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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23화 (123/255)

제 123화. 두창과 동궁의 아이들 (2)

협경당에 어둠이 내리고, 시끌벅적하게 놀던 아이들도 각자 배정된 처소로 돌아가 잠든 밤.

윤서는 의녀 순덕과 함께 각 방을 돌며 아이와 어른의 상태를 확인했다.

두 번째 맞는 아이들은 미열도 거의 없이 평소와 다름없고, 생후 육 개월로 처음 두창 예방 침을 맞게 된 광평 대군의 아들 수복과, 양 사칙의 딸 선아는 미열이 있지만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순례의 마지막 순서가 윤서의 전각과 가장 가까운 전각에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잠들어 있는 홍위와 희아였다.

“광평 대군께서 워낙 잘 지휘하신 덕도 있지만 실제 두창 예방 침의 적용 방법을 확립한 것은 전 주부와 자네가 아닌가? 기간이 길지 않았는데 이리 큰 성과를 내다니, 참으로 장하네.”

뜰을 가로질러 가며 윤서가 치하하자 의녀 순덕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기 다 승휘 마마님께서 ‘임상 적용과 치료 성과 확인 방법론’을 먼저 제시해주신 덕분입네다. 지침이 확실하게 있으니, 저희는 고저 따라가기만 하믄 되었지요.”

대학원에서 심리 임상 실험을 진행하던 방법론을 응용해 두창 예방 침의 효능을 교차 검증할 방법론을 제시하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15세기 조선에서 쉽게 낼 수 있는 성과는 결코 아니었는데도 순덕은 겸손했다.

순덕은 윤서가 금똥이를 낳을 때 해산 과정을 전담한 의녀로, 지난해 혜민국에서 선발한 의녀 중 가장 의술이 빼어나 장차 의녀가 아닌 의원으로 일할 자였다.

평안도 정주에서 관비로 있다가 총명한 머리와 야무진 손 솜씨로 의녀로 뽑힌 순덕을 눈여겨본 윤서는 양민으로 속량해주었고, 전순의에게 직접 의술을 사사하게 하는 한편 혜민국 가까운 곳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 보답으로 순덕은 윤서의 심복이 되어 휘하 의녀 다섯 명과 함께 진료를 통해 세도가의 동향을 수집하여 보고하는 일도 시작하였다.

“광평 대군은 일차로 평양에서 두창 예방 침을 접종한 후, 그 이후 계속 북상하면서 여진족까지 아울러서 두창 예방 접종을 계속할 거야. 세자 저하께서 이번 기회를 여진족 세력을 우리 조선에 동화하게 할 기회로 보고 계신다.”

“예, 알갔습네다.”

왜 이런 거창한 계획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가 여쭐 만도 하건만, 순덕은 그저 집중해서 귀에 담았다. 혜민국에서 처음 권 승휘를 뵈었을 때,

“관비라고 기죽지 말고 의술에 집중하거라. 그럼 네가 되고 싶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다.”

하시기에 힘껏 노력했더니 어느새 양민이 되고 혜민국 의녀 수장이 되고, 장차 벼슬을 받아 양반도 될 수 있을 거라 하셨지.

노비로, 그것도 얼굴 꽤 반반한 여자 노비로 이리저리 천하게 치이기만 하던 순덕에게 장차의 세자빈 마노라는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광평 대군과 함께 평양에 가서 두창 예방 침 업무를 지휘하거라. 그리고,”

윤서가 말을 멈추자 순덕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명을 내리시든 그대로 따를 것이란 의사 표명이었다.

윤서는 말을 이었다.

“취반비(炊飯婢, 음식을 장만하는 종) 명목으로 네게 사람 하나를 붙여줄 것이야. 그자가 한명회란 자의 동향을 살펴 네게 보고할 것이다. 네 판단에 한명회가 미심쩍은 행동을 하는 것 같으면 취반비에게 손을 쓰라 명하거라.”

“!”

등불을 손에 든 순덕의 동공이 동굴 속에 막 들어선 눈동자처럼 커졌다. 어둠을 거부하고 조그마한 빛이라도 절박하게 찾는 것처럼.

키가 큰 윤서가 순덕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하였다.

“원하지 않으면 거부해도 된다. 지금처럼 한양에 있어도 돼.”

사람 살리는 의원이 사람에게 손을 쓰라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까지야 방문 진료를 하며 귀동냥으로 소식을 모아 오는 것에 불과했으니. 윤서는 거절해도 받아들일 생각으로 그리 말하였다.

그러나 순덕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마마님이 어데 근거도 없이 사람을 해치고 하실 분이십네까? 소인은 고저 미심쩍은 행동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했던 것입네다.”

윤서는 휴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거절했으면, 내심 상처받았을 것이다.

“수양 대군을 비롯해 유력 세도가와 정치 관련된 소식을 주고받으며 무언가를 꾸미는 기색이거나, 광평 대군에게 허튼 바람을 넣어 부추기는 것이다.”

영민한 순덕은 금세 알아들었다. 권 승휘 마마님의 해산을 궐에서 도우면서, 그리고 대가댁 방문 진료를 나가면서 듣고 본 것들이 있었다.

“손은, 어케 씁네까?”

“다리를 못 쓰게 만들 거야.”

“다리보단 눈이 낫지 않갔습네까? 눈 안 보이게 하는 약재도 많은데. 기건 표 안 나게 소인도 할 수 있습네다.”

“아니다. 일을 잘한다니, 눈은 잘 보여야지.”

인간의 정신은 신체의 조건에 제약된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는 칼과 창으로 사람을 죽여가며 궐 문을 열어야 할 역모를 꿈꾸긴 어려울 것이다.

좌절된 야망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심을 다하여 광평 대군을 도울 것이다.

******

홍휘와 희아는 미열도 없이 보통의 밤처럼 평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금똥이는 열이 약간 있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순덕이 자신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겠다고 말했다.

“마마님이 더 걱정입네다. 얼굴에 홍조가 일도록 열이 나시는데 누워 쉬시라요.”

“응, 잠깐 누구 좀 만나 뵙고.”

윤서는 금똥을 잠시 순덕과 보모 나인에게 맡기고 매금이와 함께 박 상궁을 찾았다.

윤서가 협경당을 하사받은 후 박 상궁도 전각 하나를 받아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함께 논의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날의 일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 매금이만큼 실력이 빼어난 이가 두 명이 필요해요. 여차하면,”

“여차하면 급소에 칼 박아 넣을 이가······. 이제 익숙해진 것이냐?”

박 상궁의 질문은 때로 가장 깊은 본질을 건드린다. 행동으로 결과를 자아내야 하는 궐의 생활에서, 권력의 삶에서 결코 들춰보고 싶지 않은 그 본질을.

“윤씨가 죽고 난 후 근 사흘을 밥 한술 제대로 못 뜨더니. 죽여 없애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게야?”

쉽게 죽여없앨 생각은 아니었지만, 박 상궁의 노골적인 표현에 윤서는 잠시 지금의 행위를 짚어보아야 했다.

“···죽이는 것은 익숙해질 종류의 행위가 아니에요.”

사회는 인류의 야만적 본능을 교육과 제도로 순치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흔히들 말한다. 법과 제도가 없다면 인간 사회도 동물의 약육강식의 세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길 본능적으로 희망하기에 사회 전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윤서는 믿는다. 할 수만 있다면 대개의 인간은 도덕적인 삶을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 도덕적 행위인가의 판단 기준이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윤서는 이제 안다.

자신은 이제 21세기 인간 권윤서도, 애달프게 홍위를 위해 동동거리던 보모 나인도 더 이상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아까 배를 쑥 내밀며 말하는 홍위를 보고 불현듯 깨달았었다.

윤서는 그 깨달음을 박 상궁에게 털어놓았다.

“우리 홍위가요, 우리 세손 아기씨가요. 도원군을 챙기시더라고요.”

“응? 아기씨가?”

그 얄미운 놈을 왜 챙기신다니.

“우리 홍위는 아직 꼬꼬마 어린 아기인데도 아는 거죠. 자긴 이제 은근하게 무시당하던 어린 날의 원손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지지와 사랑을 든든히 받는 세손이라는 것을. 하지만 어른을 포함해 대다수 인간은 형편이 나아지면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요. 그리고 자신의 과거 같은 이들을 무시하죠.”

그래야 나아진 현실을 더 우월하게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홍위는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길 괴롭히던 아이에게 손을 내밀죠. 세손이니까. 장차 이 나라 조선을 다스릴 군주가 될 테니까. 한 달 후면 고작 다섯 살이 되는 어린아이인데도 벌써 그걸 알아서 행해요. 전 그렇게 훌륭한 우리 홍위의 정식 엄마가 될 것이고요.”

윤서는 권력을 쥐게 된다.

더 이상 전하와 중전마마의 진노에 목숨을 위협당할까 두려움에 떠는 후궁 따위가 아니라 세자의 공식 반려가 된다.

그것은 세자의 반려로서 윤씨 같은 이들을 고발할 수 있는 권력을 쥐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윤씨 같은 이들을 고발하고 처벌해야 할 책임도 아울러 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윤서는 홍위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강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약자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권력을 쥔 자는 권력을 쥔 자답게 행동해야 해요. 그래서 나 또한 우리 저하나, 우리 홍위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동원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음지의 힘일지라도.”

“······.”

박 상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하지 않았지만 물려받아야 했던 조직이었다. 거의 다 사라지고 겨우 몇 남은 조직을 결국 우리 권가에게 넘겨주게 되는구나.

망한 전조를 되살리려는 부질없는 노력 대신, 새로운 왕조의 광영에 힘을 보탤 운명이었구나.

“사실 좀 우스웠느니라. 고려 왕실을 되살려야 한다는데, 내가 들은 고려 왕실의 작태는 망해 마땅한 것들이었거든. 그런 얼척 없는 것들을 위해 우리 매금이 같은 애들을 쓰는 게 부끄러웠는데.”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을 감고 있던 매금이가 언제 졸았냐는 듯 눈을 반짝 떴다.

“매금이 밑으로 매은이와 매동이가 있는데, 매은이는 묶여 있어서 안 된다. 매동이와, 난금이를 보내야겠구나.”

“···혹시 이름이 매난국죽과 금은동으로 매겨지나요?”

“응! 매금이가 최고야!”

그 사실이 너무 뿌듯한지 매금이가 끼어들어 예외적으로 긴 문장을 말했다.

윤서는 광평 대군과 순덕이 곁을 지키며 한명회를 감시할 사람을 정한 후, 사쓰마 번에 세울 무역 거점을 논의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해 일본 현지에 세우는 무역 거점을 민간에서 맡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민간은 박 상궁과 윤서의 얼굴 마담 노산대가 대방으로 있는 예서 상단이 주축이 되었다.

사쓰마 번의 방박량진에 세울 사무소에는 양 귀인의 장자 한남군이 대표로 있으면서 일본과의 무역 교섭을 맡을 예정이었다. 한남군은 그래서 지금 방박량진에 가 도조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큰 건물을 건축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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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상궁과 이야기를 끝내고 거처로 돌아와 방에 들어서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아이, 내래 이러실 줄 알았습네다. 마마님은 처음 맞으시는 것이라 농포의 양을 제법 진하게 묻혔단 말입네다. 좀 누워서 쉬시라요. 큰 일 나십네댜.”

놀란 순덕이가 심한 사투리로 채근했다.

윤서는 금똥이 옆에 누워 아기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이마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럴 정도로 윤서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열 식히믄서 기력을 보할 탕약 들여오겠습네다.”

“아니야. 원래 세균이 들어가면 싸우느라 당연히 일어나는 면역 반응인 걸. 그냥 찬 수건만 좀. 그리고 우리 금똥이 혹시 내가 심하면 옮을까 무서우니 유모에게 데려가.”

육 개월이 지나면서 윤서는 금똥이에게 수유할 젖어미 유모를 구했다. 대개는 윤서가 수유를 했지만, 외부에 일이 있거나 오늘 같은 경우에는 유모에게 아이를 잠깐씩 맡겼다.

보모 나인이 금똥이를 건넌방의 유모에게 데려간 후.

윤서의 몸에 본격적으로 열이 올랐다.

금똥이를 옆에 두지 않고 자는 처음 밤이었다.

깨지 않고 통잠을 자는 순한 아기였지만, 그래도 엄마로서의 본능은 잠자는 중에도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 하나도 예리하게 잡아냈다. 작게 재채기만 해도 눈을 번쩍 뜨고 금똥이를 살필 정도로 지난 6개월 간 윤서는 깊게 잠들질 못했다.

혼자 잠자는 김에 윤서는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며 마음 놓고 잠을 잤다.

식은땀까지 흥건하게 흘리며 자고 있을 때, 불현듯 시원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으응?”

“좀, 시원하오?”

이향이었다.

이향이 겨울의 찬 기운을 온몸에 묻히고 와 윤서의 뜨거운 열을 내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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