런데 그것보다 더 공식적이고, 체계적이고.”
“예. 일종의 국영 은행으로, 물가 조절 기능까지 할 수 있어요. 정확하게 어떻게 하는지는 같이 머리를 맞대봐야 기억이 나겠지만요.”
이향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윤서를 와락 껴안고 속삭였다.
“···요사이 방납을 엄격하게 처벌하면서 불만을 많이 가지게 된 부자들에게도 자본을 출자하라고 참여를 유도해도 좋겠구나. 하아. 내일부터 윤서야, 너도 화폐 관련 회의에는 참여하거라. 이 조선에서 너처럼 은행과 화폐에 대해 아는 인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될까요?
저는 여인인데요.
윤서의 말끝에 생략된 의문을 모를 이향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하던 이향은 윤서를 도로 눕게 하고, 품에 다시 폭 안고는 조정 대신과 집현전의 학사들이 논의하는 곳에 어떻게 하면 윤서를 참석하게 할까 고심하였다.
그간 윤서는 수양 대군과 윤씨 부인에게서 홍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만 온통 신경이 가 있었고, 이향은 윤서가 특정 사안에 대해 말해주는 단편적인 지식으로도 충분히 필요한 성과를 내오고 있었다.
그러나 화폐 유통은 달랐다. 태종 때부터 국왕의 숙원 사업이었고, 세종께서 이례적으로 가혹하다는 백성의 원망을 감수하면서까지 부단히 시도하였으나 거듭거듭 실패하기만 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해야만 하는 정책이었다.
이향은 방법을 찾아냈다!
“세손을 참관 교육한다는 명분으로, 윤서 네가 우리 홍위를 돌보는 보모 자격으로 참석하거라.”
“응? 하지만 우리 홍위는 보모 따위는 이제 필요하지······.”
말을 하던 윤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방법 외에 당장 화폐 유통 정책 회의에 윤서가 참여할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윤서는 이향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가서 가만히 듣다 보면 저도 경제학 시간에 배웠던 화폐 유통과 은행에 대해 더 세세한 지식이 생각날 것이고요. 우리 홍위도 미리미리 제왕 교육도 받게 되는 것이고요.”
너무 어려서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세종과 이향의 비범함을 닮았으니 훗날의 치세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아까 결정했던 한명회의 일이 떠올랐다.
윤서는 잠시 망설였다.
한명회 이야기를 하면 박 상궁 마마님의 조직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계속 숨기고 있다가 남에 의해 발각되면 그땐 더 크게 해를 당할 수 있다.’
고려의 잔당이 역모를 꿈꾸고 윤서에게 접근하였다는 모함과, 윤서도 금똥이를 끼고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모함을 당하기 딱 좋았다!
윤서는 이향을 믿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은 늘 이향에게 솔직하였으므로.
“한명회가 광평 대군과 일하고 있어요.”
“응!?”
“한양에 두창 예방 침을 놓는데, 그자가 광평 대군을 도와 일을 꽤 잘해서, 사흘 뒤 평양으로 떠나는데 자가께서 데려가기로 하였어요.”
“···그래서, 죽이기로 하였느냐?”
이향은 육 개월 전 금똥이를 낳을 때 윤서가 한명회를 죽여달라고 부탁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임신의 마지막 달이 될 때까지 서늘하게 이지적인 미를 잃지 않던 윤서가 그날, 심하게 부어오른 얼굴로 이마에 퍼런 핏줄이 드러나도록 산고의 고통을 참으며, 죽을지 모를 두려움 속에서 절박하게 자신의 저고리 깃을 움켜쥐고 말했었다.
“이향. 나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 만, 사람, 이름.”
사람에 대한 것은 함구하란 자신의 엄격한 명을 어기면서 윤서는 지독한 통증에 짐승처럼 끙끙 신음을 흘리는 사이로,
“내가, 죽, 으면, 하아, 그자, 를, 내, 저승, 동, 무로, 삼아, 줘! 이향!”
하고 기어이 말하고 말 때.
이향은 심장에 칼이 쑥 들어와 박히는 것과 같은 격정적인 감동을 받았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심지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조차도 자신과 홍위를 위해 이토록 진실로 마음을 써주진 못 하리라는, 윤서가 말하는 어릴 적 ‘결핍’의 구멍을 모두 다 채워주는 것 같은 신뢰와, 기쁨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향은 윤서를 통해 역사의 배신을 안 후에도 <‘아직 짓지 않은 죄’로 사람을 단죄하지 않겠다>는 군주로서의 엄격한 원칙을 깨고 한명회만큼은 윤서의 손에 주기로 마음을 먹은 바였다.
“그자가 정말로 허튼 짓을 하면 언제 어떻게 죽여도 좋다.”
이향은 거듭 말하였다.
그러나 윤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을 잘한다고 광평 대군이 칭찬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실제 역사에서도 그자는 여러 비범한 일들을 하였지요. 지금 시행하는 두창 예방 접종 사안은 장차 조선의 미래에 아주 중요해요. 건주 여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윤서는 일찍이 이향에게 나중에 먼 훗날 건주 여진의 한 일파, 아이신고로 비슷하게 발음되는 건주 여진 일족이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우리 조선을 침공한다는 역사를 말해준 바 있다.
그래서 이향이 이번 두창의 확산을 기회로 느슨하게 교류 중인 여진족을 차츰 조선에 동화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사람을 붙였어요, 이향. 그자가 광평 대군을 도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제대로 하는지, 허튼 마음을 먹지 않는지 감시할 사람을 붙였어요. 그런데, 이향, 제게 조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